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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일 2:15~17 2006-08-07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말씀은 죄가 들어온 세상 속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금석과 같은 말씀이고 영원과 순간에서 갈등 할 수 있는 믿음의 방향을 바로 보여주는 귀중한 이정표가 된다.

로마서는 육신과 영혼을 비교하면서 영적인 삶과 육적인 삶을 대비시킨다면 요한은 신앙의 사람들에게 있어 주로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갈등을 비교하는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다. 본래 이러한 혼란의 관계는 이미 에덴 동산에서 있었고 하와는 결국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사탄의 부추김과 함께 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엄청난 실수를 범하게 되고 결국 그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온 인류에 죄의 어두움이 들어오고 온 갓 기대하지 않았던 비극들이 행복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고 말았다. 여태껏 별로 관심도 갖지 않았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사탄의 거짓말을 듣고 볼 때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범죄하기 이전의 사람은 모두 영원한 존재였지만 하나님의 첫 언약이 깨어진 후의 사람의 구조는 그 만들어진 특성대로 두 가지로 확실히 구분되게 되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신 혼이 그것으로 소멸해서 없어지는 부분과 영원히 소멸될 수 없는 영혼이 그것이다. 이 둘은 創造主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역시 두 가지의 운명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죄의 저주를 친히 자신의 독생자를 대속 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한다면 육신은 영원한 존재로 영광을 입게 되고 육신 즉 세상적인 부분을 선택한다면 죽을 수 없는 영혼은 영원한 형벌에 들어갈 수 밖에 없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간격에서 육신은 보이는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산다면 영혼은 영원에 가치를 두고 싸우는 삶을 각자의 삶 속에서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싸움에서 어디에 이기고 지느냐 하는 것이 영원과 관련된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관건이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늘 세상의 가치가 아닌 믿음의 말씀, 불변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속에 삶의 절대적 가치를 두고 늘 우리의 영혼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려고 유혹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Ⅰ.믿음의 사람들을 향한 경계…(15f, 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말씀에 헌신하던 사람들도 짐짓 그 사랑의 방향을 세상으로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딤후4:10f)

신앙 하는 우리들이지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15f) 이 말씀이 기쁘게 들리는가? 육신의 발을 이 땅에 디디고 사는 우리들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너무나 가깝고 좋게만 보여지는데 주님은 사랑치 말란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사람들이 똑똑한 것 같지만 사실 단순해서 지혜롭게 처신한다는 것이 힘들고 이 세상을 기쁘게 하려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고, 주님 사랑하며 살려고 하면 세상은 사랑할 수 없는, 두 곳에 조차도 다 충실 할 수 없는 존재다. 요즘 사람이 만든 컴퓨터조차도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고 있지만 사실 이런 면에서 사람이 기계보다 못하다.

그래서 바울 조차도 신령한 예배의 삶을 살기 위해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는 당부를 주고 있고, 주님의 혈육의 형제였던 야고보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고 당부한다. 다시4:4에서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세상의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면 세상을 사랑하게 될 때야 얼마나 더 큰 위험의 요소가 되겠는가?

본래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 창조된 모든 것은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것이었지만[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1:31f]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로 세상은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이 세상을 포기할 수 없는 구원의 대상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대상이고 비록 범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의 수하에 있기 때문에 절대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빛에 나아올 수 없는 존재들이고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제물 삼으면서 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치 말라는 대상은 바로 죄와 연결된 어두움의 유혹의 도구들이고 우리가 그것을 이길 힘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치 말라는 경고를 주고 있는 것이다.

1.가치관의 혼선. 왜 1세기 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는 당부가 계속 주어지고 있는가? 결국 사람은 자신의 가치에 따라 어떤 것은 사랑하고 어떤 것은 미워하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상, 귀중하게 여기는 대상에게 모든 것이 쏠리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하늘의 사람들에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1~3)는 당부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조차도 여전히 혼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20)는 주님의 직접적인 당부에도 불구하고 오늘 대부분의 신앙의 사람들조차 오히려 하늘의 능력을 빌어서 이 땅에 더 귀한 것들을 쌓으려는 모습이 더 일반적이다. 사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늘의 영원을 사모한다고 입술로는 말하면서도 마음은 그 고백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 사실이다.

