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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눅 24:1~6 2012-07-29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수없이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나 여인들은 한결같이 이 사실에 대해 잊어버린 것을 성경에서 읽는다. 그것이 어떤 이유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또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현상이 있을 수 있는데 당시의 제자들과 여자들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우리 죄인 된 인류를 위해 대속의 죽음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주님을 따른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여전히 죽은 자 가운데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려 하고 그런 모습은 당연히 신앙하는 우리 자신들을 죽은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각자가 주님의 죽으심에 하나가 되고 자신은 죽은 모습이 되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들의 삶 속에는 당연히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움직이고 역사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도 여전히 살아계신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반드시 죽어야 하고 그 죽은 사람들 속에 부활의 주님은 살아서 역사 하셔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반드시 죽고 이제는 우리 자신이 산 것이 아니라 마치 빈 무덤을 찾았다가 의아해 한 여인들과 제자들처럼 우리 안에 부활해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각자를 바라 보는 각 사람들이 놀랄 수 있는 부활의 주님을 자신 속에 확인하는 …



Ⅰ. 살아 있는 존재는 변화하고 움직인다.(1~3)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죽어있는 시체는 어떤 다른 대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움직이거나 스스로 옮겨가지 못한다. 세상의 우상들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에 대한 어리석음을 그래서 우리는 지적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고 일어난 후에는 엉클어진 머리를 감고 부스스한 얼굴을 씻고 정돈된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집을 나서는 일상은 반복되는 것 같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①살아있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여자들은 아직도 여전히 죽어서 무덤에 누워계신 예수를 상상하며 미리 준비한 향품이라도 그 몸에 발라 드리려고 이른 새벽에 주님의 무덤을 찾았다. 그러나 장정들이나 움직일 수 있었던 바위굴을 막고 있던 돌은 굴려나고 예수님의 시신은 볼 수 없었다. 이것은 그 여인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고 상상할 수 없었던 주님의 상황이었다. 그들은 다만 죽어있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신앙도 어쩌면 죽어있는 굳어진 시신을 보러 가는 … 그리고 그 시신에 유향이나 발라 드리려는 충성심으로 주님을 찾고 예배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결국 이런 모습의 신앙이라면 다른 종교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열심만을 가지고는 변화도 움직임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어있는 우상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역사하는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②살아있는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살아계신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늘 생명을 기대하고 자유를 만끽하며 바람직하게 하늘의 사람으로 변화하고 움직이며 그렇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놀람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없으면 전도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세상과 죄가 기대하는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영생에 속한 영광의 약속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하고 움직이는 것이라야 한다. 움직임과 변화가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늘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주님의 영원한 생명의 약속에 관한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Ⅱ. 살아 있는 자는 죽은 자 가운데 있을 수 없다.(4~5)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여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분명히 봤고 무덤에 장사 지내는 것 까지도 목격했었고 이 여인들이 찾아간 무덤은 바로 그 무덤이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입장에서 이 여인들의 행동은 무리가 없고 오히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까지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평상이 자주 말씀하셨던 부활에 관한 증거는 그들에게 인식되어있지 않은 것 같다. 주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도 역시 그 때까지는 그들 자신의 기준 속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표현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의 가르침의 엄청난 약속을 아직 성령의 완전한 인도를 받지 못했던 저들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수준 속에서만 이해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서 증거하시기를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8)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영원히 생명으로 죽음을 다스리실 것을 증거하셨다.

이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는 생명의 진리를 잘 이해하는 것 자체가 오늘 신앙하는 우리들에게 엄청난 차이를 만들게 된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주님의 생명의 약속을 여전히 죽은 세상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영생의 이해도 천국의 이해도 서로의 관계의 이해도 여전히 죽은 사람들 속에서 찾으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우리는 눈을 우러러 위에서 주신 약속을 하늘의 기준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①항상 바른 진리는 하늘로부터 깨달아 진다.(4) 무덤 속에서 주님을 찾는 여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가르쳐 준 것은 베드로도 로마의 병사도 아니라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사자들이었다. 생명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 자체를 하늘의 가치로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하늘로 주어진 구원의 역사를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의 가치로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영생이라는 이해 자체가 그렇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라는 말씀 자체가 세상의 가치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②사람들은 죽음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자신이건 다른 사람이건 그렇다. 그러나 죽음은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 완전한 하나님의 약속을 누릴 수 있음을 안다면 죽음은 더 이상 안타까워할 저주와 슬픔이 아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116:15)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③우리는 여전히 산사람을 죽은 사람 가운데서 찾으려 할 수 있다. 오늘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일들의 가치는 분명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의 잣대로 신앙의 사람들의 상황과 일을 판단하려 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이미 부활해 계신 주님을 울며 무덤에서 찾고 있는 여자들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천국의 일조차 교회일 조차도 세상의 기준 속에서 판단하려 들고 이해하려 한다.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의 불행으로 보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가치로 이해하셨음을 배워야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신앙의 성숙이나 온전해 진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세상의 가치가 하늘의 가치로 바뀌어져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의 생각이 어른들의 가치에서는 유치한 것처럼 하늘의 가치에서 보는 우리의 세상적 신앙의 가치는 어른들에게 어린아이 같은 것이다.(고전13:11)

이런 이유에서 자라지 못한 신앙의 사람을 향해서 바울은 증거하기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고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자주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기자를 통하여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5:12) 라는 탄식도 이러한 안타까움에서 나온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는 안타까운 탄식을 듣지 않는…



Ⅲ. 약속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①무덤이 아니라 영광에 계시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이것은 시체를 잃어버렸다고 혼란해 하는 여자들을 향한 천사들의 증언이다. “여기”는 죄에 지배되는 무덤 속이며 세상이다. 이미 주님은 온 인류의 죄값의 저주인 죽음을 맛보시고 이제는 죄와 죽음을 책망하시기 위해 영광의 몸을 입으시고 아직 세상 속에 남아 있는 제자들을 격려하시고 성령을 보내시겠다 약속하시고 하나님우편으로 승천하신다. 이 원리는 주님께 속한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아직 세상에 몸을 두고 살고 있지만 이미 마음과 삶의 가치는 주님과 함께 하늘에 있는 약속을 누리고 있다.

②이것은 이미 예언 되어진 것이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러한 약속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수없이 예언되어진 사실일 뿐만 아니라 갈릴리에서 말씀하셨었지만 기억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말씀으로 돌아가 확인해 볼 것을 당부하는 천사의 말이고 오늘 우리에게도 어떤 일을 당하든지 주님의 말씀하신 것을 기억함으로써 해결이 가능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일도 신앙으로 이해되어 지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미 성경에 수없이 증거되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시는 증거를 그대로 적용하면 된다. 또 이 의미는 “어떤 것이든지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반드시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기억하라!”시는 주님의 당부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도 우리는 짐짓 신앙으로 해석해야 할 일을 세속적인 원리로 이해하는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는 천사의 경계를 들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