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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4:32~37 2008-04-27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예루살렘의 교회는 탄생 후부터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함께 능력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감당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주님의 복음을 인하여 많은 어려움과도 직면하게 되고, 사도들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장로들과 공회뿐 아니라 제사장들을 비롯한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끌려가 위협과 핍박을 당하는 것으로 온 교회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주도해 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움직여 가는 일이기 때문에 복음의 확산의 일은 결코 쇠할 수 없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내용은 2:43~47의 내용과 대부분 같은 내용과 모습을 보게 된다. 최초의 오순절에 세워진 교회는 많은 반대세력의 방해와 도전에도 불구하고 더욱 든든히 서가는 모습과 함께 이방 세계에서 주도적인 복음을 위해 역할 할 함 사람이 등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어떤 일을 즉흥적이거나 무사안일(無事安逸)하게 하시는 분이 아님을 배우게 하신다. 마치 에베소서 1장에서처럼 교회는 창세전부터 예정하시고 시행하심으로 이 땅에 있게 되었다는 바울을 통한 선언처럼, 유대와 사마리아를 너머서 땅끝을 향하여 나아갈 생명의 복음을 위하여 신실하고 헌신된 한 사람을 오늘 본문의 말미에 역시 예비시키고 계심을 본다.

오늘도 우리 속에서 동일하게 기대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사람과 물질을 예비하심을 오늘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으로 같은 역사를 이루심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교회나 나 자신이 이 교회 속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떻게 흘러 흘러오다 보니(오다 가다)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역시 이 역사의 마지막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신다는 확신으로 하나님께 응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각자가 이러한 고백과 믿음으로 우리를 사용하시고자 예비하신 미래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처음 이 예루살렘 교회가 많은 박해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2장 말미에서도 그랬지만 바른 교훈의 가르침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배우고, 한 성령 안에서 한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하나된 모습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를 힘썼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각자가 가진 것은 이미 개인의 소유로 생각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쓰여져야 한다는 고백으로 기도와 마음과 물질, 전체적인 삶에서 나눔을 실천하였고, 이것은 사람들의 계몽이나 홍보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에 의하여 주도되었기 때문이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는 말씀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좋은 비교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오늘 우리의 교회도 사람이 머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 되시므로 우리를 명령하시고, 지체된 우리 모두는 어떤 조건이나 형편에 관계없이 우리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한 순종과 헌신으로 순종하므로 처음 예루살렘 교회의 은혜의 역사를 오늘 이 역사 속에서도 같이 경험하고 찬양하는 …



Ⅰ.믿는 무리가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었다.(32~3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이것은 적어도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모습이다. 세상의 어떤 단체와도 비교될 수 없는 단결과 나눔을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는 단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이 말은 거꾸로 말하면 하나되지 못한 교회는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의미로 이해 될 수 있다.

“믿는 무리”는 바로 죄악의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께 속한 교회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당연히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한 피, 즉 한 아버지로부터 났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주님의 가르침과 다른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나와 아버지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신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요8:38) 말씀하시고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완전히 태생이 다르고 흐르는 피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행동도 다를 수 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이상이나 목표에 있어서 하나됨이라는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사실과 본질에 있어서 나타나는 현상에 있어서도 하나될 수 밖에 없다.

1.한 마음과 한 뜻이란 어떤 것인가?(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바로 “믿는 무리” 즉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유일하신 한 하나님을 순종하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결과는 당연하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엡4:5) 하였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마음이나 뜻이 절대로 다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마음, 헬, 카르디아(kardia), heart; 생각, 감각, 중심]; [뜻, 헬, 프쉬케(psyche), the soul, breath of life; 호흡, 영, 영혼(행2:27), 목숨(마6:25), 생명]의 의미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의 수에 관계없이 같은 중심에서 나오기 때문에 감각과 생각이 같을 수 밖에 없고, 호흡과 생명 즉 목숨도 비록 여러 사람이 움직이고 있을 찌라도 같은 하나님께 담보되어 있어서 공동 운명에 매여 있었던 것을 증거하고 있다.

마치 바울이 마지막 때가 다가옴을 경계하면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는 교훈은 초대교회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 ‘몸’은 다음에 연이어지는 보이는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옛적에 어렵게 살 때 한 양푼에 함께 밥을 비벼먹으면서도 ‘밥그릇에 간격을 나누면 복이 나간다.’ 라고 말하면서 그 양푼에 밥이 다할 때까지 나누어 먹었었다.

생명이 하나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거저 얻어진 존재라면 이제 그러한 사람들이 가진 것은 당연히 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것에 자신의 권리행사를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되고 오히려 억지가 될 것이다.

여기 우리 말에는 번역이 되지 않은 헬라어적 의미가 하나 있는 것은 ‘말(헬, 레고(lego))’하는 이가 없었다. 즉 ‘주권(主權)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법적으로 소송을 하고 싸우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권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있게 하신 주님의 주권만이 인정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늘도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하여 이러한 청지기적인 의식이 없다면 그러한 사람에게 있어서 주님은 온전히 주님 되지 못하는 모습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며 자신이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적어도 자신의 모든 소유조차도 그리스도께 넘겨졌다는 고백이다.

만약에 오늘 우리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는 데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움켜쥐고 있다면 그러한 사람의 주인은 여전히 자신(自身)이며 그러한 서로의 사람들은 한 마음도 한 뜻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권리를 그리스도께 이양해 버린 사람들 그들이 비로소 ‘한 마음도 한 뜻’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다.