결국 보이는 것은 육신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이 육신의 만족과 기쁨은 늘 순간적이고 지속되지 못한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결국 주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16)고 사랑치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육신이 기뻐하는 것, 눈에 보기에 좋은 것, 자신을 높이려는 것들은 하나님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좇아 온 것들이기 때문에 영원에 장애물이 되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서운하게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말라는 당부를 주고 있다. 사실 사랑을 다 주고 내가 상하고 손해 본다면 그런 사랑을 누가 권하겠는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이고 결국 영원과 연결된 영혼이 만족하지 못하면 진정한 민족이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는 당부는 하나님께서 결코 시샘을 해서이거나 질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 전혀 우리를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존재인 너희들은 결코 유한한 세상의 어떤 것들로도 만족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러한 것들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그러한 것들에 마음을 두고 살다가 그것들이 불탈 때 너희의 기대와 바람이 함께 불탈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말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시기로 들리는 사람은 문제다.

2.가치관이 만들어지는 과정.

사람이 자라면서 환경과 교육이라는 두 가지 조건에서 가치관은 만들어지고 이런 사회 구성원들의 환경과 교육이 오랜 세원을 거치면서 문화라고 하는 독특한 환경을 조성해 가게 된다. 자녀들이 무엇과 자주 접촉을 하고 영향을 받는가 하는 것은 바로 다음 세대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이유에서 우리의 교육과 환경은 기성 세대를 키워가고 만들어 가는 입장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가치관이 성립되지 않은 믿음의 가정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치관 속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이것은 적어도 믿음의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가장 첫째가는 의무이다. 사회의 필요한 일원으로 키우는 것 보다 더 우선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무이다. 만약에 이것에 실패한다면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일주일의 자는 시간 이외에는 대부분을 세상과 지내는 자녀들의 가치관이 요즘 흐르는 세상적 성향에 익숙해지고 그런 것들이 결국 가치로 굳어지게 된다면 대단히 우려되는 상황이다. 우리가 자녀들로 하여금 수시로 주님과 대면하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하면 다음 세대의 우리의 가정과 교회는 세상이 차지하고 말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전에 그래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윤리와 도덕이 제대로 서 있을 때에는 그런대로 신앙의 교육도 괜찮았었다. 요즘에는 학교나 학원의 수업 시간이 아니면 주로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걱정스럽다. 많은 사람들은 ‘뭐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있느냐? 그래도 잘 될 것이다.’ 라는 말들을 쉽게 하고 있는데 신앙의 교육을 철저히 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염려할 것은 없지만 그런 확신이나 열심도 없는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자녀들을 세상에 방치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안타깝다.

사람은 가만 두면 절대로 건설적인 방향으로 만들어 지지 않고 신앙은 더욱이 그렇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 자녀들과 교회에 대한 책임은 적어도 다음 세대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입장에서 마음을 쓸 필요가 있다.

자녀들이 사회에서는 그럴싸한데 결국 하나님과 관련 없는 세상의 가치관으로만 굳어져서 신앙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세상의 사람으로 남기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슨 면목으로 주님을 뵐 수 있을 것인가!

3.가치관을 지켜감.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 교회를 나다니고 예배를 드리는 것들이 일생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살아가야 하고 이러한 믿음을 자손들에게 계속적으로 물려주기 위한 당부는 성경에서도 그만큼 강력하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4~9)

적어도 이 명령은 믿음의 가정들에 선택의 항목이 아니라 기본이다. 경건한 일꾼인 디모데는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어려서부터 성경과 더불어 신앙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우리의 신앙적 가치관을 다음 세대에 끼치지 못한다면 아무리 재산과 재능과 학식을 물려준다고 해도 영원에서 자녀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믿음의 가정들이 신앙은 혹독할 정도로 훈련시키는 것이 자신과 다음 세대를 하나님으로부터 보장 받는 영적인 가치관을 지켜가는 방법일 것이다.



