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행 12:13~25 2008-10-19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사람의 머리로는 미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는 헤롯에 의해 참수형을 당하고 또 다시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려는 간교한 헤롯의 정치적 타산으로 인하여 당시 가장 활발한 전도 활동을 하고 있던 베드로까지 잡아 가두고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끝나는 바로 다음날 백성들 앞에 끌어내어 죽이려 하는 것을 봤다.

때문에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12:5)는 모습과 함께 그 기도를 응답하시고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그 일이 있으려는 바로 전날 밤에 군사들이 겹겹으로 지키는 감옥에서 천사를 통하여 기적적으로 베드로를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지난 주에 봤다.

오늘의 말씀은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결과와 나머지 헤롯의 정치적인 모습과 그의 죽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2장 말미에는 여전히 교회는 말씀이 더 널리 전파되고 교회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해지는 모습을 접하게 된다.

그럼에도 오늘 읽은 이 말씀 속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불완전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안타깝고 이런 일들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의의통치가 이루어지기까지 이 역사 속에서 있을 수 있다는 판단도 하게 된다.

초기의 교회는 성령이 충만했고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교육받은 사도들과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은 물론이고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을 것임에도(고전15: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불구하고 이런 조금은 의아한 모습들은 오늘 21세기 속에 있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주님을 강하게 의지해야 할 이유를 보여주고 있는 것을 배운다.

성령의 강한 능력의 역사가 아직 현장감 있게 나타나던 시기였음에도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보면서 믿지 못하는 연약함을 나타내고 있다는 데서 그런 판단을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지상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주님의 교회가 경성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기도에 분명히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의 생각이나 판단에 의해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조차도 불신해버리고 오히려 그러한 역사를 인정하는 순수한 신앙의 사람을 미쳤다고 매도해 버리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 말씀은 또다시 오늘 우리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나님의 하신 기적의 역사들을 생각 없이 격하시키고 인간적으로 판단해 버리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일깨우시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이 말씀의 교훈은 어느 군주를 섬기는 것이 진정한 행복인가를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군주들은 자신들의 권력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이용할 대로 이용한 후에는 목숨을 마치 파리 죽이듯이 죽이지만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주님은 우리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살리기 위하여 친히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을 볼 때 영원히 우리를 맡기고 헌신해도 결코 손해남이 없는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광의 왕이심을 확신하게 된다.



Ⅰ. 자신들의 기도 응답에 대한 불신을 본다.(13~17)

성경 속의 모든 것을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부분으로 안타까운 내용이다. 천사의 이끌림으로 헤롯의 추악한 권한 아래서 완전히 벗어난 베드로는 늘 모이는 곳이었던 요한의 집에 와서야 자신이 헤롯의 마수에서 풀려난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의 절대적 사랑의 응답이었음을 깨닫지만, 오히려 기도하고 있던 예루살렘 교회의 교우들(아마도 여기에는 야고보와 베드로를 제외한 사도들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은 이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안타까움으로 만나게 된다.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완전한 사람이나 온전한 교회는 없음을 깨닫는다. 늘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에 의해 움직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세상적 영향과 환경에 좌우되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역사를 인정치 못하는 어줍잖은 우리의 믿음을 보는 것 같아서 더욱 안타깝다.

오늘 본문에 연결 되어지는 앞에서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11~12)는 사실을 보면서 베드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감격을 가지고 요한의 집 문을 두들겼을 것이다.

이 문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확인하러 나온 사람은 ‘장미’ 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였고 너무 뜻밖의 상황에 미쳐 문 열어주는 것조차 잊은 체 안에 들어가서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14)고 말해보지만 정작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의 반응은 의외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자신들의 기도의 결과를 믿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12:5) 했음에도 사실을 전하는 로데에게 ‘미쳤다’고 하고 ‘그의 천사’일 것이라 하고, 베드로를 보고 놀랜다.

