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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8:14~25 2008-07-27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예루살렘 핍박의 철퇴로 인하여 믿는 사람들이 흩어져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가며 복음을 전하게 되고 스데반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의 일을 위하여 선택되었던 빌립을 통하여 비로소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된다. 거기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마리아의 사람들과 마술쟁이 시몬이 거짓을 버리고 이 복음의 진리에 복종하는 것을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눈바 있다.

오늘 우리는 평소 유대인들이 적대시하고 편견의 대상으로 여기던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 된 것에 대한 사도의 우두머리 격인 베드로와 요한의 방문과 그들을 통해서 사마리아도 구원의 대상이 분명함을 확인하는 역사가 오늘 본문의 중심이 될 것이다.

우리가 짐짓 실수할 수 있고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여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태껏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 세계에도 복음을 가지고 가야 할 사도들이 어찌 보면 자신들의 편견 때문에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고 성령께서 임하신 목적에 대한 주님의 당부의 말씀을 실천치 못하고 있었음을 10장에 나타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과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루신 고넬료 가정의 구원을 통한 이방인 구원의 사실을 통하여 확신시키신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주권적인 역사에도 긍정하지 못하는 사도들의 자세를 11장에서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의 구원 사건을 목격한 후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고넬료의 집에 들어 가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 자체로 핀잔을 주고 있는 사도들을 보면 이 때까지도 유대주의적은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베드로 사도의 고백을 통해서도 보게 된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11:17)

이런 입장에서 사마리아 전도와 복음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확인 같은 모습을 베드로와 요한의 방문의 목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결국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14f) 사도들을 포함한 예루살렘 교회는 빌립을 통한 사마리아의 복음을 받아 들임이 쉽사리 믿기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오는 길에 주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 하신 것조차도 사도들은 이상히 여겼던 것을 본다.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니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요4:27)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이 사마리아도 복음을 통해서 구원 받아야 할 대상에 포함되어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

이런 입장에서 이 사마리아의 복음을 받아 들인 것은 당시 사도들과 예루살렘에 분명히 작은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오늘도 어떤 경우 복음을 철저히 거역하던 사람이 복음을 수용하고 받아들였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럴 때도 우리는 “ooo도 복음을 받아들였다.” 라고 말하게 되는 같은 내용을 본문에서 보게 된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유대의 사도들과 하나님의 일꾼들이 빌립을 통해서 사마리아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실을 확인하고 특히 그 중에 유별난 인물인 시몬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우리 각자의 신앙의 모습을 점검했으면 한다.



Ⅰ.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의 성취.(14~17; 25)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유대인들의 금령의 장소, 사람으로 바라 보지도 않았던 그곳에도 인류를 공평하게 부르시는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생명을 나눠주기를 원하셨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14)

결국 빌립은 사도들이 못한 일을 한 샘이다. 아브라함의 유일한 후손으로 자처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인 성령이 임하셨음에도 저들의 선민의식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강화된 기분마저 든다. 복음도 오로지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오순절 날 예루살렘을 찾아온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외에는 하나님의 구원은 미칠 수 없는 곳으로 단정하고 있는 사마리아에 복음이 들어가고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흩어진 사람들로부터 역으로 예루살렘에 흘러 들어 가고 사도들은 복음을 훼손하는 것에 대한 경계심에서도 사마리아에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역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한다.

두 사도가 내려가 첫 번째로 한 일은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15~16)는 모습인데 이 말씀이 세례와 성령의 약속에 대한 오해를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첫 번째 사도들의 모습을 보면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이스라엘의 순수혈통을 잃어버렸다고 자신들과 다른 취급을 하던 사마리아를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으로 받아들였음을 인정하는 모습이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15~16) 이 말씀이 언 듯 우리에게 주는 감은 성령은 기도를 받음으로 받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 것이 앞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말한 이유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미 오순절 날에 천하 각지로부터 모여든 유대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2:37b) 라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2:38) 라고 분명한 선언을 한 바 있다.

이 약속은 교회의 탄생 후 이 역사가 끝날 때까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신 분명한 약속이고 그 모형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 생애의 시작 때 받으신 세례가 모형이 된다.

죄의 사람이 그 죄와 죽음을 향해 가던 길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하고 십자가의 죽음에 하나가 되는 죄의 몸이 장사되고 물에서 올라옴으로 죄를 씻음 받은 깨끗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인침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영원토록 그 거듭난 자와 함께 임마누엘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 어디에서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구약의 하나님 약속이 완성되는 복음의 역사 속에서 때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교훈하고 일깨우시기 위해 주님은 특별한 경우들을 더러 주시는 것을 본다. 그러한 예가 바로 이 사마리아나 고넬료의 가정과 같은 예들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기별을 들었을 때 다른 사람이 아닌 언제나 주님과 가까이 있었고 함께 행동했던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서 그 사실을 확증하기를 원했고 아직 마음 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었던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성령 받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특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라는 표현은 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과 또 언젠가는 성령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아직’이라는 표현이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고넬료의 가정에서는 말씀을 전할 때 먼저 성령께서 그 가정에 내려 오시는 것을 보고야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셨던 동일한 성령을 받음을 보면서 그들을 인정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령 받음을 사도들에게 보게 함으로서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확인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일반화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연이어지는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17)는 하나님의 역사는 사마리아를 구원의 범주 속에 받아들일 수 밖에 없도록 사도들을 확신 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였다.

