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골 2:8~15 2006-08-28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바울은 이 골로새서의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위치와 구원의 역사를 선언하고 자신은 바로 그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는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이러한 수고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신앙적 논리들이 헬라의 철학으로부터, 또는 유대교로부터 복음으로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을 속이고 들어와 진리를 따르려는 성도들을 흔들고 혼란케 할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우리의 진정한 삶의 목표가 영광과 영원의 하늘에 있음을 이해 시키려고 애쓴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6~7)고 당부하고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같은 유혹들이 십자가의 구원의 방법을 대체하고 하늘의 영원한 영광이 아닌 이 땅에 우리를 안주 시키려는 유혹들이 있을 수 있음을 경계로 교훈 해 주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귀중한 구속의 십자가의 구원을 감격하고 다른 어떤 그럴싸한 방법이나 감정이나 목표를 단호히 믿음 속에서 추방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오늘도 십자로 승리를 부르짖으면서도 너무나 인간적이고 감정적이고 세상적인 방법들이 우리의 신앙과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자리를 너무나 많이 먹어 들어오고 있는 것들을 보면서 같은 경계를 갖게 된다.

우리가 분명히 구분해야 할 것은 진리가 아닌 것들을 배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냉정해야 하고 그러한 거짓과의 싸움 속에서의 차가움은 인간적인 관계에서의 냉정함으로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고 우리가 사랑을 실천한답시고 거짓까지도 수용해 주는 아량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때로 마귀들은 우리가 거짓을 배격하는 것들을 사랑이 없다고 비아냥거리며 낙심 시키고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모습이냐?’고 비웃으면서 인간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거짓이 아닌 관계에 까지도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들을 조심해야 하고 이런 입장에서 십자가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자녀로서의 분명한 구별을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들까지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천하를 휘졌고 다니는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고 그 마귀의 간교한 부추김에 놀아나는 가련한 영혼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불러들이는데 보다 사랑과 지혜로 감당하는 …



Ⅰ.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고 경계한다.(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우리는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첫번째로 주님께 책망을 받은 에베소 교회처럼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을 행하다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책망을 듣는 부분을 읽게 되는 것처럼 거짓을 드러내는 것과 사랑의 실천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반대로 두아디라 교회처럼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2:19) 라고 칭찬하셨지만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2:20) 라는 거짓과 죄에 대한 관용도 역시 마지막 때에 책망의 대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혼란에서 자유 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입장에서도 십자가가 기준이 된다는 사실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죄인들을 향한 철저한 사랑이면서 죄인들을 향한 철저한 지노라는 사실이다. 즉, 사랑과 공의의 철저한 실천이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1세기 때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가졌던 철학이라는 것은 지금도 다수의 사람들에게 매력의 대상이기도 하고 학문의 토대이면서 귀를 즐겁게 해주는 수준 높은 도구이다. 그럼에도 철학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제공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타난 것이며 인간 이성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진정한 지혜 영원히 살게 하는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시111: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고 이 인류에서 최고의 지혜자였던 솔로몬이 고백하고 있다.

철학의 시대에 살았던 바울조차도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0~21)라고 말하면서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고 고백한다.

이런 입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철학에게 속임을 받아 종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은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는 것이다. 참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이 때나 그 때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적당히 변조해서 사람들을 진리에 거하지 못하도록 속이는 것이다. 성경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을 들먹인다고 다 진리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구원을 위한 명령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가르치고 순종하는 것이 진리이다. 진리는 참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지만 듣기 좋은 것만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행복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시는데 마지막 시대에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는 경계를 바울은 주고 있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0~12)

진리처럼 위장하고 속이는 것을 가리켜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우리는 어떤 경우 성경말씀보다 유전을 더 중요시하고 구원의 진리보다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치한 것들을 더 선호하는 아담이후의 죄성을 우리 자신들 속에서 발견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구원은 단순히 이 땅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약속보다는 너무 이 땅에 애착을 많이 갖고 있을 때가 많고 이 땅에서 만의 형통에 너무 비중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세상의 것들과 유전보다는 그리스도를 좇아야 한다.

세상이 좋아 하는 것들보다는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은 불사르기 위하여 예비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7) 십자로 통한 구원은 이 멸망할 세상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다. 믿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과 어두움에 노략질을 당하고 잡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인 동시에 당사자들에게도 치명적이므로 생각과 기분에 좋은 것 보다는 진리에 충실하는 모두가 …



Ⅱ.우리를 진정으로 넘치도록 채우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9~10)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은 이 옥중서신 중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라든가 여기의 표현처럼 “그 안에서”처럼 쓰이는 표현이 대단히 흔하게 사용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표현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확실한 보호처소요 풍요의 처소요, 행복과 만족의 장소이다.

