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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4:1~12 2008-04-0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성전미문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는 이내 솔로몬 행각이라는 성전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이렇게 나타난 기적과 능력 있는 복음증거는 여태까지 성전을 구실삼아 경제적(經濟的)으로나 명예적으로 기득권을 누리던 제사장 된 사두개인들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왔고 이에 격분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마침내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잡아들여 심문하기에 이른다.

평상시 어눌하고 말재주가 없던 이 두 사도는 예수께서 평상시 말씀하셨던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13:11)하셨던 것처럼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율법에 능통한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조차도 감당치 못할 구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거침없이 선포한다.

다음 주에 자세히 보겠지만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행4:13) 하는 것처럼 복음은 사람의 학문의 깊이에서 증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으로 가능함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 자신들의 기득권에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사도들을 잡아들여서 두 번에 걸친 심문을 하게 되고, 사도들이 잠시라도 놓이게 되자 교회는 이 핍박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더욱 담대케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핍박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성원들은 점점 왕성해가는 예루살렘의 진리의 확산은 어떤 인위적인 박해라도 하나님의 뜻인 복음의 확산을 막을 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핍박도 도전도 없는 이 시대에 힘 빠진 교회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더욱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또 하나의 신비는 핍박을 받을수록 강해지는 것이 교회라면, 무사안일 속에서는 성령과 말씀을 적극적으로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지하기 보다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읽게 되어 인간적인 방법과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를 보며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의 순결을 염려게 한다.



Ⅰ.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증거는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였다.(1~4)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베드로와 요한은 솔로몬 행각에 모여들어 앉은뱅이의 고침 받은 이적을 신기해 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적의 역사가 사람의 경건이나 권능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조상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진 일임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잠자코 둘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다.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2) 한 것처럼 당시까지 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움직이던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들의 가장 싫어하는 일을 행하고 있는 사도들을 가만둘 리가 없었다. 실제적으로 이 사람들은 당시의 또 다른 실세였던 바리새인들과는 다르게 천사나 부활은 물론이고 영적인 미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이 사도행전23:8에 보면 이 두 종파의 분명한 차이를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어찌 보면 사두개인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바라는 가장 현세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발판 삼아서 현세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주시는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부활을 인정하는 바리새인들 조차도 자신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선언하는 사도들의 증거가 거슬렸고 여기에 함께 동조했던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제사장 집단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자신들의 이권과 권력, 그리고 명예에 도전하던 예수 그리스도만 제거하면 모든 것이 萬事亨通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당시의 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사도들이 증거하는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사실까지 증거하는 것을 보면서 속이 뒤틀리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두 사도들을 잡았으나 밤이었기 때문에 산헤드린공회의 범률 상 심문하지 못하고 날이 밝도록 까지 가두어 둘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다른 한편으로 격려하시는 모습을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4)고 기록하고 있다.

처음 복음의 확산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신 약속대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3천명의 사람이 복음 속에 더해지게 하신 하나님은 이 시끄러운 혼란의 시기에도 5천명이라는 엄청난 수가 하나님의 교회에 더해지는 복을 주심으로서 핍박 받는 사도들에게 용기와 기쁨을 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도 아직 복음이 증거되지 않았던 곳에서는 이 예루살렘의 기적이 일어남을 경험한다는 보고들을 듣게 된다. 환란과 핍박 중에 증거하는 복음은 더욱 성령을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만큼 능력 있게 증거되고 또 많은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을 본다.

사도들을 비롯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어려움과 고통은 주님만을 더욱 의지하게 하고 인간의 알량한 수완을 버리게 함으로 십자가와 진리에 더 큰 확신을 갖게 하고 그만큼 능력 있는 복음의 증인들로 살게 한다.

오늘 마지막 역사 속에서 어두움의 세력이 진리를 거짓으로 뒤섞고 말씀과 성령과 십자가와 부활 보다는 세상의 영화에 취하게 하여 믿는 사람들의 힘을 잃게 만드는 안타까운 시대에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의 성령을 의하고 말씀을 의지하면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삶이 됨으로 사도들과 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 십자가의 증인들이 …



Ⅱ.진리가 확산되는 것처럼 어두움의 세력들도 힘을 모으는 것을 본다.(5~7)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두개인을 비롯한 성전의 실세들은 자신들의 힘보다는 비록 믿음은 같지 않지만 당시의 또 다른 권력의 앞잡이들인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산헤드린공회를 소집하고 여기에 자신들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앓던 이 같은 사도들을 제거하려는 일에 모든 수완을 다 동원한다.

사실 이 산헤드린공회는 자신들의 규칙상 위에서 보는 대로 밤에는 절대로 사형판결이나 목숨을 다루는 일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규정이 되어 있어서 베드로와 요한을 정죄하는 일을 위해서도 아침을 기다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 판결할 때는 밤이었음을 볼 때(마26:66; 막14:64) 인간이 만든 법이란 경우에 따라서 바꿔치는 이렇게도 운용하고 저렇게도 적용하는 모순을 본다. 절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바뀌지 않음을 본다.