물론 사도들은 이 일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 가면서도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이제는 사마리아의 모든 곳 즉, 저들이 발이 닫는 곳마다 전도할 수 있었다.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25) 그러나 이 일이 있기 전 사도들이 사마리아로 오는 동안에는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서도 이를 더욱 분명히 확신할 수 있다.

어떤 경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 주님은 또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 약속을 이루시긴 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우리는 주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한 이름뿐인 신앙인.(18~19; 24)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두 번째 단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마술을 행하여 자칭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칭했던 시몬의 사도들에 대한 반응이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18~19)

그야말로 전형적으로 세상 원리에 익숙해 있는 티를 벗지 못해서 아직도 그 과거의 원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취급하는 배은망덕(背恩忘德)을 범하고 만다. 마치 과거에 자신이 돈을 들여 마술을 배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것과 같이, 따라 다니며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시몬은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세상적 관습에 그대로임을 보이고 있다.

아니 어쩌면 사도들의 안수 받음으로 자신도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사도들과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눠줄 수 있는 권세를 누리며 활동하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도들을 통한 불호령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24)는 탄식을 하게 되지만 과거의 속임수에 익숙해 있었던 이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조차 같은 인간적 가치나 원리에서 돈만 들이면 다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 앞에서는 참으로 경망스럽기 그지없는 말을 내뱉고 만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들은 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이고 세상의 가치와는 바꿀 수 없는 것들임에도 시몬은 아직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고 이 시몬을 통해서 가질 수밖에 없는 경계는 복음 속에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과거의 문화에 옷만 바꿔 입는 식으리 또 다른 종교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잘 못 이해하게 된다는 경계를 특히 우리 대한민국 속의 그리스도인들은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이 말씀의 교훈은 사도들이 안수하고 기도함으로 사람들이 능력을 힘입을 수 있었지만 사도들로부터 권능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도들과 같은 권능을 주거나 끼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격적 원리를 무시하고 은사를 선전하고 자랑하는 모든 것들은 분명히 건전치 못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들은 결코 인간의 금전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이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 희생의 대가임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값없이 주신 선물 즉, 은혜일 뿐이다.

사람들을 영원으로 인도하는 진정한 가치를 가진 모든 것들은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는 바울의 고백처럼 인간적인 가치로 살 수도 판단할 수도 없는 것들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세상에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다 값이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구원은 인간의 힘이나 재산이나 권력이나 생명으로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거저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11:6) 하였다. 오늘 내가 남이 갖고 있지 못한 하늘에 귀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나의 노력이나 수고를 지불하고 가지게 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은혜가 비로소 은혜 될 수 있는 것이다.



Ⅲ. 이름뿐인 신앙인의 받을 대가(代價).(20~23)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의 시몬에게 그가 세례를 받고 빌립이나 사도들을 따라 다니며 영적인 것을 사모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잘못된 가치나 기준 때문에 무서운 책망을 주고 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20)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것들은 인간의 의지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어떤 것은 아무리 달라고 기도해도 받을 수 없는 경우들이 더 많다. 그래서 우리는 구하되 우리의 생각이나 생각으로 ‘무엇’을 달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일과 영광을 위하여 나에게 가장 적절한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달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악이고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축복대신에 무서운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20b) 그러므로 정욕대로 무엇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망할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

바울은 거듭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을 향하여 당부하기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1~3)

조금 더 진행해 가면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5~6)고 경계하고 다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10) 거기에는 인종과 계급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11헬라인과 유대인, 할례당과 무할례당, 야인이나 스구디아인,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베드로 사도는 분명히 시몬이 받은 세례가 문제가 있다거나 그런 지적을 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 깃 될 것도 없느니라”(21)고 모질게 이야기 해 버린다.

더 심한 표현은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23)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변할 것이 없다. 이 말은 첫 부분(너는 악독이 가득하며)은 “…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b)는 말씀의 반대 표현이고 뒷부분(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은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골3:8~9) 라는 말씀들과 상관된 당부의 말씀들이다.

그러나 해결책이 되는 말씀도 주고 있는데 그것은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22) 하나님께서는 절망 중에도 절대로 절망으로 끝맺지 않으신다. 사실 그래서 우리가 아직도 믿음에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

결국 교회 속에 있다고 하면서도 과거의 저주와 죽음의 행위를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형벌 받을 수밖에 없는 절망의 모습이므로 회개해야 할 부분이다. 어떤 경우 우리는 자신의 모자람을 지적 받을 때 이 시몬처럼 회개하지 못하고 분노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오히려 이 사마리아의 시몬에게 배워야 할 부분이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24)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면 이미 영원한 약속에 있다고 성경은 약속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옷만 갈아 입은 체로 과거의 삶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그는 죄의 당할 형벌에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6:17~18)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약속은 사람의 감정이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비록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주춤할지라도 하나님은 한번 언약하신 것을 절대로 잊지 않으시기 때문에 사람들을 매질해서라도 그 약속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부정한 사체처럼 혐오스러워 했던 사마리아를 거쳐 오늘 우리 대한민국에까지 복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회개가 없이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신앙 조차도 지극히 인간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해서 세상적인 가치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조차도 돈으로 사고 팔려고 덤비지만(Simony) 그런 사람들은 그 세상에서 자신이 무엇이든지 사고 팔 수 있다고 착각하는 돈과 권력과 교만으로 망하고 말 것이다.

이런 내면의 변화가 없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에 진리에 대해서는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고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 한 불신자들이 받을 형벌을 함께 받을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