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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주님을 하늘로 이별한 제자들과 여인들은 주님의 언약을 기다리는 가장 구체적인 첫번째 단계로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기존에 이해하고 있는 일반적인 모습에서 보다는 성경을 통하여 새롭게 이해하고 확신하고자 한다.
수 많은 역사 속에서 한결같이 이해한 것들이 문제가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이런 시도에 반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주님 오실 때가 되었더라도 우리는 신앙적으로 더욱 바른 이해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고 언제든지 바르지 못한 신앙의 자세는 진리로 돌이키고 바로 잡는 자세야 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고 확신하면서 신중히 이 부분의 새로운 이해를 헤아렸으면 한다.
물론 오늘 본문의 내용과 다음 주에 증거 될 말씀과의 연관성에도 우리는 조금은 다른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다.
16세기까지 바르지 못한 신앙을 성경으로 되돌리는 자세가 소위 말하는 종교개혁의 역사였다면 오늘도 우리는 그 정신에 깨어있어 무지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오해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뭐 그런 것들이 중요한가?’ 라는 반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부분적인 회복이 아니라 미세한 부분조차도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류의 사죄를 완성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오늘 우리의 스승과 보혜사 되시는 성령님의 구원의 역사에 보다 완전한 이해와 순종이 되어야 하는 데서 중요하다.
오늘 우리도 바른 진리의 약속 위에서 약속하신 것에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며 전혀 기도에 힘쓰는 삶이 되어서 주님의 영광과 은혜를 넘치도록 경험하는 이 말씀을 듣는 …
Ⅰ.기대와 소망을 안고 돌아왔다.(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2천 규빗; 1,1Km]
주님을 하늘로 떠나보낸 제자들의 마음은 한없이 허전했을 것이다. 부활 후 그래도 몇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격려하시던 것도 이제는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기대할 수가 없는, 다만 막연히 오실 익숙치 못한 성령의 약속도 저들이 경험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멀고먼 낯설은 약속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처럼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육신적으로만 기대했던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고 자신들이 다 한 자리씩을 차지 하리라는 기대까지 가지고 멀리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제자들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수없이 들었지만 그런 말씀은 안중에도 없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되시자 그야말로 안절부절 했었다.
그래도 이제는 부활을 목격하면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는 성령으로 다시 오시리라는 약속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고, 자신들의 눈으로 하늘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뵈었기 때문에 저들은 새로운 기대와 소망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와 기도하며 머무를 수 있었다. 즉 “…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11)는 천사들의 증거와 함께 승천을 목격했기 때문에 약속을 확인하고 안심할 수 있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듣는 것보다 확실하고 무엇보다도 직접 보는 것은 절대로 지울 수 없이 깊이 박히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의 구조라고 교육학에서도 증언하고 있는 사실이다. 아무리 유능한 교사의 일방적인 가르침보다 자신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교육이라는 이론 하에서 외국어 교육의 체험적인 부분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부분은 더욱 그렇다. 아무리 들어도 자신의 삶 속에 체험 되어지는 것보다 분명하지는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간접 체험이라도 하기 위해서 체험했다는 사람들의 증언을 듣는 것이고 오늘 우리가 읽고있는 이 진리도 바로 체험자들과 그 현장에 하께 계셨던 성령의 지도와 함께 우리 각자의 체험으로 우리 삶 속에 재현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체험케 하는 주체이다. 마귀 사탄도 이 체험을 빙자해서 역사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진리가 먼저 이고 어두움의 영이 아닌 빛이신 성령께서 비춰 주실 때 우리는 바른 하늘의 체험이 가능한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말씀과 성령과 함께 십자가에 나를 위해 피 흘리시는 주님을 체험하고 못 자국 난 손과 발로 부활하셔서 의롭다 하심을 체험하시고 다시 영광스럽게 오실 주님의 위엄의 모습을 여러분 각자의 삶으로 이 제자들처럼 체험해서 하늘의 확신으로 충만한 하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
Ⅱ.성전에 모여 기도했다.(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대부분이 지나치는 부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기도하고 성령께서 내리신 이 장소를 대부분 의심 없이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근거로는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눈 장소를 마가복음14:15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이름은 없지만)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눅22:12) 신 기록을 가지고 말하고 다음으로는 사도행전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는 기록으로 단정한다.
그러나 모여서 기도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구원의 역사를 이룸에 있어서 구약의 수많은 그림자를 나타내시고 이를 완성하셨다. 이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곳이 한 개인의 다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터전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에서부터 솔로몬 성전을 세우신 곳, 수많은 제사를 받으신 그 성전에서 이루시는 것이 당연하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12~13f)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3:1)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2:2~3; 미4:1~2)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24:51~53) 만약에 이 부분을 마태나 마가 혹은 요한이 기록했다면 우리는 조금은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같은 누가의 기록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7)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13f)
열왕기상6:5, 10. “또 전의 벽 곧 성소와 지성소의 벽에 연접하여 돌아가며 다락들을 건축하되 다락마다 돌아가며 골방들을 만들었으니; 또 온 전으로 돌아가며 고가 다섯 규빗 되는 다락방을 건축하되 백향목 들보로 전에 연접하게 하였더라”(대상28:11)
또 헤롯 성전은 그 규모에 있어서 솔로몬 성전보다 컸던 것으로 역사가들은 증언한다.
