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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이 자리에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에 제자들에게조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고 계심을 읽을 수 있다.
사실 믿음과 비슷한 요소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의 사람들조차 세상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막연한 기대를 믿음으로 생각하고 착각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으로 판단이 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2~23) 말씀하셨고 이러한 성경 속에 일들은 오늘 우리와는 사뭇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오늘 날은 허황된 이야기를 하나님 보다 더 믿는 것을 많이 본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문에 제자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수밖에 없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바울 사도는 표현하기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4:18~22)고 기록하고 있다.
현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전혀 먼 것 같음에도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데 주저함이 없었음을 우리에게 보여두고 있다.
제자들의 믿음이 주님과 같지 못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자들에게 오히려 연약함을 보일 수 있고 오히려 자신에게 범죄하는 형제들에게 용서를 하되 하루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빈다면 받아줘야 할 것을 가르치시는 주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누가는 기록하고 있는데서도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5~6)는 믿음의 위력을 증거하심도 기록되고 있다.
오늘도 우리 각자가 주님 앞에 믿음을 갖고 왔다고 하지만 이러한 자세가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실 수 있는 것인지 말씀과 더불어 점검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믿음을 회복하여 주님의 선하신 뜻을 맛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
Ⅰ. 위태할 때 믿음은 가장 필요하다.(22~23)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믿음이 과연 뭘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라고 믿음을 해설하는 것을 본다. 즉,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 나누고 있는데 이 말 자체가 우리에게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 헬, hypostasis = hypo 아래 +histemi, 서다; 히3:14-한글,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믿음은 각자의 단순한 기대나 소망이 아니라 확실한 것, 성경에 나타난 사실아래 서는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께 믿음에 따라 받은 것을 나에게 나타나도록 소망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헬, pragma, 일, 행위, 사실, 소송]의 증거, 헬, elengchos, 확증, 확신, 책망] 육신의 눈에는 보여지지 않지만 이 역사와 사람들 속에 진행되어지고 있는 것들로 종말에 반드시 보여지도록 나타날 확실한 것을 의미한다.
당시 유행하던 플라톤의 철학에서 pragma처럼 ‘절대로 보여지지 않는 하늘나라의 것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현실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나타날 미래의 분명한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것은 당시의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잠잠히 견디게 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한다고 해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했다.
본문의 믿음을 확인하게 된 배경은 평탄한 갈릴리의 항해 가운데서가 아니라 바람이 불어서 파도가 치고 배전에 물이 쏟아져 들어와서 배에 물이 퍼낼 수 없을 정도로 차올라 오는 상황에서 혼란 하는 제자들과 그와는 반대로 믿음을 견고히 가지신 주님은 그 아수라장 가운데서도 고요히 주무시는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당하게 될 때는 ‘귀가 얇아진다.’는 말을 듣는데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은 무엇이나 해보려고 하는 것에서 여기저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이 방법이 옳을까 저 방법이 좋을까를 저울질 하게 되는 혼란을 겪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픈 사람이 누가 무슨 방법으로 병이 낳았다고 하는 이야기라면 솔깃해서 검증되지 않은 방법을 다 사용해 보는 것 역시 믿음의 모습이 아니며 누가 이런 재테크를 하여 돈을 모았다는 이야기에 솔깃해서 그 방법에 현혹되는 이런 모든 것은 다 믿음의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내(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든지 우왕좌왕 하고 있을 때 주님은 나(우리)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물으실 것이다.
Ⅱ. 믿음이 없으면 나오는 말…(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믿음을 따라 행한다면 별일이 아닌 일도 우리는 너무 힘겨워하고 조급해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자연을 늘 다스리시고 이적과 표적을 항상 일으키시는 주님을 옆에 모신 제자들이 이랬다면 오늘 우리야 그럴 수 있지 않겠는가를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역시 그때의 제자들의 입장과 다르게 성령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적어도 주님을 언제나 부를 수 있고 깨울 수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라면 오늘 본문의 제자들의 모습은 문제가 있다. 최후에 만찬을 주님과 함께 나눈 제자들은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막14:26→50; 마26:30)던 제자들은 주님께서 가룟 유다가 대리고 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았을 때는 뿔뿔이 도망가버리는 초라한 모습이 어쩌면 어줍잖은 믿음의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일 것이다.
오늘 본문에는 확실한 2가지의 대조된 모습이 나타난다. 곤하게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며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는 믿음 없는 제자들과(언제 이들이 ‘주여 주여’ 라고 부른 적이 있는가!) 잠에서 바로 깨어 아직 잠결이실 주님의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는” 모습이 그것이다.(잠에서 막 깬 사람은 사실 본능적일 수밖에 없다. 이래서 주님은 확실한 믿음의 모범임을 보여주고 계신다.)
그때와 지금은 분명히 다름에도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여 당황할 때 나타나는 자세는 오늘 나는 과연 어디에 가까울까! 혹시라도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탄식을 하지는 않는가! 주님의 선하신 역사를 기대하면서 주님 앞에 조용히 맡겨드리는가!
Ⅲ. 진정한 믿음은 자연도 순종하게 한다.(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이런 일에 우왕좌왕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확인하신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앞에서 우리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거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는 말씀은 주님께는 실제적이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물론 나중 제자들에게도 이런 일들은 약속대로 이루어졌다면 이 약속이 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도 일어나야만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진들을 나열하면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믿음 때문에 죽은 최초의 순교자 아벨과 일상을 믿음으로 동행하며 3백 년을 살았던 에녹을 소개한 후에 증거하고 있다.
주님의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잠잠케 하신 결과에 대해서도 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책망을 들으면서도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워하며 혼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사실 바른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役事) 앞에서도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고 찬양보다는 놀람으로 끝나는 것이 성경 속의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자세였음을 볼 수 있다.
오히려 그들은 의아해 한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이것은 아무래도 예수 그리스도와 친숙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인데 제자들이 이런 모습이어서 주님께서 안타까우셨을 것이고, 오늘 주님을 어느 정도 알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역시 주님의 안타까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확신하는 믿음은 겨자씨 한 알 정도만 되도 산을 옮길 수 있지만 우리의 가진 믿음이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막연한 것이라면 산만한 믿음일지라도 겨자씨 한 알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신앙하는 사람들조차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식의 성경 밖에서 오는 확신이 주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보다 강하다면 안타까운 현상이고 이런 것들은 주님께 사랑 받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믿음의 삶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주님의 육신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신앙의 사람이라고 하는 우리가 사람에게서 나는 확신이나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주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약속하신 이루시리라는 말씀을 확신으로 응답해서 받은 것과 같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가지고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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