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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전 3:1~9 2006-09-17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우리는 식물을 심어 놓고 그것이 자라지 않을 때 안타까워 한다. 마지막이 가까워 올수록 마귀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서 온 갓 모략과 술수를 다 동원 할 것이다.

그만큼 신앙의 성장은 어려우면서 귀중함을 의미하고 주님께서도 성장하지 못하여 결실하지 못하는 거듭나지 못한 회개지 못한 신앙의 모습을 경계하시는 비유를 들려주고 계신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13:6~9)

사람은 여러 종류의 무리를 형성하고 교회라는 기관도 그렇다. 큰 유치원 같을 수도 있고 소수의 특수 부대의 모습일 수도 있다. 고린도 교회는 그 많은 은사들을 가졌다고 하면서 사실 젖 먹는 유치원과 다르지 않았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가? 물론 각자의 상태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환경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입장에서도 어린아이와 같을 수도 있다. 실재로 환경이 어둡고 열악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마음의 눈이 유치하고 어두우면 그의 눈에는 어느 것도 바르게 보일 수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6:22~23) 자신의 가진 마음의 상태나 수준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유치한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지적하면서 오늘 우리의 믿음이 장성해야 함을 경계 해 주고 있는 말씀이다. 사실 어린아이 같이 유치한 사람들은 그 수가 얼마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도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나라에나 이웃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보살핌만을 필요로 한다. 물론 처음 믿음생활을 시작할 때야 당연히 보살피고 돌봐야 하겠지만 시간을 지나면서 자라서 나중에는 과거의 자신과 같았던 어린 심령들을 보살피는 믿음에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16:13) 이 말씀도 요즘의 세태에서는 논쟁의 소지를 들을만한 표현이다. 그러나 일세기의 이 표현이 쓰여진 배경은 전쟁에 선두를 맹렬히 종횡무진하며 싸우는 두려움을 모르는 장성한 병사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사람이나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이변이 없는 한 시간이 지나면서 장성하게 되고 도움을 받는 데서 도움을 주는 대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창조의 이치요 자연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유독 가장 강한 생명의 능력을 가진다고 하는 신앙은 자라는 것이 어렵고, 이미 말했던 대로 알곡이 심어진 밭에 가라지를 몰래 덧뿌리는(마13:24~30) 원수 마귀의 간교한 활동으로 인하여 가라지에 치어 알곡이 자라는 것이 힘겨움을 보는 것이다.



Ⅰ.어린아이 같이 유치한 신앙은 소모적이다.(1~2)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젖먹이 같이 자라지 못한 신앙의 상태를 바울은 먼저 지적하고 있는데 그런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을 어린 아이에 비유하는 것은 너무나 적절하다.

1.함부로 대할 수 없다.

일단 어린아이는 대하는 것에 조심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먼저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데 [신령한, 헬, 프뉴마티코스(pneumatikos), spiritual, 육체적인 것에 반대되는, 영적인, 초자연적, 중생한] 등등을 의미하는 하늘에 속한 의미이다.

바울 사도는 바로 앞에서 고린도 교우들을 향하여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13) 했는데 하늘의 가치는 하늘의 논리로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가르침이다.

신앙에 장성한 자는 마치 건강한 소를 부림 같이 좀 바쁘게 힘겹게 몰아도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소를 쟁기를 끄는 훈련을 시키면 뒷걸음을 치고 뛰고 난리를 부리지만 오랫동안 쟁기를 끌기에 익숙한 소는 일을 많이 시켜서 멍에 집이 짓물러도 꾸준히 묵묵히 쟁기를 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우물가에만 둬도 걱정이 되고 다칠까 신경을 쓰게 된다. 그래서 어린 아이는 늘 소비하기만 하지 생산이 되지 않는다.

2.힘을 낼만한 단단한 식물을 소화해 내질 못한다.(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거친 식물을 소화할 수 있어야 힘을 내고 건강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거칠거나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을 곧바로 뱉어내 버린다. 오로지 달고 부드러운 음식, 자기가 좋아 하는 음식만 받아 넘긴다. 우리 대한 민국 교회의 강단의 영적인 음식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식으로만 일관된 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3.반드시 시간이 경과 되었다고 자라지는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2~14)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고 권면하고 있다.

시간이 경과 됨에도 자라지 못한다면 거기는 반드시 비 정상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가장 우려하는 것이 질병이나 장애이다.

