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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7:37~50 2008-07-06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으로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요셉을 거쳐서 80년의 세월 동안 모세를 준비하시고 훈련하신 역사를 생각했었다.

이스라엘 가운데 남자가 태어나면 살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모세를 나게 하시고 인간적인 부모의 한계는 석 달이었지만 결국 버릴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아이를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바로의 궁전에서 자라게 하시고, 세상 최상의 학술을 공부하게 하여 40년을 준비시키시고 그 애굽의 학술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영적인 훈련을 시키신 후에 비로소 거룩한 산 호렙에서 모세를 부르셔서 사명을 주시는 데까지 모세의 준비의 생애를 생각했었다.

어쩌면 하나님은 신약교회 속의 바울 사도처럼 사람들에게 흠 잡힐 데가 없도록 철저하게 세상과 종교적으로 준비하셔서 사용하신 것처럼(빌3:5~6), 말 많고 믿음 없는 이스라엘의 불평을 없애기 위하여 모세를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시지 않으셨는가 이해되기도 한다.

이렇게 준비된 모세에게 조차도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고 거절했던 것을 보면 만약에 모세게 어떤 인간적인 결함이나 부족함이 있었다면 그걸 문제 삼아 거절할 이유가 될 수도 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적으로도 완벽하게 준비하셨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부분에서는 10계의 돌 판을 받을 때에 40일을 머무르게 한 사건을 통해서도 그렇다. 왜 하루만이 아닌 40일간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한 상태로 하나님과 머무르게 했을까! 나중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난리를 칠 때에 모세가 그것을 책망할 수 있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후에도 두려워하도록 얼굴에 광채를 주신 것도 역시 완벽한 하나님의 지혜에 의한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언제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불신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것이든지 그것이 세상적이든지 영적이든지 빌미가 될 수 있다. 또 이것은 오늘의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그렇다. 불신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일들은 그저 불합리하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준비하여 이스라엘에게 내보내셨음에도 그들은 역시 순종치 않았고 홍해를 건너기 전부터 모세에 대해 도전하는 모습이 역력히 나타난다. “…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1~12)

그러므로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된 모세를 거절하는 것은 결국 그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하나님께 대한 거역이었고 40년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는 이스라엘로부터 제사다운 제사를 한번도 받으신 적이 없으시다고 한탄하고 계신다.

아울러 이것은 같은 광야와 같은 세상을 거쳐서 믿음으로 새 예루살렘을 향해가고 있는 오늘 우리에 대한 경계다. 참으로 나(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배하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빙자한 자신의 정욕의 실현을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이라는 방편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이 말씀을 들으며 확인되고 점검되는 …



Ⅰ.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한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한 것(37~39)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행하여”

우리는 권력자가 보낸 사람을 거절하는 것은 바로 보낸 당사자를 거역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장정만 6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통해서 지시하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를 통해서 전달되는 모든 것은 모세가 거짓되지 않은 이상 그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넘겨주면서 최종적으로 오실 메이야를 예언한 사람도 바로 이 모세이다.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고 증언함으로써 지금 ‘베드로를 비롯한 스데반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최초로 증거한 사람이 바로 당신들이 존경하는 그 모세’ 라는 말씀도 되겠지만 메시야를 증거하는 모세를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공식이 되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는 계속해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거나 “…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는 식으로 모세를 강조하면서 그런 모세를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행하”(39)였다고 배은망덕을 지적한다.

모세를 거절하는 즉, 하나님을 거절하게 된 원인이 “…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행하여” 라는 것이다.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가 하나님을 거절하게 되는 원인도 역시 그 마음이 애굽(세상)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을 거절하고 애굽으로 마음이 행한 자들은 다 광야에서 그들의 생애가 끝났던 것처럼 그 동일하신 하나님을 세상으로 인하여 거절한다면 그보다 더 확실한 판결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의 시대에도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과 진리를 가감 없이 전하고 증거하는 충실한 하나님의 종의 역할들이 중요하겠지만, 세상으로 내려갈 것인가! 하나님을 순종할 것인가! 에 대한 최종의 선택은 우리 각자가 하는 것이고 여기에 대한 바른 선택은 영원 속에서 즉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거나 후회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광야 교회보다 더 심중한 신앙적 판단이 중요한 것이다.

부자처럼 이 세상을 떠나서 판단하고 후회한다면 그것은 소망이 없다. 그래서 지금 바른 신앙적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는 …



Ⅱ. 광야에서 우상숭배를 일삼은 이스라엘(40~43)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은 모세가 시내산에 10계의 두 돌 판을 받으러 올라간 사이에도 자신들의 정욕을 여지없이 들어내었고 경건치 못한 아론이 여기에 함께 하면서 하나님을 노여우시게 만들고 만다.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40)

사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 못지 않게 아론이라는 신앙의 지도자가 더 문제였다. 아론은 백성들의 요구를 듣고 고민하거나 기도한 흔적은 전혀 없고 오히려 이러한 요구를 듣자 말자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출32:2)고 요구하고 백성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나중에 모세가 이 일을 추궁하자 자신은 전혀 책임지려 하지 않고 “…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 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출32: 22, 24) 라고 책임을 철저하게 백성에게 돌리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였다.(모세형, 아론형 지도자-한 배속에서 난 형제지만 너무나 달랐다)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41) 결국 여기에서부터 출발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가나안에 정착하여서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채찍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감으로 끝나게 된다.

