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요 4:21~24 2013-11-24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이라면 몰라도 신앙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배의 자세와 삶이다. 물론 최초의 순교자 아벨도 제사에 목숨을 바쳤는데 그 사건이 의미하는 바도 크다. 믿음의 사람이면 늘 고민하는 부분도 역시 예배일 것이다.

올해도 우리는 겨우 한달, 다섯 주님의 날을 남겨놓고 있다. 나는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며 살았는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과연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그 하나님을 만난 감격 속에서 한 주간의 세상 삶을 감당할 것인가!’가 주님의 백성들의 삶의 과제이다. 예배와 삶을 따로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한주간의 첫날 주님께서 그 한주간을 이끄시고 삶을 주관 하시도록 시간과 삶을 맡기는 자세에 있어서도 자신의 예배는 점검되어져야만 한다.

매주의 첫날에 희생의 떡과 잔을 기념하고 흩어지는 예배는 삶의 출발이고 기본이기 때문에 예배를 빠뜨린 우리의 삶은 생각해볼 수조차 없다. 마치 어두운 세상에서 빛에 나아와 첫 단추를 바로 채우고 자신을 단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두운 세상에서는 인생의 첫 단추를 바로 잠글 수 없기 때문에 빛이신 주님 앞에서 그렇게 해야 하므로 주일을 지킨다는 것 이상의 가치가 예배의 첫날에 있는 것이다.

이 죄 투성이의 여인 역시 주님을 만나 돌아가는 이야기가 다르지 않음을 본다. 신령한 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모두가 낮잠을 즐기는 뜨거운 한 낮에 물을 길으러 나온 이 여인도 역시 어렴풋이나마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주님께 예배를 묻고 있는 것이다.

주님 역시 먼 길에 피곤하시고 시장하셨지만 이 가련한 여인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예배의 중요성과 자세를 일러주심으로 오늘 우리가 함께 배우게 되는 것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예배를 드리기를 기대하고 계심을 배운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b) 이런 입장에서 주님께서는 오늘 참된 예배를 잃어버린 시대와 사람들을 안타까워 하실 것이다. 우리가 자주 다루는 부분이고 실제적인 부분이기 대문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이 중요한 삶을 다룸에 있어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서 예배의 자세를 주님의 말씀 속에서 확인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림으로 주님의 허락하신 넘치는 은혜와 평강을 세상의 모든 삶에서도 넘치도록 누리는 …



Ⅰ. 장소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이 여자는 예배에 있어서도 전통을 먼저 말씀 드리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 그럼에도 주님의 이 여자의 말에 대한 답변으로서도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21f)

사람들은 대개 예배의 장소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이다.[기가 샌 곳-세상사람; 어느 기도원-기독교인] 하나님께서 어느 장소나 공간만을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으시고 예배자의 자세를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다. 우리시대의 종교적 병폐는 어느 건물 하나를 성전으로 정하고 마치 그 곳에만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어디가 되었든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곳이라면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우리 주님은 “나도 그들 중에 함께 하겠다.” 말씀하신다.(마18:20)

어디보다도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마음을 성전으로 삼으시고 성전 된 사람들이 모인 곳에 그곳이 초라하든 화려하든 관계없이 당연히 기쁨으로 함께 해 주실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편리를 따라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면제부를 주려는 말씀은 아니다.

이 시대에도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이 산’이나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만이 주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곳으로 스스로 정해버린다. 주님은 이 산이나 예루살렘을 부정하시면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b) 말씀하신다.

축복을 선포하기 위한 그리심 산이나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모두가 완전한 제사가 아닌 임시적인 짐승으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를 속함 받으려는 온전치 못한 희생제사였지만 이제 주님께서는 자신이 이루실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예배를 예언하신 말씀이다.

그럼으로 이 말씀도 한번으로 완전한 제사를 완성하신 주님 자신의 희생을 통한 제사의 완성을 말씀하고 계신 표현이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4) 자신의 몸으로 제물이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헛된 제사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오직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만을 공경케 하셨다.

어느 시간이나 공간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배하는 각 사람의 중심이다. 아무리 화려한 궁전 같은 장소일지라도 사람이 중심이 되어 사람을 기쁘게 하고 만족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을 위한 예배는 하나님께는 가치가 없는 영적으로 안타까운 것이다.



Ⅱ. 어리석은 예배가 있다.(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왜 잘못된 예배를 가치가 없다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바른 예배나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준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누가 그 기준을 결정하고 판단하는가?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바로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기준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은 핑계치 못할 것이다.