이 로데라는 여자 아이는 분명히 베드로임을 확신하고 전하는 모습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15) 결국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실 때 수없이 말씀하셨던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는 말씀이 이 과정에서도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사실을 본대로 느낀 대로 받아들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사실을 증거하는데, 안에서 당시의 상황적인 것들을 먼저 생각하고[설마 철통같이 지키는 헤롯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판단하는 어른들은 하나님께서 놓아주신 베드로가 찾아왔음에도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15b)는 어설픈 판단을 하고 마는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각 사람마다 지정된 천사가 그 사람을 인도하고 지킨다고 생각 했었다.(창48:16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단3:28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6:22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히1:14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이 상황이 웃을 수밖에 없는 비극인 것은 평상시 자신들에게 수없이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을 확신시키시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지금까지 기도했고 그 응답으로 밖에 문을 두드리는 베드로를 인정치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없는 베드로는 아무래도 주위를 힐끔힐끔 돌아보면서 빨리 문을 열도록 계속 두들겼던 것도 역시 주님의 가르침에 입각한 것이다.[마7:8; 눅11:10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꼭 같은 상황에 믿음과 불신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문을 열고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확인하며 놀란다. “…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16b) 이것은 어쩌면 로데라는 여자 아이의 권면에 못이겨 그들의 믿음의 문을 연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한창을 대문을 사이에 둔 우스꽝스러운 공방은 하나님의 구원의 증거로 마무리 된다.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17)

아무래도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이 여기는 주님의 육신의 형제인 야고보[갈1:19-주의 형제 야고보 …, 2:9-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행15:13, 21:18]는 안전상의 문제로 다른 곳에 있었고 이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여 격려하라는 당부였던 것으로 들린다.

아무래도 날이 새면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이 확인되고 온 헤롯의 진영에는 난리가 나고 분명히 이곳도 안전하지 못할 것임을 안 베드로는 모처로 옮긴다.(다음의 진행되어지는 말씀에서 이것이 확인된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구원할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사람 스스로가 힘써야 할 일도 분명히 있다.



Ⅱ.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세상 군주의 사악함을 본다.(18~23)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선한 군주의 이야기 보다는 사악한 왕들이나 방백들을 더 많이 보게 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는 것들을 보는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받들어 다스리는 것보다는 오늘의 내용처럼 야비하고 잔인한 모습을 접하게 됨은 결국 권력을 주신 하나님 보다는 어두움의 의지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의지하는 모든 자들의 희생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우리 주님과는 너무나 대조적이고 세상의 권력가들의 잔인무도(殘忍無道)함을 실감하게 된다.(역사 속에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서 공통적임을 본다.)

베드로의 놓여남이 하나님의 천사를 통한 일이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사람들은 큰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하고 또 그러한 어두움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졸개들은 자신의 생명도 보존되지 못함을 보는 것이다.

헤롯과 같은 사악한 군주들의 대표적인 모습은 본문에서는 그대로 옮기고 있다. ①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19)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파수꾼들이 심문한다고 알리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로마의 법 상으로는 중요한 죄수를 노치면 그 죄수대신에 간수가 죽게 되는 것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이 사도행전 16장의 구금되어 있는 바울과 실라의 옥문이 지진으로 열리자 자결하려고 하는 빌립보 간수의 모습에서 이해할 수 있다.(16:27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결국 어두움의 세상주관 자들은 자신의 종들을 원하는 대로 부려먹고 나면 그들을 죽이는 것에 가책을 받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않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도 안심이 안되어서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19b)는 졸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방 임금의 고백으로 듣는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심을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단3:28)

하나님을 경외하는 군주였던 다윗은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9:10) 하였고 바울은 구약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롬11:2) 라고 찬양하고 있다.

선하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를 의뢰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떤 위기와 절망에서도 버리지 않으시고 책임지실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 주님은 소망 없는 죄의 종들인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버리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것은 해롯과 같은 야비한 세상의 권력가들과 얼마나 다른가!

②이런 정치 상황 속에 권모술수는 난무하였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20) 헤롯이 베니게 땅이고 항구도시인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왜 노여워했는지는 기록되고 있지 않지만, 이들이 헤롯의 영토에서 양식을 사가기 때문에 서로에게 이권이 있었고 이 무역항구인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로마 사람을 자신의 부하로 뒀다는 묘한 자긍심에 젖어 있는 헤롯에게 로마이름을 가진 침실을 맡은 시종인 블라스도를 통하여 헤롯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려고 권모술수를 쓴다.