한 가지 지나칠 수 없는 표현은 “…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라는 말이다. 범죄한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 살면서 섬김의 대상 조차도 창조주요 구세주 되시는 하나님보다 오히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는 어리석음을 본다.

결국 스스로 만든 존재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만은 아이러니하게도 창조주 하나님을 기뻐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힘없는 신이라고 이름 붙인 종교 생활을 더 좋아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시고,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을 뿐만 아니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셨다”(롬1:24, 26, 28)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42~43) 이것은 참으로 의외의 말씀이다. 이42~43절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탄식을 인용하고 있는 내용이다.

아모스를 통한 이 탄식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우상숭배를 일삼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결국 그들의 하늘의 日月星辰 숭배는 이미 출애굽하여 광야 40년간 끓임 없이 계속해 왔던 습관이 그대로 연결 되어 지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 얼마 되지 않은 시내 산에서부터 10계의 돌판을 비롯하여 법궤와 성막과 장막을 하늘에서 지시해주신 방법대로 만들어 수많은 제사를 드리게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제사들이 실상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몰록신의 장막과 레판신의 별을 떠메고 다니며 그것들에 끊임없이 제사를 드린 것이라는 말씀이다.

겉으로는 분명히 하나님께 번제를 비롯한 온 갓 제사를 계속 드려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것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두려운 경계를 가져야 한다. 이런 결과들이 왜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41) 라는 표현에서 깨달을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확신하고 간증하는 것들을 수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나 계획이 수정될 수 있을까? 답변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경우 큰 확신으로 자신이 이렇게 되는 이유를 증거하고 감격한 후에 얼마 있지 않아서 다시 그것을 뒤엎는 증거를 하면서 같은 확신으로 들떠있는 모습들을 더러 보고 듣게 되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획이나 약속은 절대로 바뀔 수 없고 고치고 바꿀 계획을 우리에게 제시 하신다면 그분은 이미 하나님일 수 없다. 사람이나 한치 앞을 보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은 영원에서 영원을 현재로 보고 계시는 분이시고 그런 광대한 가운데 계획하시고 뜻을 드러내심으로 한치의 실수도 있으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의 왜 그런 앞의 확신을 뒤집는 확신을 반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감정이나 개인적인 확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착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고, 본문의 스데반을 취조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과 다름이 없는 사람들이다.

또 이렇게 잘못된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뒤집게 될 때는 하나님의 영광에 누를 끼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억지로 하긴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들의 정욕을 하나님을 섬기는 이름으로 행했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가 같은 경계를 갖지 않으면 충분히 같은 잘못을 저지들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명령이나 진리 보다는 자신의 정욕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면 여전히 광야의 이스라엘과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 된고 만다. 그럼으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계심을 깨닫자.



Ⅲ.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44~50)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이 부분은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6:14)에 대한 답변이다. 즉 저들의 잘못된 생각과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나 그 말씀을 인용한 사도들의 표현은 참된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인류의 범죄를 감당하기 위한 제물로서 죽고 살게 될 것에 대한 표현이었지만, 이러한 신앙적 깊이를 알 리가 없는 저들은 당시의 헤롯 성전을 헐겠다고 하는 말씀으로 오해를 하였기 때문이고, 사실 이 헤롯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이 헌 것이 아니라 A.D. 70년에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서 사실적으로 헐리고 만다.

그리고 그것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증거의 장막이었든지,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성전이었든지, 아니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된 제2성전이었든지, 아니면 스데반과 그를 대적하고 있을 당시의 헤롯 성전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가둬 둘 수 있는 곳은 못되었음을 이 부분에서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비록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48) 라는 사실이다.

솔로몬 조차도 그가 비록 최초의 영광스러운 성전을 지어 드렸을지라도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8:27) 라고 고백 드리면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29~30) 라고 기도하고 있다.

다시 49~50절의 말씀은 이사야 66:1~2의 인용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사66:1~2f)

비록 오늘 본문에는 끊겨져 있지만 인용된 말씀에 덧붙여지는 말씀이 또한 경계가 되어야 할 말씀이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2b~4f)

오늘 우리도 같은 잘못을 자주자주 범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나 가둬두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 말씀을 얕은 우리의 생각과 육체와 같이 헤아리고 판단해서 하늘과 땅, 모든 우주에 충만해 계신 주님을 떠보고 저울질 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속마음까지도 맑은 거울처럼 들여다 보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준비하셔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주신 모세를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오늘도 성령과 그의 사람들을 통해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 역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광야 사십 년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였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께 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욕을 따라 하늘의 군대 즉 하늘에 수많은 별들을 자신들을 위하여 섬긴 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우리 각자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려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서 움직이시는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이 우주를 친히 지으시고 운행하시며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까지 보내 주신 분이실 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시기 위하여 심판 주로 이 땅에 다시 임하실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 앞에 요령과 제주를 부리는 것 보다 그분의 말씀과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