어떤 것에 둘러싸여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둘러싼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대단히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사실 바울처럼 감옥에 그것도 억울하게 갇혀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원망스럽고 답답하고 힘겨울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바울은 육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보다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러 가지에 둘러싸일 수 있다. 세상과 사람들과 철망과 담장과 三水甲山이란 표현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4:8) 라는 고백을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어떤 입장에 갇혀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목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보호의 우리 속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고 말씀 하심으로써 우리의 보호의 울타리가 되심을 말씀하셨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9) 주님께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육의 모든 것들로 충만해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자람에서가 아니라 충만하고 넘치는 것에서 채우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님의 충만 속에 거하는 사람들의 고백이 바로 시편23편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1~6)

다윗의 이 고백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확신 시키는 고백의 시이다. “그 안에서” 라는 의미는 보이는 테두리가 아니라 언약의 테두리며 계명의 굴레이다.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사람에 따라서는 굴레로 느껴질 수도 있고 안전한 보호의 품안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가두어 두는 답답함으로 느껴지는가? 아니면 안전한 보호의 따스한 품 속으로 느껴지는가? 이것이 또한 오늘 나의 신앙의 상태를 점검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478:1.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편안히 쉬리로다. 2.주 날개 밑 나의 피난처 되니 거기서 쉬기를 원하노라, 세상이 나를 못 위로해 주나 거기서 평화를 누리리라. 3.주 날개 밑 참된 기쁨이 있네 고달픈 세상 길 가는 동안, 나 거기 숨어 돌보심을 받고 영원한 안식을 얻으리라

(후렴)주 날개 밑 즐거워라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10) 했는데 여기 [충만, 헬, 플레로오(pleroo), 가득차게 하다, 꽉 채우다, 만족하다, 성취하다, 완성하다]는 의미에서 더할 데 없는 만족을 의미한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라고 고백한다.

오늘 나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라면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 관계없이 만족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조건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다.



Ⅲ.귀한 하나님의 약속은 거듭난 자들에게만 유효하다.(11~12)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구약의 약속, 가나안에 거할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은 난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자들에게만 가능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워진 언약 속에서는 손으로 육신에 행한 할례가 아니라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믿음의 최종적인 순종으로 복음을 듣고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세상을 향해 가던 길을 돌이켜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남이 유일하신 살아계신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많은 물속에 자신을 장사 지냄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일체가 되고 물에서 올라옴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일체가 되는 귀한 구원의 약속을 순종함으로 거듭난 자만이 십자가의 약속이 효과를 나타내게 된다.

이렇게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한 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의 선물을 주심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11b)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 더러의 사람들이 ‘믿음’ 만을 강조하고 세례는 외형적인 의식이기 때문에 받아도 되고 안받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약속을 약화시키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최후의 명령으로 왜 세례를 명령하시고(마28:19) 구원의 구체적인 사례들인 사도행전 속에서 구원 받은 사람들 중에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음을 볼 때도 분명하다.

심지어는 기도와 구제가 이미 하나님께 상달 되었다고 천사가 증거하는 고넬료도 구원 얻을 말씀 전할 베드로를 보내시고[행11: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세례를 받게 하셨을까? 구원의 역사들에는 반드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실천되고 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12) 인생의 진정한 만족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다른 모든 조건이 불만일지라도 넘치는 만족으로 기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믿습니까?



Ⅳ.승리의 비결은 십자가에만 있다.(13~15)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육신의 요구대로 산다면 당연히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밖의 무할례자들, 이미 범죄로 인하여 죽어있는 우리의 영원한 저주를 해결하신 은혜의 역사를 주님의 십자가로 이루셨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엡2:12~13)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죄를 낱낱이 지적하고 있는 심판의 문서인 율법조차도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아 흔적도 없이 도말 해버리신 그 능력이 바로 십자가였다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정죄의 문서인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 이기 때문에 이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도 십자가 일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참소하는 어두움의 권세자들의 정죄의 권세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감히 정죄할 수 없게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의 절망은 십자가로만 해결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것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것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 4~5) 라고 바울은 확인해 주고 있다.

십자가만이 승리의 비결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4~35)

①자신을 부정해야 질 수 있는 것이 십자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자기부인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이미 이루어져야 한다.

②죽어야 이기는 원리이다. 다른 말로 희생이다. 승리하기 위해서 죽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요10:18f)고 선언 하셨다.

③말로 지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만 질 수 있다. 십자가로 승리란 앉아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인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는 말씀을 자주 인용하고 의식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공식적인 예배에만 적용하고 삶 속에서는 전혀 의식치 않는 것을 본다.

진리를 듣고 즐거워 하고 아멘 하는 것 좋지만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사실 이런 것은 시키고 강요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 라는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로마서12:1은 사실 마태복음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이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은 세상에서 구별된 보습이다.

④육신적으로는 분명한 고난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이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다.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고독과 목마름이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치 않는 것일지라도 주님께서 명령하시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주님의 명령이 곧 영생이기 때문에 억지로 힘겹게 가 아니라 감사로 행하는 것이다.

⑤순종의 최종적인 자세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주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이것은 어두움과 저주의 싸움을 이미 싸워 이겨 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적인 것들과 죄와 거짓에서 이기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승리의 비결로 주신 십자가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하였고 히브리서 기자도 같은 당부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서”(히13: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