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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2:6~16 2007-02-1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절대적인 원칙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시는 복음의 은혜와 그 은혜를 거절하면 더 이상 방법이 없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접근시키려는 바울 사도의 구원의 논리는 이 부분에서는 좀더 일반적인 논리를 전개하는데 결국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마련하신 구원의 부름에 거절한다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 유대인이나 선택된 이스라엘 외의 모든 이방인들의 대표격님 헬라 인이건 다르지 않다는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비록 이 땅에 완전한 구원의 약속인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메시아를 보내시기 위한 도구로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지만 그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서 뽑힌 유대인들에게만 특권을 베푸신다면 하나님의 공의성은 의심 받을 수밖에 없고 마지막 의의 심판을 베푸실 수 없을 것이다.

결코 어떤 민족에게서 났기 때문에나 특별한 가문의 혈통에게 복음을 적용하지 않고 천국행 무사 통과를 시킨다면 하나님은 결코 의로우신 재판장이실 수 없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은 편견 없는 심판의 약속뿐만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도 공평성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헬라인이 믿지 않기 때문에 형벌하신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유대인들도 불신으로는 구원 받을 방법이 없고, 유대인이 그 조상 아브라함처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라는 동일한 믿음으로 약속에 들어간다면 헬라인도 동일한 믿음을 가질 때 역시 같은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의 당연한 언약이다.

특이 오늘 읽은 이 부분에서는 믿음을 강조한다고 하는 이 로마서에서 [행한 대로, 행하여, 행하는, 행할 때, 행위를 등등]의 우리말로 6, 7, 9, 10, 13, 14, 15절에서 나타나 특이한 모습을 본다. 13절의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라는 내용은 야고보서 2장에 버금가는 표현이다.



Ⅰ.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시다.(6, 11, 1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 하시되,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①하나님은 각 사람을 대상하신다.(6f)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 하시되”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사람을 상대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1:1로 관계하신다. 어떤 무리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면 그 무리에 속한 사람은 무조건으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구원에 관한한은 “각 사람”으로 상대하신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불러낸 “교회”라는 기관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이렇게 각 사람이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서로 격려하고 권면하며 전도와 선한 일을 힘을 모아서 함께 한다고 하는 것 때문에 택하신 기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등록서를 제출하면 그것으로 완전히 끝 난 것이 아니다. 교회에 더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구로 행하시는 것으로 “…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간판만 바르면 그 간판아래 있는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봐주시지 않으신다. 간판도 중요하지만 그 이름 아래에서 역시 각 사람의 믿음의 행위를 따라 보응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육신으로 와 계실 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말씀하신 속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은 모든 권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음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롬13:4m)고 경고한다.

법을 어겼으면 두려워 하고 그 응분의 대가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데 악을 행했어도 형벌에서는 빠지고 싶은 것이 간악한 사람의 마음이다.

②하나님은 그 행한 대로 보응 하신다.(6b)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 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못 보시는 것이 없으시다. 어둠 속에서 행한 것도 다른 사람 몰래 행한 것들도 낯 낯이 다 보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앉아 있는 모습과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보시는 분이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죄가 관영 한 이 땅에서 의를 행하는 데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고 고난을 감수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의를 행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그의 백성을 보고 계신다. 사람은 몰라줘도 주님은 알고 계신다. 전도자가 몰라줘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2:19)고 권면하고 있다.

③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11) 하나님 앞에는 치장이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는 내시경이 필요치 않으신 분이시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신10:17) 라고 모세는 경계 하였고,

베드로는 “…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라고 고넬료 가정의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시치미를 떼도 별 수가 없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16)

비록 범죄 한 세상은 그렇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조건이나 외모나 치장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행위를 보시는 분이다. 이 말씀은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계속된다.



Ⅱ.조건에 관계없이 선과 악을 행하는 자에게 그대로 갚으신다.(7~10)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사람은 조건에 관계없이 결과만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에 공평하지 못하다. 세상에서는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가장 가까이는 수능(대학수학능력평가시험)만 해도 그렇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과외라는 특별한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지만 그 과정은 무시된 체로 맞은 점수만으로 결론지어 버린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

우리 주님은 前後左右를 모두 가지고 평가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억울하면 우리 주님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의 형편을 이해해 주지 못하고 눈물을 닦아 주지 않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우리 모든 인생의 시련과 고통을 몸소 체험하신 분이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8) 하나님은 비록 죄가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행하려고 고난 당하는 자기 백성을 도우실 뿐 아니라 최종적으로 상주실 것이다.

1.죄악의 조건에 관계없이 선을 행하는 사람은 영생으로 갚으시는 하나님.(7, 10)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7) 했는데 여기 善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상대적인 선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절대적인 선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렇게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참는 것이 중요한데 [참고, 헬, 휘포모네(hypomone), (즐거운, 혹은 희망찬) 인내, 지속, 견딤] 어떤 압력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주님의 사랑 때문에 견디고, 다시 이땅에 자신을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재림하실 주님의 약속 때문에 기쁨으로 견디는 신앙의 모습이다.