산헤드린공회와 원로들은 사도들에게 심문을 시작하기를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고 다그친다. 이 질문에는 성전을 사용하고 관리할 권한이 바로 사두개인들로 이루어진 제사장들인 자신들의 권한이었고, 이를 승인할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 바로 산헤드린공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성전을 주신 목적은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기도하는 곳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죄의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제사하는 곳으로 주심으로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주셨고, 성전의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요2:19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주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도 잘못 사용되는 성전을 보시면서 호된 책망을 하신 바 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2:16b)고 꾸짖으셨고,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주님께 성전의 관리자들이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마21:23)

어쩌면 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묻는 질문이 예수께 드렸던 그 질문과 이렇게 같은 것도 신기할 정도이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보는 것은 진리가 증거되고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맛보는 역사의 같은 현장에서 어두움의 세력들인 마귀 사탄들도 이러한 주님의 은혜의 역사를 방해하기 위하여 날뛴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고, 우리 자신들의 지혜와 힘으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을 의지함으로 사도들과 같이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감당하는 …



Ⅲ.어떤 조건에서도 증거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道 뿐이다.(9~12)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 마치 그리스로마시대의 반달형의 모습으로 배열된 산헤드린공회는 심문 받는 사람들이 그 분위기 자체에 위압될 수 있었다고 한다. 최소한 70명 이상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에 둘러싸여 권세를 운운한다면 기가 죽을 수도 있지만, 이미 성령에 강하게 사로 잡힌 두 사도는 더 이상 사람의 힘과 세력에 위협받을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보이는 상황에서는 2대70이라는 비록 비교될 수 없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미 두 사도들은 성령에 충만하여 마치 구약성경의 도단성에 자신을 둘러싼 아람 군대 앞에서도 하늘의 천군천사를 의지하는 엘리사처럼(왕하6:14~17) 담대할 수 있었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조금도 거리낌이나 머뭇거림이 없었다.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9) ‘우리가 당신들처럼 잘못된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걸어보지도 못하고 앉은 상태로 구걸하며 살던 가련한 인생에게 영원한 자유를 찾아준 착한 일에 대해 그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구원을 끼쳤느냐고 묻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 여기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의 사형도구인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사람이 그토록 그리스도의 오심을 열망하고 기다리던 바로 메시야의 나라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그 오신 메시야를 죽인 것이라는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고 있다.

마치 주님께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 하신 말씀을 그대로 폭로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로 오신 그리스도는 오히려 그것을 대망하던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온 인류의 희망이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복되신 이름이 평생을 앉아서 구걸하던 가련한 이 사람을 건강하게 치료하여 당신네들이 보는 바와 같이 이렇게 함께 서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의 증인이 바로 이 사람이다.” 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11절은 시편에 예언 된 대로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118:22~23) 라는 말씀이 이루어 진 것이 바로 이것이다. 라는 증거이다.

역시 오늘 마지막의 말씀이 오늘 증거하는 모든 말씀의 열쇠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12) 이 말씀 역시 산헤드린공회원들에게는 비수와 같이 저들의 가슴을 찌르는 선언이었을 것이다.

구약의 모세를 비롯한 율법과 여러 선지자들을 이어받아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도들의 증거를 듣는다면 그 그리스도를 저들이 죽여버리고 자신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원하는 대로 구상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저들에게 이제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헛일’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시야는 이미 오셨음에도 당신들이 그 메시야를 죽임으로 성경을 응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저들이 듣기에는 기막힌 사연인지 모를 일이다. ‘당신네들이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자유케 하고 모든 어려움과 고통에서 자유를 선언할 다른 그리스도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라는 투의 책망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선언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12) 다신교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일수록 많은 신들이 자신들을 극락으로 이끌고 영원으로 이끌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이 역사 속에 인간을 죄와 죽음과 저주의 속박에서 자유케 할 이름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이런 일들은 이미 구약의 시대에도 있었다. 히스기야가 그 부친 아하스의 시대에 수없이 많은 우상의 단을 예루살렘에 세운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전에서만 제사하게 하자 앗수르 왕의 신하인 랍사게 라는 장군이 “너희가 혹시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산당과 제단을 제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명하기를 예루살렘 이 단 앞에서만 숭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왕하18:22)고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빈정댄다.

이래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독선이 심하다고 불평한다. ‘뭐 다른 신들도 같이 인정해주고 도움을 받으면 얼마나 좋은가! 왜 유독 예수만 고집하는가?’고 그리스도인들이 융통성이 없다고 비난하고,

어쩌면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만을 외치면 역시 같은 소리를 듣는다.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변했는데 그런 것들을 수용하지 않으면 뒤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늘도 여전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외에는 없다.

그 외에는 모두 우리를 속이는 것이요 가짜이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이름, 우리를 죄와 저주에서 사주신 이름, 장차 영원한 영광에 우리를 데리고 들어가실 영광의 이름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세상의 사람들은 다른 이름을 기대한다. [과학]이라는 또 다른 구세주에 기대어 이 멸망으로 가는 지구에서 살아남아 보고자 한다. 그러나 과학은 분명히 그리스도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경제가 파탄이 날 것이지만 금은 가치가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금을 사 모으려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금은 이 세상에서 사람을 영원으로 데려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란다.

세상의 마지막이 올수록 메시아 라고 이름 붙이는 것들이 많다. 아니 이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예언 하신 사실들이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마24:23~25)

우리는 이 역사가 끝날 때까지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대해 확신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가 변하고 역사가 흘러도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임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절대로 바뀌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수 천년 전에 좋아하시던 것을 지금도 좋아하신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가 들고 환경이 바뀌면 취향도 바뀐다. 이런 사람의 기준에서 늘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에 문제가 생긴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좋아하시리라고 자신들의 기호에 하나님을 맞추기 때문에 문제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2천년 전의 구원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역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라는 이름뿐이다.

역시 증거해야 할 이름도, 자랑해야 할 이름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증거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12)는 확신으로 충만 하시기를 …

환란과 핍박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증거는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진리가 확산되는 것처럼 어두움의 세력들도 힘을 모으는 것을 본다.

어떤 조건에서도 증거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