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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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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5: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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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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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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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겼어도 사실은 종의 종교였다.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의 상황을 생각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종과 친구는 큰 차이를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종은 창조적일 수 없이 맹목적으로 주인의 명령에 수동적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친구는 함께 미래를 의논하고 나누며 관계에 있어서도 격이 없이 의견을 내고 서로 간에 더 좋은 것을 함께 선택할 수 있는 창조적이고 능동적이다. 어쩌면 이것은 교육에 있어서도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지는 것을 본다.
수동적으로 오로지 공식을 외우고 교사의 가르치는 것을 꼭 같이 반복하게 하는 것은 창조성이 없다. 기본이 되어있기만 하다면 오히려 각자에게 과제를 주고 스스로가 그 일을 해결해 보도록 자율성을 주는 것이 각자의 개성이나 다른 다양성을 개발할 수 있는 교육이 될 것이다.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 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 또한 주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안에 거한다면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옆으로 지체들과의 관계도 더욱 긴밀해질 수 있음을 권면하시는 교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하셨듯이 사랑이 가장 귀한 계명이고 영원한 것이며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소돔성의 멸망을 알게 해 주셨던 것처럼 이 역사의 흐름을 기꺼이 우리에게 알게 하실 것이다.
바로 앞에서 나누었던 말씀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로 나서 열매를 맺도록 세우심을 입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구함으로 구하는 것을 늘 받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할 수 있도록 우리는 종이 아니라 친구로 부르셨다고 확인하신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 된 감격으로 사랑받은 것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기쁨이 충만한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
Ⅰ. 사랑안에 거하라(9~11)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처럼 그 사랑안에 함께 거할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이 첫째부분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 한 가지 더 분명히 하여야 하는 것은 “나의 사랑 안에”라는 말씀은 더 정확히 말하면 “내 것인 그 사랑에”라는 말이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같은 권면을 주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공의의, 생명의, 빛이신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고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만큼 아버지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자라야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이라는 증거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심판하시고 벌 주시려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는 경우는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뭐 책망할 것 없는가?’ 엿보시는 하나님으로만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렇게 아는 것 자체가 죄성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 사랑안에 머물러 본 사람이라야, 사랑받아 본 사람이라야 비로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으신 경험을 가지고 너희들도 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있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늘 얘기하는 것처럼 사랑만큼이나 실제적이어야만 경험하는 것은 없다. 관념적인 사랑은 사랑일 수 없다. 그 사랑의 실제성을 증거하는 말씀이 바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안에 감격하며 그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맛보니 좋아서 나도 그 사랑받은 감격으로 너희를 사랑하니 그 사랑안에 한번 머물러 봐라!”하시는 권면이다. 이런 사랑의 초청이 바로 복음이다. 그럼에도 죄를 범하고 에덴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인간을 지배한 미움이 그 사랑을 이기고 있는 것이 이 죄악 된 세상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사랑안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일러주신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0)
우리는 이미 이러한 원리를 14장에서 여러 번 반복적으로 들은 바 있다. 물론 거기에서는 오늘 내용의 반대적인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지만 내용은 다르지 않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21f)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23)
이 모든 말씀들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0b)는 말씀과 다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하는 내용이 첫 부분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10f)
주님께서는 자신은 행하지 않으면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반드시 자신이 행한 후에 그 모범을 가지고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가도 말씀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1) 우리를 힘겹게 하거나 어려움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 기쁨이 넘치는 것처럼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므로 같은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인생살이에 있어서 기쁨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만은 안타까운 것은 주님께서 경험하시고 행복해서 권하시는 말씀조차 그를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우리는 잃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확신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괴롭히고 싶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충만할 수 있게 하려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권면하시는 것이다.
Ⅱ. 종이 아니라 친구로 대우하신다(12~15)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그 크신 사랑을 옆으로 지체 간에 나눌 것을 당부하신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 특히 이것을 “계명” 이라고까지 표현하시는 것은 그만큼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나누셨던 그 사랑으로 죄의 저주 아래 놓인 우리를 해방하게 하시려고 십자가로 구속을 이루시고 화평과 사랑을 회복해 주시고 자신이 몸소 그렇게 그 큰 사랑을 실천하신 것은 서로 미움과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하도록 계명을 주신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과거 이스라엘은 오로지 두려움의 종교로 늘 죽을까 봐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역사 속에 더러 나타난다. 율법 속에 종은 인격이기 보다는 사실 주인의 재산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팔고 사고 죽여도 당연하게 여겼었다. 그런 모습 속에는 예수님처럼 본래 종이었던 우리를 위해서 죽는 예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13) 하심으로서 우리를 친구로 여기고 대속의 죽음을 기꺼이 감당하셨다는 말씀이다. 사실 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ἀγάπη]”을 제외한다면 이 지상에서는 “우정[φίλος]”보다 귀한 사랑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나눈 기억이 있는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어떤 경우에 친구는 경쟁관계도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렵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런 입장에서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13)라는 말씀이 옳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친구 삼으신 것은 가히 파격적이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4) 마치 앞에서 v10b에서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는 말씀과도 다르지 않다. 신분이 같아서도 지식이 같아서도 격(格)이 같아서도 아닌 전혀 자격이 없는 어떤 사람이든지 주님께서 명하시는 대로만 행하면 친구로 인정해 주시는 것 자체가 세상의 논리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원리를 설명하신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 여기에 종과 친구의 분명한 차이를 구분해 주고 계시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15f)
여기 “이제부터는” 하신 것은 OT의 모든 것을 회복할 메시야를 주시겠다는 막연한 약속과 함께 오로지 경계의 교훈인 부정적인 계명인 “하지 말라!”시는 율법아래 두려움으로 섬기던 모습이 아닌 전혀 새로운 언약을 주신(렘31:31~33) 복음으로의 출발을 말씀하심이라고 이해된다.