사실 죄악이 더 득세하는 세상에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미래의 영원한 천국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에서 어리석게 보이는 하나님의 속성인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세상의 거쳐가는 것들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장차 올 영원한 나라의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자들에게 처소를 예비하러 하늘로 가셨던 주님은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반드시 다시 오시는데 그 대상이 믿는 가문인 유대인 뿐만 아니라 본래 불신의 이방인들인 헬라인들에게도 차별 없이 약속되고 있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11)

마찬가지로

2.불의를 좇는 자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환난과 곤고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8~9)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여기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로 갚으실 대상은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하였는데 세상이나 정치세계나 당쟁 싸움이 가장 심각하고 흔한 병패이다. 영적 세계의 당쟁 싸움도 그 원인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들에게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교훈이다.

한가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오늘의 사람들은 진리보다 “재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최후에 심판의 자리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겠지만 그때는 너무 늦은 것이다.

진리를 좇아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졸렬한 싸움을 좋아하지 않으며 휘말릴 염려가 없는 이유는 진리의 인격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마음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진리의 사람들을 향하여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고 확인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외면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의 영혼[각 사람의 영에게]은 유대인이 되었던지 헬라인이 되었던지 환난과 곤고가 있을 뿐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2:13, 24:51, 25:30]

믿음으로 말씀의 약속에 행하는 자들이 특정한 사람들의 무리만이 아닌 것처럼 유대인이든지 대한민국 인이든 진리를 순종치 않고 편가름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형벌도 필연적이다.

다만 감사한 것은 역시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죄로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들이지만 강제적으로 형벌에 밀어넣지 않으시고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이다.



Ⅲ.심판의 기준.(12~15)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의로우시며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애매하지 않으시며 또 우리가 혼란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신 것을 절대로 번복하시거나 하지 않으셨다고 시치미 떼시는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택하신 이스라엘의 또 다른 표현인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히브리인, 이스라엘, 유대인) 이방인에게도 불의 한 심판을 절대로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우리는 결과적인 것들을 마치 원인처럼 말하기 때문에 오해를 일으키는 신앙적 논리들을 더러 본다. 전도를 하면서도 쉽게 복음을 접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쉽게 정죄하는 것 때문에 그들이 귀를 열고 생명의 복음을 듣는 것조차 거절해 버리는 상황들을 더러 만드는데 대단히 주의해야 할 자세이다.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현재의 과제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와 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온 인류가 살 수 있는 진리인 복음을 들려 주는 것이 대상에 관계없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주님을 모른 체로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정죄와 판단으로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지 조심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이 분명히 창조주요 구세주로서의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신 분임에 분명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판단하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1.하나님의 판단기준.(12~13)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주님께서 율법을 주신 유대인들은 그 주신 율법을 가지고 판단하실 것이지만 아직 문서로 받은 율법을 모르는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또 다른 정의의 기준을 적용하실 것인데 그러한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것 또한 믿음의 논리를 제공하는 이 로마서에서만 읽을 수 있는 교훈이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12) [범죄한, 헬, 하마르타노(hamartano), 과녁을 맞추지 못하다.] 뒤에 가서 지적되겠지만 율법을 받았다는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기준에 이르지 못하고 이방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의 노력과 애쓰는 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인류는 죄인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마련하신 구원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의의기준을 만족시켜드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참된 의지와 요구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신 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이었지만 유대인들이 알고도 행치 않으므로 서 알지 못함만 못하게 되었다는 증거를 바울은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1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분명히 첫째이지만 여기에서 끝내 버린다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지를 거절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그 들은 바 율법을 순종으로 행하는 단계로 가야만 한다.

우리 주님께서도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하셨고 야고보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고 경계 하였다. 듣고 행치 않는 것은 먼저 는 하나님을 속이고 둘째로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는 증거이다.

아무리 귀한 하나님의 약속도 불순종하여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 가치도 이룰 수 없다. 듣고 순종하고 행하는 자가 귀한 생명을 누린다.

2.이방인의 율법.(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 역사 속의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절대적인 원칙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신구약시대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이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9:15) 그러나 역시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지 못했다고 하는 부분에서는 인간으로서 판단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는 부분도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앞에서도 다루었듯이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후에 재림을 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속한다. 전혀 하나님의 진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을 따라 최선의 삶을 살았다면 그 양심이 그에게는 율법이 된다는 교훈을 바울은 말하고 있지만, 만약에 이런 양심의 법으로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의 제사가 구태여 필요치 않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물론 어렵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복음을 들었는데도 거절하는 사람들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줄기찬 가르침이고, 완전한 새 언약의 진리가 이 인류에게 전파되기까지의 진리의 사각지대에서 인생을 살다가 간 사람들의 평가는 우리가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경계이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과제이다. 따라서 정죄보다는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권면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들의 영역 밖의 일이나 평가는 주님의 주권에 맡겨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권한이다.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로 의로우시다.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인 유대인이기 때문에 불신도 용납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며 이방인들은 믿고 순종해도 택한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버림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큰 감사를 갖는다.

만약에 주님께서 그런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여기 오늘 예배 드리는 우리 모두는 헛된 종교행위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러한 편견의 벽을 허무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편견의 벽을 허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욱 감사하고 십자에 피 흘림으로 찾아 주신 이 엄청난 권리를 썩히지 않도록 먼저는 자신이 말씀 속에 살고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우리 나라 밖이든지 우리 문화권 안에서든지 전하는 권리를 썩히지 말고 생명을 주는 자로 사는 우리 교회와 여러분 모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