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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15~26 2008-02-03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주님의 제자들과 여인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한 태에서 난 육신의 동생들이 전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데 집중하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 장소가 마가의 다락방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수 많은 은혜의 언약이 이루어 진 예루살렘 성전이었다는 말씀을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이전에 기록한 이 사도행전의 전편이라고 하는 누가복음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의 말씀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다는 사실을 증거 한바 있다.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 하니라”(눅24:52~53)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령의 오심을 기도하면서 기다리던 제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세상을 하직한 가룟 유다의 대신으로 예부터 내려오는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12사도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을 하는 것으로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모습을 본다.

베드로는 다른 두 제자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언제나 주님께서 중요한 자리에 늘 데리고 다니셨고 사도들 중에서도 늘 어떤 일들에 먼저 나서는 그런 모습들이 더러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었지만 여기에서도 여전히 이 일을 이끌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다만 여기에서도 우리는 몇몇 부분들에 있어서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직 성령께서 오시기 전의 상황에 이루어진 이 일이 과연 하나님의 원하심 인가를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고, 또 이후에 이루어지는 일들을 전체적으로 볼 수 없는 우리의 제한된 이해로 완전한 판단을 주님 오실 때까지 미뤄 두어야만 할 것 같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실제로 이 11사도와 더불어 12 사도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방의 사도라고 하는 바울이 이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판단에서 그렇다.

사실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 명령 받은 일도 아니고 주님께서는 다만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4~5)는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나머지 열한 사도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비록 제자들이 이전의 제자들은 분명히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성령을 앞질러 행하는 일들은 하나님의 의지나 뜻보다는 자신들의 판단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역시 동일한 경계를 가져야만 한다. 말씀과 성령의 가르치심이 아닌 우리 자신들의 뜻을 펼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원함으로 착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데서 가져야만 할 신앙적 자세이다.

앞 절인 14까지 기도하던 사람들과 오늘 본문의 상황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단락이 바뀌었고 베드로의 말하는 것으로 볼 때 이 가룟 유다의 대신 한 사람을 뽑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은 적어도 성인 남자들로 이해된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도 여자들이나 어린이들은 수에 두지 않았고 특히 어떤 중요한 결정에는 참여 시키지 않은 것이 이스라엘의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상황들을 고려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나누는데 있어서 성령께서 긍휼과 은혜를 주시기를 복되신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간구를 드린다.



Ⅰ.베드로 사도의 안타까운 회고.(15~17)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부분은 앞의 내용에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아닌데다가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모인 것이 분명하다. 베드로 사도는 형제들 가운데 일어나서 가룟 유다의 버리고 간 역할을 대신할 사람을 하나를 세워야 한다고 부탁을 말하는데 우리 성경에서는 번역되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것은 15절의 120명쯤의 ‘형제 가운데’ 란 말은 남녀를 모두 포함할 수 있는 표현이지만 16절의 베드로의 “형제들아!”[Andres(aner) adelphoi(adelphos)] 라는 호칭은 “남자 형제들아!” 라는 부름이다.

서두에서 간략하게 언급한대로 중요한 선택이나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문화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이 배제되고 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이것이 투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남자 형제들을 향하여 베드로는 호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편 41:9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그 말씀이 이루어져서 예수를 잡아 죽일 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결국 불의 삯을 사모하다가 비극적인 말씀을 이루는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고 증언한다.

이 세상에는 그 때나 이 때나 그리고 미래에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선한 구원의 역사의 장본인들이 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복음의 도구들로 말씀을 이루는 자들과 그렇지 않으면 가룟 유다처럼 어두움의 도구로 전락하여 비극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들이 그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주님의 의도는 아니었고 주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신 것은 아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는 주님의 안타까운 탄식을 보면 더욱 분명하다. 각 사람은 자기 죄로 죽는 것이다.

이 가룟 유다도 본래는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17) 한 것처럼 시작은 구원의 무리,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의 수에 참여하는 자이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 라고 증언한다.

구원의 복음의 한 직무, ‘귀한 직책을 맡았던 자가 왜 이 비극의 주인공으로 전락하게 되는가?’ 우리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요한 사도는 이 가룟 유다를 평가하기를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고 평하고 있다.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이었지만 받은 바 은혜의 족한 줄을 모르고 훔쳐가는 자 이었기 때문에 도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고, 그의 성격대로 비극의 운명으로 생을 마감하는 인물의 표상이 되고 말았다. 오늘 우리도 이런 입장에서 자신이 있는가 각자에게 물어야만 한다.

주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다 보면 가룟 유다의 자리로 전락할 수 있다. 본래 인류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주님께 복된 천사의 지위를 받았던 자들이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1:6) 라는 증언을 두려움으로 되새김질 하여야 한다.

가룟 유다 그는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이었다는 복된 지위를 은 30에 팔아버림으로 성경 말씀을 이루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오늘 그리스도인의 은혜로운 지위를 잘 감당하여 이왕에 복의 주인공들이 되는 …



Ⅱ.가룟 유다의 비참한 최후를 증언한다.(18~20)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말씀을 마태가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마27:3~10; 렘32:6~9; 슥11:12~13)

정당한 삯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도 의로운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불의한 삯이 문제이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의 삯은 영생 곧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팔지 못할 것을 팔아먹는 것이나 가치에 맞지 않는 거래는 불의의 삯으로 지탄 받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 대하여 불의한 대가를 지불하게 된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묘사하기조차 진저리 나는 참혹한 모습으로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아람어로 ‘피밭’ 그러나 그것은 사실 가룟 유다의 피값이 아닌 해골의 골고다에 피 흘리신 주님의 피값을 판 것이었다.