2.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였다.(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이러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바로 하나님의 큰 권능이고, 자신의 생각이나 입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증거하게 되는 것이고 이런 사람들이 증거하기 때문에 호소력이 있고, 모든 사람들은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실 때 그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당시의 다른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고 기록이 되고 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을 비롯한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염두 해 두고 기도하고 가르치고 행동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에게서는 당연히 사람의 냄새가 났을 것이고,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하실 때도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하셨고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고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처지나 입장에서 말씀을 전하려 한다면 그런 가르침에서는 은혜를 얻을 수 없을 것이지만, 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하여 진리를 증거하려 할 때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증거해야 할 메시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함께 부활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사람을 살리고 죄악된 인생을 회복하는 유일한 생명의 묘약이 될 것이다.

3.핍절한 사람이 없었다.(34~35)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이 말씀 또한 앞의 말씀에 따른 자연스러운 추이(推移)라고 말씀 드릴 수 있다. 사람들의 핍절은 무엇보다도 영혼의 갈증에서 온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내면에서부터 성령님의 풍성이 채우심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자신들이 겪는 육신적 핍절이나 종교지도자들과 세상으로부터의 냉대는 이미 저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영혼의 사람 다윗의 고백에 이것은 충분히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이제 죽어도 소원이 없다.’ 사실 영적인 만족만이 사람을 이렇게 감격하게 만들 수 있다.

사람의 핍절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단절에서부터 나타나고 이러한 원리는 범죄 이전의 에덴에서는 경험치 못했던 사실이었다. 신약성경에서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어렴풋이 보게 된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17) 그러나 순간적이고 위장된 만족인 마약이나 죄악의 쾌락은 언제나 사람을 절망과 죽음으로 몰고 갈 뿐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함을 경험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로 인정하시는 풍성한 사랑과 성령의 위로는 이 세상의 어떤 산해진미(山海珍味)의 음식보다도 최고의 가치를 지닌 보석보다도 사람의 영혼과 육신의 만족을 주는 요소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13:44) 이러므로 우리 인생을 모두 투자하고도 결코 후회함이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46~45)

이런 입장에서 가장 안전한 희락(喜樂)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만 주어질 수 있고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닌 믿음을 통해서 가능케 하신 것이다.

또 ‘밭과 집 있는 자는’ 이미 영적으로 채워진 자신의 만족에서 자신의 가진 것이 다른 사람들의 부족을 채울 수 있다면 감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교회는 내면의 영적인 필요만을 채워 준 것이 아니라 육신적 필요도 채워 줄 수 있었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35) 모든 사람이 ‘필요’를 요구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그러나 범죄한 영혼은 언제나 장래를 걱정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을 요구하게 되지만 짐승들조차도 절대로 필요 이상의 사냥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은 남의 필요를 돌아보지만 육신의 사람들은 자신의 장래만을 위하여 쌓아놓게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고 권면하고 계시다.

먼저 우리모두가 영적으로 만족하여 감사를 넘치도록 드리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아볼 수 있는 신령한 하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Ⅱ.좋은 일군을 얻었다.(36~37)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요셉’이라는 이름은 구약과 이스라엘에서 아주 흔한 이름인데다가 본래 제사장 가문인 레위족으로 사도들이 불렀던 별명이 특이한 사람이다[바나바, 헬, 바르나바스(Barnabas), 아람어에서 유래 (bar + nabas) ‘나바(나비)’의 아들]. 결국 구약의 랍비들이 심약한 사람들을 곁에 앉히고 격려하고 위로는 것처럼 희랍어로는 성령의 역할과 같은 [권위자(위로자), 헬, 파라클레시스(paraklesis), 충고, 위로, 간청]로 나중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있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기서부터 바울의 동역자를 준비하심을 본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행9:26~27)

이 사람은 그야말로 위로자로서 사도들을 설득하고 바울을 옆에서 격려하여 복음이 땅끝을 향하여 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바른 일꾼은 교회가 교회될 때 나오게 됨을 보는 것이다.

물론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 나눠줬지만 유독 이 바나바의 이름이 여기에 거론되고 있는 것은 그가 장래에 교회 속에서 감당할 귀중한 역할 때문에 이 사람의 헌신과 인간됨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랍비는 아니지만 랍비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별명은 반드시 그 사람의 외모나 성격과 관련되고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바나바는 복음의 일선에 뛰어들기 전에 벌써 사도들로부터나 사람들로부터 아름다운 평판을 들었다고 하는 데서 바울 사도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지만 이 사람과 바울은 서로의 모자라는 부분을 상대에게서 채워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절묘한 팀을 만듦을 보면서 역시 하나님의 지혜를 감당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 사람의 귀중한 역할 때문에 고향과 가문이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주신 성품과 은사에 의해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일군으로 주님의 구원의 역사와 교회 속에 이름이 바나바처럼 남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적어도 교회 속의 영광된 이름은 당연히 천국에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바울은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롬16:7)는 칭찬을 주고 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교회와 역사 속에 그리고 후대에 어떤 이름으로 남을까를 거룩한 고민을 해 봤으면 한다.

하여튼 건강한 교회 속에 갖추어진 일꾼이 탄생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공식을 배우면서 이런 입장에서도 교회가 교회다운 면모를 회복하여 우리 하나의 교회 속에서뿐만 아니라 바나바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일꾼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 신앙의 모습을 추스리는 오늘 이 말씀을 듣는 …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입은 구별된 사람들의 공동체이고, 각자이지만 하나의 목표인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로서 그 목표지점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과 같은 하나의 믿음으로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고,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영육에 서로의 부족됨을 채워줌으로 핍절함을 느끼는 사람이 없이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나누고 그 속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오늘 우리와 교회가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