세상의 정치 세계가 대부분 그렇다. 늘 정직과 공의보다는 뇌물과 아부를 가지고 자신들의 야욕을 이루려는 정치세력은 역사에 관계없이 다르지 않음을 여기서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왕이시고 만 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는 이런 어두움의 방법이 먹히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야비한 수단이나 방법을 싫어하시는 것은 至高至善의 왕이신 주님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히려 진실하고 의로운 자들을 사랑하시고 자신의 도구로 쓰신다.

③하나님으로부터 치심을 받아 죽었다. 헤롯은 적당한 날을 정해서 광채 나는 왕복을 입고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고 아부의 근성에 강한 사람들은 찬란한 햇빛을 받는 꾸며진 위용과 함께 아부의 극치를 나타냈다.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22)

그러나 영광을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아부에 이끌려 만족해 했고 자신에게 권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므로 결국 헤롯은 허락된 삶마저도 다 살지 못하고 벌레에 먹혀 죽고 만다.

이렇게 대개의 거짓되고 교만한 사람들은 언제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음이 없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수완과 정치력으로 권력의 자리가 지켜진다고 착각하는 데서 허락된 삶마저도 다 살지 못하고 비운에 가는 역사들은 동서고금에 다르지 않은 것들을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함을 듣는다. 이 말은 결국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 한은 이런 유쾌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의로우신 주님을 더욱 의지해야 한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Ⅲ.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였다.(24~25)

헤롯은 유대인들과 결탁하여 자신의 자리를 이어가기 위해 교회를 말살해 보려고 간교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인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로 자신이 죽임을 당하면서 비극적인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 하지만 하나님의 선한 통치를 받는 교회는 그럴수록 강해지고 확산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24)는 말씀은 위기를 한번씩 넘길 때마다 기록되고 있는 하나님의 반전 역사의 기록이다.

이미 6:7에 헬라 파와 히브리 파의 반목을 일꾼들을 뽑아 해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는 기록을 보았고 19:20에 역시 오늘의 표현과 같은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어려움을 넘지 않고는 발전도 없다. 다만 위기를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성령과 더불어 해결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고난 받은 만큼 성숙해지고 자라기 때문에 도전이 없는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생명확산운동을 위한 십자가의 구원 진리인 복음의 말씀과 사는 사람들의 위기에는 성장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허락한다는 사실이다. 어두움과 거짓의 반대에 부딪히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절대로 성장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 절의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25)는 말씀은 11:30에 붙여지는 말씀이다. 이 12장은 헤롯의 박해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연결을 위해서는 그렇게 이해 될 것이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하는 예루살렘 교회조차도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가 헤롯에게 잡혀가 군사 틈에 갇혀있을 때 그의 안전한 석방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저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천사를 동원하여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있는 겹겹의 보초와 문들을 열어젖히고 교회로 돌려 보내 주시지만 이 분명한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사실을 말하는 여자아이를 미쳤다고 할 정도로 기도와 응답을 머리로 헤아리는 잘못을 범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도 열심히 기도하여 받은 응답을 스스로 부정해 버릴 수 있음을 경계하고 하나님의 이루신 역사를 애써 부정해 버리는 불신은 없어야 할 것이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켜보려고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두움의 하수인들은 결국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조차도 자신의 것으로 도둑질 하고, 사람들의 아부에 만족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는 일들은 비단 헤롯에게서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자주자주 봐오는 사실들이다.

행여 오늘 믿음의 사람들이 권력의 자리에 있거나 권력의 측근으로 있다면(그것이 크건 적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음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거짓이나 아부 없이 그 권력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겸손하고, 자신들이 섬겨야 할 백성들에게 공의와 긍휼을 베풀 때 오히려 영광은 길고 비운에 죽는 일이 예방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진정한 교회는 세상의 형편과 처지에 관계없이 성결을 지키고 주님께 순종을 드림으로 말씀이 힘있게 증거되고 그러한 교회 속에 인위적인 추가가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로 풍성케 하실 것이다. 이러한 약속은 오늘 우리의 교회와 또 앞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