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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지만 이제 그 구원을 땅끝까지 가지고 가야 할 베드로를 비롯한 과거 이 갈릴리에서 택했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의 사실을 믿지 못하고 확인해보지도 않은 체 조금은 자신을 잃고 과거의 자신들의 삶에 그대로 돌아 가 있는 이들을 주님께서는 다시 찾아오신 것이다.
이 사건은 동일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과제가 된다. 과거 자신이 자라고 먹고 살던 갈릴리에 돌아간 베드로의 모습은 주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모습이고 그물과 부모를 던져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확신에서 과거로 돌아간 것이기 때문에 믿음에서 세속화되는 모습이다.
오늘은 “내양을 먹이라!” 거나 “내양을 치라!”는 내용은 다루지 않을 것이고 다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3번의 사랑의 확인을 생각하려 한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을 하려 들지만 우리 마음을 감찰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는 사랑을 확인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이다.
주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답변이 다름은 세 번의 질문과 답변 속에서 보는 대로는 관점이 다름을 본다. [헬, agapas me? - [헬, philo se!] 이것은 주님의 사랑과 우리 각자의 사랑이 다름을 보는 것이다.[헬, agapo se!가 아닌]
각자는 주님께서 주신 그대로의 사랑이거나 바라시는 대로가 아닌 자신 나름대로의 사랑의 방식을 마련해 놓고 오로지 자신의 방법대로만 사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때로는 우리가 전혀 영적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주님을 섬기고 따르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노라!’고 더러 고백하기도 하는데 주님은 그러한 것에 속으실 수도 없고 만족하지도 않으신다.
성경은 ‘믿음이 결실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읽는다. 마치 농사에 비유되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자연 재해와 어려움으로 이삭이 나올 때까지 잘 자라다가 결실하지 못할 수도 있고 충실한 이삭이 나왔어도 병이 들어 결실하지 못할 수도 있다.
특히 자연적인 태풍이나 폭우는 대개 과일이 맺어 열매가 자라가는 시기에(요즘 같은 시기) 주로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재해가 과목이 자랄 때건 열매가 익기 바로 전이건 마찬가지로 치명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곡식창고에 들어 갈 때까지는 언제나 완전한 것이 아니다.
자연적인 과목과 신앙의 사람과의 차이는 무생물인 과목은 위기를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떨어져 버리지만 신앙의 사람은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이유는 자연적인 사람으로는 역시 불가능하지만 거듭난 사람들 속에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인생의 폭우와 태풍과 같은 악조건에서도 결실하게 하시는 능력이 된다.
이런 이유에서도 주님의 사랑의 확인은 매 순간 중요하다. 적당한 햇빛과 물이 있는 평안한 시기이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내리치는 시기이건, 주님의 이러한 사랑의 확인에 의해서 우리의 마지막 시간까지 천국의 영생의 열매로 자라는데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Ⅰ. 모든 것들보다 사랑하느냐?(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헬, agapas me?]
[보다 더, 헬 pleion touton - 더 많은, 또한 대부분, 더욱 뛰어난, 매우 많은, 더 큰 부분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12:41b)] ⓐ사람 ⓑ물질 ⓒ명예
[헬, philo se!]
주님은 오늘 내가 세상에서 가졌다고 생각하는 최상의 것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가 물으신다.
Ⅱ. 진실로 사랑하느냐?(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베드로는 과거의 모든 사람이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고 큰 소리 쳤던 과거를 기억하는 것 같다. 큰소리 치고 나서 닭이 운 후에 심해 통곡했던 상황까지도 생각하는 것 같다.
베드로가 예수께서 구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용기는 바른 용기라기 보다는 혈육에서 비롯된 허영심이었다면 오순절 성령의 임재 이후에 비로소 진정한 하늘의 용기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모습을 사도행전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최근의 번역들이나 이해하기 쉽게 번역된 역본들은 “Do you truly love me?”[NIV] “Do you really love me?”[Living] 라고 번역하고 있다.
“사랑이 진실이냐”? 하는 것은 적어도 생명이 달린 문제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그의 말을 들으려 애쓰는 것처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적어도 주님을 깊이 만나는 예배의 시간에 좀더 적극적이고 주님께서 보실 때도 사랑스러운 모습이 되려고 애쓸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드로에게처럼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진실이냐?” 물으심에 합당한 고백을 드릴 수 있는…
Ⅲ. 인간의 수준에까지 내려오시는 주님.(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사실 희생적인 사랑으로 주님 자신을 사랑하느냐 물으셨던 주님은 거기에 우정이나 제자로서의 사랑으로 답변하는 베드로에게 세 번째로는 그 답변과 같은 질문으로 물으신다. [헬, phileis me? - 헬, philo se!] 이것은 사실 친구간의 사랑이고 주님께서는 일찍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라고 확인하신 바 있다.
이런 말씀을 이미 들었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은 목숨을 버릴 수 있느냐는 물음이심을 연결된 내용 속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19)
주님은 이미 베드로가 어떤 역할과 죽음을 겪을 것인가 까지도 내다 보시고 아직은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여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으로 과거에 돌아가 있는 베드로를 찾아 오셨다. 그리고 아직 준비되지 못하고 덤벙대는 베드로에게 인간적인 교만이나 어리석음을 제거하시기 위해 사랑을 확인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확인은 사실 우리 각자가 신앙에 뒤쳐져 있을 때도 오셔서 확인하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라고 했다. 때문에 우리가 조금은 멀어져 있을 때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각자에게 최종적으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질문을 주실 때 베드로처럼 답변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물으시는 주님의 이 음성을 듣고 주님의 바라시는 답변을 드릴 수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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