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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막 15:9~15 2012-06-24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12)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주님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유대인들의 관원들에게 잡혀와 빌라도 앞에 오셨고 빌라도는 평상시에는 별로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 예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어려운 결정 앞에 서게 된다.[아내의 꿈 이야기]

빌라도도 예수 그리스도를 좋은 분, 죄가 없으신 분, 하늘로부터 오신 분,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이신 것을 알았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도 역시 당시의 빌라도 처럼 여러 가지 상황적인 것이나 입장, 그리고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을 생각하다 보면 주님을 하나님의 뜻대로 가 아닌 상황과 입장에서 나의 뜻대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을 대해 버릴 수 있는 위험성은 분명히 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섬기고 따른다고 고백하여 주님께서 일러주신 방법대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자부하고 오늘도 그 주님을 예배한다고 이 자리에 있다. 그런 우리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 빌라도와 같은 입장에 설 수도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냥 사랑하고 믿고 따른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나에게 난감한 결정을 해야 할 입장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오늘 본문의 빌라도는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라거나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고 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아닌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하고 이 빌라도처럼 주님을 죽음에 내어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모든 상황은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3)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4) 그것은 비단 1세기의 상황뿐이 아닌 마지막 시대가 다 되어가는 이 대한민국에서도 그리고 세계도처에서 부르짖는 어두움의 사주를 받는 군중들의 요구이다.

때문에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는 질문은 사실 늘 우리 자신 속에 물어야 할 질문임을 생각하고 빌라도와 같은 잘못된 결정을 하지 않고 하나님과 나와 인류와 더불어 다 기뻐할 결정을 할 수 있는 우리 각자가 되어야 한다.

순간은 시간으로 쌓이고 세상의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영생이다. 상황과 시간 속에 있는 나에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려라!”는 부추김이 들리고, 세상에서 평안하고 무사하기 위해서 타협하여 그리스도를 세상의 것과 바꾸어 죽음에 내어 준다면 히브리서의 지적처럼 “…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6b)는 21세기의 빌라도가 될 수도 있다.

오늘 우리는 “나라면 저렇게는 안 해!” 라고 빌라도를 조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예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난감한 상황을 수시로 만나게 되고 참으로 후회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사랑으로 대우할 수 있을 것인가를 수시로 그리고 이 말씀과 함께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Ⅰ. 그리스도냐 ~ 군중이냐?

군중은 언제나 어떤 세력들에 충동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 때의 군중들도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11) 여러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다수의 군중들은 어리석어서 어떤 힘에 의해서 충동 되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수가 진리’ 라고 할 수 없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부분 당시 기득권층의 사람들과 다른 교훈을 가르치셨다. 당시 백성들에게 존경 받으면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이나, 성전을 관리하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오히려 책망을 하시면서 그들과 다른 하나님의 교훈들을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

이러한 자신 속의 질문의 또 다른 면은 주님이냐 세상의 힘(권력, 돈, 명예 등등)이냐?로 이해 할 수 있다.[빌라도의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냐 가이사냐?] 세상의 좋은 모두를 얻으려 할 것인가 하나님과 우리의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를 살릴 것인가…?



Ⅱ. 진리냐 ~ 전통이냐?

사람들은 오래된 전통이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꾸지 않고 지키려고 하는 것이 보수 세력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오래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교훈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성경의 진리는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에 의해 검증되고 확인되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유전과 전통[마15:3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6]을 주님의 가르침보다 귀하게 여겼고 이런 일들이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과 많은 충돌을 가져왔고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 지켜온 전통은 다른 것을 유입하고 섞어서 시간이 가면서 진리와는 점점 멀어지는 전통을 만들어 온 것도 사실이다.

교회가 이 역사를 거쳐 오면서 중세까지도 사람들의 전통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에 충실 하려는 사람들을 신앙의 이름으로 수없이 죽였고, 오늘 본문의 빌라도는 유대인의 전통을 이용하여 자신의 양심에 거리끼는 것에서 자유해 보려고 시도한 것도 사실이다.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6)

세상에는 거짓되고 잘못된 전동이 많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말씀하셨다. 이런 선언은 전통을 허물어야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이다.



Ⅲ. 생명이냐 ~ 세상의 유익이냐?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생명은 물론 영생을 말하는 것이다. 영생은 우리가 쉽게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생명의 길이 보다는 생명의 가치와 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생보다는 현실의 생명에 더 가치를 두고, 보이지 않는 영생의 가치보다는 현실 속에서 유용한 복을 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신앙인들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다 보니 사탕발림의 말을 더 좋아하고[SUGAR-COATED PREACHING] 이러한 말세적인 현상을 바울은 디모데에게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3~4)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이유가 영생을 얻는 것이 목적이고 주님께서도 이것을 약속하고 우리를 부르셨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고 말씀하셨다.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시49:7~8)

물론 빌라도가 영원 속에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더 귀중하게 여겼다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지 않았을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여러분들이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장래를 영원 속에 두고 생각하고 판단 하십시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Ⅳ. 주님께 맡기느냐 ~ 내 뜻대로 하느냐?

빌라도는 권력은 가졌지만 진리를 몰랐고[요18:38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줄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받들지 못하고 죽는데 내어 주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저주받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다. 여러분들도 그렇습니까?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오늘도 그리스도와 나 둘 중에 하나는 십자가에 못박아야만 한다. 하나님께 맡기느냐 자신의 원하는 대로 하느냐는 우리의 영원을 결정할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드리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오늘 나는 어떤가?

2천여 전의 빌라도의 군중을 향한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는 외침은 오늘 우리 각자의 질문이고 여기에 따라 다수가 원하는 것이나 전통이나 세상의 유익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 주어서는 안됩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 나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져주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나를 죽이고 주님을 나의 삶 속에 주인으로 고백하고 세우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 아니라 바울의 고백처럼 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다스리심을 즐거워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