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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도행전을 상고함에 있어서 개론적인 부분을 나눈바 있다. 명칭과 저자, 그리고 특징과 교훈 등과 함께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야 할 과제들을 생각했었다. 특히 앞으로 읽고 상고하면서 참고해야 할 특징들을 정리 했었다.
①이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주신 증거의 책이다. [Qeovfilo", Theophilos, 하나님의 친구에게 쓰여지고 있다.] ②본 서신의 중심은 사도들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③본서는 교회의 권능과 역할과 이유와 함께 예배와 교제와 봉사와 선교와 찬양의 모범이다. ④복음으로 인간의 죄로부터의 자유와 가치와 진정한 기쁨을 찾아 준다. ⑤이 성경은 사람이 일생동안 무엇을 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 가장 우선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귀중한가를 제시한다. ⑥죄로 죽은 인생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의 실례를 수없이 보여주는 새로운 창조의 책이다. ⑦완성된 유월절의 의미와 오순절을 통하여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체험케 하는 구약의 모든 언약을 이루심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오늘 다시 읽은 본문은 이 책을 쓰게 되는 배경과 함께 부활 후에 하신 사역과 사도들에게 주시는 최후의 명령, 그리고 자신이 가신 후에 이 땅에 구원의 주체로 오실 성령을 받기 위한 범위와 시기를 증거하신 내용이다.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사도들에게 주신 성령의 오심에 대한 약속을 확신할 수 있다.
Ⅰ.먼저 쓴 글 즉, 누가복음에 대하여…(1~2)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누가복음의 기록처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눅1:3~4) 라는 표현으로 볼 때 실제로 로마의 한 높은 지위의 관료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친구로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높이는 은유적인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당시에 박해가 심한 탓에 이런 별명들이 사용되었던 것 같고 오늘 실명을 쓰며 믿음생활해도 아무 어려움이 없다는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1) 라는 사실로 미루어 역시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는 탄생에서부터 공생애로 들어 가시는 과정을 증거 하는 것이고,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2)는 사도들의 선택에서 복음을 증거하신 사실과 구속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지상최대의 명령을 이야기하고 계시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사실은 이제 다음 주의 말씀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다루게 되겠지만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하신 至上最大의 命令을 주시고 昇天하신 사실을 누가도 역시 기록하고 있음을 본다.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께서 또 다시 그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 택함을 받은 우리에게 동일한 말씀과 성령을 명하시고 계심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 같은 사랑을 입고 이 글을 감격으로 읽는 우리 모두에게도 서로 [데오빌로 각하- 벧전2:9] 라는 칭호를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사도행전은 오늘의 [왕 같은 제사장]들인 우리들에게 동일하게 주신 책이라는 확신과 함께 감사로 이 글을 대하는 …
Ⅱ.부활 후 제자들에게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온 갓 우리의 죄를 대신한 수치와 모멸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역사가 여기에서 끝났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늘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
이런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대단히, 대단히 중요한 은혜의 역사이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주님은 자신의 다시 사심에 대하여 수없이 나타나셨지만 당시의 제자들 중에도 오히려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28:17)
대표적인 몇 군대를 살피면 누가복음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막16:12) 나타나셨고 다시 36~43에서는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다른 종교의 교주와 가장 확실히 다른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었다. 그분은 생명이시기 때문이다.(요14:6)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말씀하신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물으셨던 그 말씀에 대한 실증으로 사심을 제자들에게 여러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셨다.
그래서 나중에 바울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아그립바 왕(베스도)에게 증거하기를 “…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행26:26b) 라고 부활의 사실을 증거 하였고, 고린도 교회를 향하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15:3~8) 라고 증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2)
주님께서 부활 후 40일 동안 안식 후 첫날 즉, 소위 말하는 주님의 날(계1:10)에 주로 제자들에게 보이셨고, 이것이 결국 예배의 날이 된 것이다.(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요일이 태양신의 날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무덤을 여신 날 즉, 하늘의 구원의 신비와 생명의 능력으로 죽음이 수치를 들어내게 된 날에 우리는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 40일 동안 단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상의 하나님 나라는 곧 구원의 방주요 도구인 교회이고 이런 과제가 결국 전도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행8:12) (결국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전도이다.)
오늘 우리의 전도의 주제도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 되어야만 한다. 죄인이 하나님의 나라의 구성원이 되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전하는 것이 곧 죄의 사람이 죽고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은혜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의를 위하여 부활하신 역사를 이 역사 속에 모든 인류에게 적용하는 일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에게도 확실한 구속과 부활의 증거와 하나님 나라의 일이 분명하게 보여지시기를 …
Ⅲ.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주신 당부(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에서 증거하신 말씀의 확인이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24:49) 여기서 같은 말씀은 바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고 그 약속은 바로 “내게 들은 바”이다.