비록 청치적인 의도에서 세워진 헤롯 성전이었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역사도 역시 있었다. 누가복음1:5~6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23 [눅2:25~35 시므온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성령의 임재와 교회 탄생 후에도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6)
가장 호소력이 있는 증거는 바로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24:52~53)는 기록이다.
하나님은 어떤 말씀도 헛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나타난 사건사건 하나도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없다. 다만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육에 속한 사람만이 말씀을 받는데도 자신에게 유익한가 아닌가를 가려 듣게 되고 구원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성전을 의미 없이 예루살렘에 지으신 것이 분명 아니다. 그 성전이 비록 불신의 헤롯에 의해서 지어졌어도 여전히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유대 즉, 이스라엘, 택하신 백성을 통해서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시고 그 메시아를 통해서 인류 만민을 구원하시려 는 하나님은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성령을 아무리 경건한 사람일지라도 한 개인의 집에서 기도하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가 아니라 수많은 짐승의 생명의 피를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받으시고 사하셨던 예루살렘 성전에 오시게 하시므로 서 구약의 짐승의 제사는 완료되고 새로운 언약의 성취가 이루어 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과 뜻과 역사는 무의미 한 것은 한 가지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신하는 …
Ⅲ.그러나 오순절의 성령 오심은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다.(13~14)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이것도 또 하나의 오해의 소지가 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자세가 세속적이거나 되는 대로가 아니라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이 역사에는 주님의 약속이 먼저 였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수없이 성령의 오심을 예언하셨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마음을 조금만 말씀에 기울였어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 조차도 결코 끝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사람의 한계가 여기까지임을 어쩔 수 없다.
먼저는 본문에 언급한 대로 다락에 올라 가 기도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1.다락에 모인 사람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13)
물론 여기의 이 사람들이 다음 주에 다루게 되는 15절 이하의 가룟 유다가 버리고 간 사도보선을 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모두 언급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①제자들. 이 사람들의 이름은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누가복음6:14~16과 공관 복음의 기록과 다르지 않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마10:2~4; 막3:16~18)
비록 한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고 절망하여 도망치기도 했지만 주님께서 마지막 하셨던 기도의 응답대로 한 사람도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17:12)
②여인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14)
누가는 이미 주님을 따르는 몇몇 유명의 여인들과 이름없는 여인들을 언급한 바 있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8:2~3) 이제 이 여인들도 하나같이 주님의 승천을 보고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일에 함께 하였다. 한결 같은 믿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함을 배우는 것이다.
③육신의 형제들. “…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14b)
이 모습 역시 주님의 십자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살아 계실 때는 혈육이라는 이유 때문에 육신의 형제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7:3~5)
또 주위의 사람들 역시 마리아에게서 난 육신의 형제들과 자매들 때문에 주님을 불신한 기록들이 공관 복음에 더러 기록되고 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마13:55~56)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6:3)
그러던 이 사람들이 비록 아직 성령이 임하시지는 않았지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기도의 사람으로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로(갈2: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또는 성경을 기록하는 것(야고보, 유다)을 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다.
결국 주님의 희생은 인류의 죄의 문제였었고 그 인류의 한 부류였던 육신의 혈육들조차도 포함되고 있음을 배운다. 오늘도 동일하게 그리스도인들의 희생 없는 이론적으로는 절대로 불신의 가족들을 구원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여기서 배우게 된다.
2.주님의 약속을 받고 기도했다.
이러한 기도가 있게 된 이유는 이미 4~5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는 주님의 약속에 근거한 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 그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이 오셨는가? 그럴 수도 있다. 만약에 이들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성령은 오시지 않으셨을까? 아니다. 그래도 주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어쨋거나 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자세로 기도하며 기다렸다는 사실이다.
믿음생활 속에서 자주자주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주님의 약속하신 것이 모든 신앙의 바탕이 되어야 하고 거기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세로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물질을 봉헌하고 말씀을 증거 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서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신앙의 원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이고 그 다음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응답의 비결이다. 많은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고 김치 국부터 먼저 마신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안중에도 없고 무조건 자신에게 필요하니 내놓으라는 식의 억지를 쓰는 경우를 더러 보는데 이것은 분명히 받을 자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믿음의 사람들로 주님께서 약속한 것을 확인하고 지키면서 기도할 필요가 있다.
주님을 만나건 보내건 가까이 모신 자들은 한결같이 하늘의 소망으로 가득 찼다. 우리의 믿음의 눈과 성령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말씀들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깊이 체험하여 어떤 위기와 어려움에도 믿음을 잃지 않는 …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이 되기 위해서 우리 각자의 몸이 심령 속에 임재 해 계신 성령의 전으로 검증되고 인정되는 역사가 날마다 있어지기를 …
우리의 기도하고 바라는 것들 모두가 주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신 것들에 기초 된 것들을 붙들고 구함으로 구하는 것들마다 주님의 뜻에 맞아서 응답 받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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