종의 상태는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고 하셨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이 시키는 것 만을 기계적으로 감당해야만 했다. 어떤 것이든 주인이 하라고 하면 목숨을 바치기까지 그 일을 해 내야 하는 것이 종으로서의 자세이고 모습이었다.
그러나 복음 속에서는 앞에서도 말씀하셨듯이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위하고 배려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행할 일들을 하나도 숨김없이 나누는 입장이기 때문에 종이 아니라 친구가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을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b) 증거하신다.
OT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도 종으로 불려졌고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의 멸망을 미리 알게 하시면서 친구라고까지 특별한 배려를 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사41:8) 이 말씀도 점진적으로 점점 가까워진다.
OT의 하나님과 직접 대면했다고 말하는 모세나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특권을 가졌던 아론도 성군이라 이름하는 다윗도 불의 종이라 이름하는 엘리야도 모두 종이었을 뿐이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를 힘입어 주님의 명령하시는 대로 행하기만 하면 친구로 대우해 주시니 얼마나 황송한 일인가!
Ⅲ. 택하여 세우심에 합당하게 행하라(16~17)
이 v16 말씀은 앞의 v7~8의 확인 같은 말씀이 다시 주어지고 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다만 차이가 있다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16f)라는 내용을 앞에 덧붙인 것이다. 하나님의 일꾼은 사실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증거하는 내용이다. 이 선택된 사도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은 일반적인 복음으로의 구원의 선택과는 다른 하나님의 특별한 일꾼의 선택으로 보여 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ἀπόστολος, 사절, (그리스도의)전권대사, 사자, 보내심을 받은 자]”는 사도행전 속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뽑을 때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행1:21~22f)이라고 하여 그 자격을 거론하고 있다.
물론 “요한의 세례로부터”라는 말씀을 그리스도에 의해서 직접 불으심을 입은 사람이고 여기에 보충해서 죽음과 부활 즉, 복음의 완성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으로 말하기도 한다. 나중에 물론 바나바나 바울(사울) 실라까지도 사도로 불려 지고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 조차도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히3:1) 라고 표현됨을 본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6)
사람들이 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여 세우셨는데 그 선택의 이유를 첫째는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라고 말씀하신다. 두번째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증거하신다.
그럼에도 구하는 것을 항상 받을 수 있는 근거를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라고 말씀 하심으로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열매와 기도의 응답을 연관시키고 계심이 독특하다.
그리고 앞의 v8의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하여 열매와 하나님께 영광을 역시 연관시키고 계시다. 앞의 14:13에서도 역시 같이 말씀하신 바 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분명한 공식이 여전히 나타나는데 그것은 열매를 맺는 신앙이 항상 기도의 응답이 확실하고 그 응답과 열매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라는 원리가 그것이다. 아무래도 이것도 역으로 해석해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사는 삶이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에 응답이기 때문에 서로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오늘 말씀의 마무리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17) 말씀하시는데 이러한 모든 가르침의 이유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계에 모든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들이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소원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 아닌 사람 간의 사랑은 언제나 한계를 가진다. 하나님으로부터 즉, [ἀγάπη]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φιλός]나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인간적이고 육체적인 이끌 림인 남녀 간의 [ἐρώς]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자연적인 흐름의 [στόργη]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17)시는 귀한 가르침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흐르는 사랑은 그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믿음의 삶으로 열매 맺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받으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최종적으로는 이런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아름답고 긴밀한 사랑을 서로 간에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는 말씀의 이해는 자연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것이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산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므로 누리는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도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고리타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렇게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면 계명, 그것도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귀중한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OT시대와 같은 종의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의 모든 일을 우리 모두에게 숨김없이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우리를 종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는 친구로 대우하시기 때문에 자신도 친구일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2:11)라고 말씀하신다.
죄인 스스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친구로 택하심으로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다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서로 간에 상황과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지 상관없이 사랑으로 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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