Ⅱ.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15b)

“…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 말씀도 상대적으로 들린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하기를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고 했다. 모두에게 사랑을 입는 것은 대단히 귀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사랑 받는 존재로 살 때 이 세상과 영원 속에서 귀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전혀 사랑치 않는 엘리 제사장의 자녀들에 대한 경고를 주시면서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b)는 약속을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것은 영원한 운명과 관련되고 이미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을 우리가 응답하는 사랑이 없다면 그 엄청난 사랑도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실 때 직접 말씀 하셨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때 무엇보다도 그의 말을 기쁘게 잘 듣고 그의 말을 어기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도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배려하는 자세가 첫째일 것이다. 만약에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 계속 사랑하노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 대상이 싫어하는 것들을 골라서 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는 방법역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행동을 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세상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 속에 절대로 있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신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세상과 하나님, 그리고 이 세상과 영원을 같이 가지려고 욕심을 부린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앞에서도 말한바 있지만 절대로 많은 대상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주님께서 비유하시기를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여기서 재물은 당연히 세상이 될 것이다.

또 주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세상으로부터는 미움을 받을 것임을 이 세상에 계실 때 마태복음10:22에서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막13:13) 하셨고 다시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24:9)

어두움에 사는 사람들이 빛을 좋아 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어두움의 일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미움을 각오하면서 그런 삶을 산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을 것이라는 귀한 약속이다.

이런 이유에서 구원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늘 “둘 중에 택하라!”고 요구하셨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여호수아를 통하여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바알 우상에 빠져있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왕상18:21)고 요구하는 것을 듣게 되고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요구를 하실 것이다.

최소한 그리스도인 이라면 하늘을 목표하고 사는 사람들이고 이런 가치로 사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세상의 것으로 영원히 행복하거나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로 남아야 한다. 그러나 “…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는 경계의 말씀에 부끄럽지 않은 …



Ⅲ.영원 한 것 만이 영원할 수 있다.(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시샘 하시듯이 세상과 하나님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분리하실까? 그것은 결코 우리가 주님을 사랑치 않으면 사람처럼 고독하시거나 질투가 나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혀 우리를 위해서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아도 스스로 眞善美로 충만하셔서 결코 부족됨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당부는 역시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서다.

사람은 영원의 존재로 결코 동물과 그 밖의 피조물들과는 다르다. 그리고 사람은 영원과 운명을 육신에 사는 동안 선택이 가능하다. 영원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이 이 짧은 육신의 삶을 위하여 영원을 잃는다면 삼으로 불행한 운명이 될 것이다. 썩어져 없어질 세상의 것들에만 관심을 갖고 사는 자신의 백성들에 대해 안타까우셔서 이런 권고를 주고 계신 것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이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며 순간적인 것이다. 바울 사도는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7:31) 하였고 주님께서 같은 요한이 쓴 복음서 12:25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하심으로써 육신의 삶과 영원의 삶의 선택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세상에 속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지속적으로 가치를 가지는 것도 없다. 결국 하나님께서만 영원한 존재이시고 비록 범죄한 우리 인간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원으로 회복하시기 위해서 자신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원한 길을 열어 놓으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런 입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은 바울과 같아야 한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많은 세상의 것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세상은 거짓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과학도, 기술도, 의술도, 철학도, 지식도, 그러나 유한에서는 절대로 무한이 날 수 없으며 영원하신 하나님 만이 사람을 영원의 행복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이유는 그분이 바로 영원한 분이시요, 영원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6~17)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①주권. ②선택권. ③가치를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삶이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6: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