장성한 소는 새끼를 낳고 젖을 내는 것처럼 장성한 신앙은 늘 생산을 하지만 유치한 신앙은 비 생산적이고 소비만 하게 되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사람들로만 모여 있다면 수가 아무리 많아도 신령한 것을 생산할 수 없다.



Ⅱ.유치한 믿음은 육신에 속하면서 사람을 따라 행한다.(1b, 3~5)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상태는 소비적일 뿐이라고 했지만 장성하지 못한 신앙은 늘 그 기준이 육신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것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고 했다.

어린 아이들의 특징은 언제나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에게 표면적으로 고통을 주는 대상에게는 역시 같은 고통으로 되 갚으려는 본능적인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자들에게도 은혜를 잊지 않는다. 사실 세상의 도덕적인 기준이 이런 것이다.

그것이 물질적이든지 정신적이든지,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지 주는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인 장성함은 육신적인 가치를 따라 판단하거나 갚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기준이었다면 절대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고 권면하고 있다.

유치한 믿음의 또 다른 모습은 자신이 유명인사를 추종한다거나 안다고 하는 것이 대단한 자랑거리이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4) 했는데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입장에서 당시 소아시아나 유럽에서 대단한 인물임에 분명했고 아볼로는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행18:24)는 평가를 받는 것으로 봐서 역시 바울에 뒤지지 않는 인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유명하다는 사람하고 악수만 해도 그 손을 씻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필로 쓴 싸인이라는 것 조차도 보물을 모시듯 한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의 삶으로 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위대하다는 스승을 들먹이면서도 영적이지 못하면 오히려 그러한 스승의 이름에 욕을 끼칠 수도 있는데 오늘 바울이 지적하는 고린도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에게 속했다고 큰소리 치는 이들을 편들거나 칭찬하지 않는다.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믿는다는 너희들도 세속적인 사람과 같지 않느냐’는 탄식이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결국 ‘아무리 훌륭한 따르는 스승이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러한 사람들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들이 아니냐’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은혜로 이해하고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그런 자세가 바로 남자답게 강건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조건도 자랑의 대상이 아니라 은혜요 감사의 이유일 뿐이라는 것이다.

육신에 속하여 사람과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는 모습은 어린 아이 같은 유치한 신앙의 일면일 분이다.



Ⅲ.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을 힘입어야 한다.(6~9)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것들은 이러한 유치한 모습을 벗고 성숙한 신앙의 사람들이 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심지어는 견디기 힘든 고통과 눈물조차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어야 믿음은 자란다.

심는 것의 목적도 물을 주는 이유도 오직 한가지다. 무엇인가? “자라나게 하시려고” 교회의 직분을 주신 것도 은혜를 주시는 것도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4:13~14)

다만 성장은 사람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6~7) 이래서 신앙의 성장은 사람들 즉, 하나님의 일꾼들의 도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심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그만큼 원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9) 하나님의 밭에서 무엇이 생산되겠는가? 하나님의 집은 또 무엇인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의 육체의 약함을 고백했던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전6:12)는 말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유익도 아니며 그것이 결국 자신을 얽어 매는 올무가 되지 않도록 육신적인 일을 자제하고 조절하는 고백을 듣는다.

이제 그의 역할은 단지 하나님께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하늘의 사람으로 장성 시키는 도구로 쓰임 받기를 다만 소망하고 있음을 본다. 그 바울의 기대는 오늘 같은 믿음의 고백으로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제 거듭났다고 하는 신앙 하는 사람들의 몸 자체가 자신의 것이 아니며 더 이상 유치한 육체적인 노예의 모습으로 살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는 권면을 주고 있다.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이 오늘 우리 서면 공동체에게도 유효하게 해야 한다. 과거에 어떤 초라한 신앙의 모습이었을지라도 지금까지 그러한 모습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비극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3~6)

이러한 분명한 목표를 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나님을 향해 자라야 한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골2:20) 아직도 확신이 없는 육체의 일과 모습에 여전히 종 노릇 한다면 그것은 과거로도 충분하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벧전4:3)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소모전은 중단되어야만 한다. 육신을 따라 사람을 자랑하는 초라함은 지난 시간으로 충분하다. 주님은 그만큼 우리의 신앙의 성장을 갈망하신다.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을 힘입어 주신 사람들을 통하여 환경적인 것들을 의지하여 반드시 자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