그래서 시편의 말씀은 인용되었다. 둘 다 참혹한 저주의 내용들이다. 그래서 앞뒤를 인용하면 참으로 비참한 내용의 연속이다.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시69:25) “그 연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시109:8) 결국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받는 대가들이다.

가룟 유다의 자리 뿐만 아니라 은혜의 자리를 가치 없이 팔아먹고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팔아 먹는다면 거기에 대한 대가는 우리 입에 올리지 못할 정도로 참담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국 가룟 유다처럼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이 두려운 경계도 교훈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현세에서도 귀중한 복음의 한 모퉁이를 넉넉히 감당하여 주님의 허락하신 영광을 누리고 영원한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유업을 받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



Ⅲ.사도의 자격이 증거 되고 후보가 지명된다.(21~23)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원하심 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가룟 유다의 버리고 간 직책을 맡을 다른 사람을 찾음에 있어서 사도의 자격을 말한다. 일반적으로도 사도의 자격을 말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입고 주님의 이적과 표적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은 물론 승천을 목격한 자들로 이야기 하는데 여기에 베드로 사도[헬, 아포스톨로스(apostolos), 사절, 전권대사, 사자, 보냄 받은 자]의 기준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자격을 심의하는 내용이다. 또 하나의 하나님 나라 일꾼의 모델이 된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21~22f) 라고 천거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자격의 요건이 바로 그가 해야 할 일을 규정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그 사람의 본 것을 증거 하는 것이고, 그러나 여기에서 빠질 수 없는 자격 하나는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아무리 사람이 뽑았을지라도 주님의 성령께서 인정치 않으면 이 일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구제를 위해 선택된 사람들에게도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행6:3f)는 요청을 사도들이 하였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4~25)고 고백하면서 바로 앞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라고 증언하고 있다.

왜 이러한 사람들을 선택하는가 하면 바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는 것이고 오늘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직분도 이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럼으로 교회의 직분은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 인 것이다.

이러한 베드로의 요청에 합당한 사람이 두 사람이 천거 되었는데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정의)라고 하는 요셉(더함) ≒ 맛디아(야훼의 선물)” 였다.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을 자격 심의하여 두 사람을 세웠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궁극적인 선택은 주님께서 하셔야만 했다.



Ⅳ.기도를 드리고 제비를 뽑았다.(24~26)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사람들의 선택보다도 하나님의 선택을 위하여 이들은 최종적으로 기도로 맡긴다.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24) 심령과 폐부를 감찰하시는 주님[렘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외에는 누구도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갈망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단순히 가룟 유다처럼 돈을 사랑하는 사람일지, 아니면 세상의 명예를 열망했던 과거의 사도들 자신의 모습일지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또 다시 선택된 사람의 역할의 또 다른 면을 여기에 기도로 고백하고 있다. 앞에서는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 이었다면 결과적으로는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 라는 것이다. 사실 주님을 위한 일꾼들의 역할은 오로지 봉사이고 그 수고의 대가는 하늘에서 받게 될 것이다.

가룟 유다도 이를 위하여 선택함을 받았지만 결국 이 귀중한 역할을 버리고 자기 곳으로 가고 말았던 것이다. 사람은 가만 두어도 제 곳으로 즉, 오직 죄인을 기다리는 절망과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주에서 자신의 피값으로 사 주셔서 사람의 힘으로 갈 수 없는 영광의 도성 하나님의 나라를 가게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망각하고 또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결국 정해진 자기 곳으로 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제 마지막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26)는 말씀은 다음 2장에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지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의 첫 부분인 15절은 14절과 단락이 바뀌어 있지만 이 1장 말미와 2장의 시작은 후에 장, 절을 넣기 위해서 끊어놓긴 했지만 단락이 바뀌지 않은 연결되어지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26절의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행2:1) 라는 내용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지는 내용으로 다음 시간에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맛디아를 11 사도와 함께 사도의 수에 뽑아 넣는 것이 진정 하나님의 원하심 이었는지는 어찌보면 대표되는 사도들 즉, 베드로와 바울을 중심해서 기록된 이 사도행전을 통해서는 분명치 않다. 어쩌면 보내실 성령을 기다려 권능을 받고 복음의 증인들이 되어야 할 사도들의 지나친 행동일 수도 있고 아니면 기도하는 가운데 세심한 준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성령의 오심에 대하여 인간적으로는 최대의 준비를 한 것이고 성령의 오심도 역시 이 열 두 사도들에게 임을 보게 될 때 주님께서도 이 일을 승인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자신들과 함께 사도의 직분을 받았음에도 그 은혜를 팔고 제 갈 곳으로 간 가룟 유다는 이 베드로의 증언으로부터 역사 속에 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의 경계가 될 것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은 이 세상이 더 흥하겠지만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도 있어왔던 사실이고, 사실에 있어서는 가룟 유다처럼 언제나 당사자들에게 비극일 뿐인 것은 하나님은 제 곳으로 가버리는 사람들 대신 언제나 다른 사람으로 채우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보면서 결코 영과 육이 다 망하는 어리석은 전처를 밟지 말아야 할 것이고 이렇게 비극의 인물로 회자되는 이름으로 남아서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전달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선택된 사람들의 역할과 자세를 오늘 이 말씀에서 또 다시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이 기꺼이 헌신한다면 그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기대와 함께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고 비록 사도가 아닐지라도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한 ‘봉사’의 직책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자신의 욕심이나 의지를 온전히 버리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일할 때 영원에까지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인간적인 서투른 모습의 어설픈 모습의 일꾼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의 도구가 되어서 주님께서 각자의 영광을 가지고 오실 그날까지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