요한 사도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15:22) 주님께서는 분명한 기준을 말씀하시고 보이셨기 때문에 예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도 핑계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변명할 수 없는 때가 되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으로 하는 모든 것은 다른 헛된 모든 제사와 사실에 있어서 다름이 없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22f) 알지 못하고 하는 것들은 어떤 경우 사람에게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알지 못하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며 사람의 이성이나 감정에 상관없이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임을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6:3) 라고 탄식했던 것이다.

“…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하셨는데 주님은 아버지를 바로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 이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아신다는 보다 분명한 사실들을 말씀하시고 있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요8:5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 하셨는데 여기에 다행인 것은 아들 자신은 당연히 아버지를 아시지만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아버지를 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원하심에 따라 계시를 받는 자’가 아버지를 안다고 하신 것이다. 이러한 계시를 따라 오신 분이, 바로 유대인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는 것은 당연하다.

기도도 ‘그의 나라와 그의 뜻대로’ 이지만 계시도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귀중한 이치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어리석은 헛된 예배가 될 뿐이다.



Ⅲ.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제 바른 예배를 제시하시는데 그것은 성령과 사람이 함께 하는 예배임을 말씀하신다. 우리는 ‘참되다’거나 ‘바른’ ‘진실로’ 라는 표현을 입술로 자주 쓰는데 예배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그럴싸하거나 비슷한 것이 아닌 참된 예배를 드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이라는 표현은 ‘거짓된 예배’를 전제로 한다. 지금까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들의 산에서 드린 예배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드린 예배를 포함한다. 실제로 주님은 유대인들이 예배하는 성전을 부정하신 내용들을 성경에서 더러 읽을 수 있다.(마21:13; 막11:17; 눅19:46; 요2:14~17)

왜냐하면 하나님께 제사하는 성전을 사람의 이익을 위해 악용했기 때문이었고 구약의 솔로몬 성전을 이방인들이 허물고 불 태워도 그대로 두셨음을 보면 아무리 화려하고 위엄스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지은 전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하는 예배나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심을 보는 것이다.

주님께서 “참되게 예배하는 때는 곧 이 때라” 하셨고 그 구성 요소를 2가지로 말씀하신다. 그 내용이 이 두절 속에 모두 말씀 되고 있는데 곧 “영과 진리”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영과 진리”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것은 사실 단어의 뜻의 문제를 넘어 귀중한 의미를 가진다. ①“영[헬, pneuma, 바람, 호흡, 영혼, 생기, 성령 등등]” 그런데 여기 “참되게” 라는 말씀과 ②“진리” 라는 말씀이 어근이 같다. [헬, alethes, a-부정- + ledo-숨기다- 숨기지 않으므로)→헬, alethinos, 신뢰할만한, 진실된, 참된, 옳은 헬, aletheia, 진실, 성실, 사실, 정직, 진리의 사랑]

참되게나 진리로 예배한다고 할 때 당시의 모든 계급을 따라 드러내는 모든 신비종교의 감추는 모습과는 반대되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차이점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영적인 것은 하늘로부터라면 진리는 범죄하기 이전의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진실한 사람 그대로이다. 그러나 먼저는 숨기지 않는 사실과 진실이 바탕이 되고 세상의 것은 다 거짓되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실이 중요한 입장에서는 성경을 통해서 알려주신 진리를 의지하는 성실로 준비하고 드리는 것이 진리로 드리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 측의 자세가 될 때 비로소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사람과 성령이 함께 하시는 예배가 될 수 있고 이런 예배를 드리려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계속 해서 찾으신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b) 이것은 적어도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어떤 것도 꾸며지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주신 계시 그대로를 따라 예배 드릴 때 그러한 성실과 진실에 인치심으로 함께 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는 당연히 모든 이방 신을 섬기는 방법을 배제하게 된다. “예배[헬, proskyneo, 키스하다(개처럼 주인의 손을 핥는 데서 유래), 굽실 굽실거리다, 부복하다, 존경하다, 공경하다]”

사람이 원하고 바라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쁘심을 입을 수 없다. 예배야말로 모든 인간의 정욕을 내려놓고 진실하게 참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더 좋아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이 가장 진실한 그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주님의 뜻을 좇아 최고의 가치를 드리려 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예배를 비로소 예배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이 역사 속에서 찾으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성령의 생수로 충만한 모든 예배자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