그 약속이 임할 곳은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같은 누가복음에서는 “이 성에 유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약속의 대상은 “사도와 같이 모이사” 즉 사도들에게 주신 약속이고, 약속을 받을 범위는 “예루살렘”이며 기간을 “몇 날이 못되어” 라는 도식이 된다.
실제적으로 이 약속은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져서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열흘이 지난 오순절날 이루어짐을 본다. 주님의 약속은 어느 것 하나도 빗나간 예가 없으시다. 이 말은 주님의 약속은 이후의 것도 어김없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우리로 하여금 갖게 한다.
이 4절의 약속은 다시 5절에서 해설되어지고 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5)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에게 공생를 시작하시는 주님께서 나오시기 전에 선언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1~12)
이 요한의 선언은 주님께서 주실 세례가 두 가지임을 말씀한다. 즉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엄밀히 믿음의 사람들과 불신의 사람들이 받을 구원의 성령과 저주의 불의 심판을 말씀하는 것이다.
혹은 이 말씀을 함께 취급하여 성령 곧 불의 세례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뒤에 따르는 말씀이 여기에 대한 설득력을 잃게 만든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
연결되는 이 말씀만을 가지고 그렇게 이해를 한다면 역시 호소력이 약하겠지만 오늘 인용되는 말씀에서는 성령의 세례를 받을 사도들이었기 때문에 [불]이 빠진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여기 한 군데만 나타난다면 역시 설득력이 부족하겠지만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이 자신을 청하여 말씀을 듣고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을 보고 세례를 준 것이 화근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 다른 사도들의 문책을 받을 때 보고하는 내용에서도 인용하고 있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행11:16)
그러므로 불 받으라는 선언은 성경적으로는 성령이라기보다는 심판을 의미하는 무서운 말일 수 있다. 나중에 우리가 계속 상고하게 되겠지만 이 말씀에 연결되어지는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내린 성령은 [불]이 아니라 내리시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행2:3) 라고 하였지 불이 임한 것이 분명히 아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5)는 내용이 결국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는 이유임을 이해하게 된다.
다시 누가의 기록을 이 말씀과 더불어 비교해 보면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24:49b) 하신 약속과 일반이고, 결국 사도들이 여태껏 나약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요소를 벗어 던지고 주님의 명령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반드시 임하여 하늘의 권능을 힘입어야 가능함을 증거하신 것이다.
이것이 다음 주에 상고하게 되겠지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8)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의 죄로 인한 죽음과 의롭다 하심을 위해 부활하심, 그리고 죄와 상관없이 그를 바라는 믿는 자들을 위하여 다시 오실 재림의 약속을 기대하게 할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할 권능이요 힘이다.
오늘 우리 역시 이 성령의 권능이 없이는 생명의 주님을 증거 할 능력을 갖지 못하고 이 사도들에게 주신 약속은 단순이 사도들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복음을 전해 받은 같은 입장의 위치에 있는 우리에게 같은 약속이라는 사실이다.
거꾸로 말하면 주님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고, 오늘 동일하게 이 약속을 감당해야 할 우리들이 비록 1세기처럼 창과 칼로 믿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죽이는 시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 온 세계와 사람들의 마음을 휘졌고 다니는 시대에 적절히 믿는 자로서 처신하는 것 조차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성령의 임재 이전의 사도들처럼 문 걸어 잠그고 밖에 나가지 않으려는 허약한 모습일 수 밖에 없다.
아니 애당초 성령의 충만 없이는 복음으로 사는 일 조차가 세상 속에서 힘겨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표현하지도 못하는 어줍잖은 모습으로 세상의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모습일 수밖에 없고 교회 속에 안주하는 모습일 수 밖에 없는 하늘의 패잔병의 초라한 모습일 것이다.
이런 모습으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자신 있게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지도 못하며 세상의 형통과 영광이 더 부러울 뿐이다. 때로 큰소리 치고 만용을 부려 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도 죄스럽고 부끄러운 초라한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18~21)
성령 없는 신앙은 기름 떨어진 자동차요 굶주린 맥없는 사람이다. 우리가 올해에 회복해야 할 귀중한 목표하나가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계획과 노력이라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초라한 세상놀음에 불과할 뿐이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충만”은 분명한 약속이다. 이것은 이제 주님의 주시고, 주시지 않고 할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받고 누리기만 하면 될 이미 주어진 약속이다.
주여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향해 하늘의 사람들로 변화를 받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이 필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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