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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은 본문이 포함된 1~13 한 마당의 내용은 물론 믿음의 사람끼리 서로 용납하고 받아 줄 것을 당부하는 것이 전체적인 말씀의 요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6)는 말씀이 이 전체 내용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거듭난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방법이고 이유이다. 이런 분명한 목표를 갖고 살지 못할 때 신앙의 지조는 흔들리게 되고 함께 한다고 하면서도 사람들간에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또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목표를 고백하고 말하면서도 사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대 원칙이 입술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행동을 움직이고 관계를 움직이고 조직을 움직일 때 우리 사람들의 가치가 바로 되고, 희생의 십자가는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하늘의 사람들로 거듭나서 신령함을 맛보아 아는 사람들에게 가능할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영광을 앞세우는 “…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5)고 바울은 경계해 주고 있다.
또 이 절대적인 원칙이 지켜지고 행해질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신령한 평강이 이런 관계로 모인 교회의 모습을 비로소 주장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요11:40) 말씀처럼 진정한 믿음만이 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케 할 것이다.
이사야가 주님의 영광의 모습을 체험하고서야 비로소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었던 것처럼 (사6:1~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는 바른 소명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신앙의 절대적인 과제가 각개인의 삶에서와 교회 공동체 속에서 반드시 이루어지기 위해서 모두 이 바울의 권면에 마음과 생각을 집중했으면 한다.
Ⅰ.성경의 기록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4~5)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영광의 출발이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었는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이 내용이 가르치는 것은 두 가지의 이해가 가능하다. ‘무엇이든지’ 성경에 기록된 어떤 것이든지 모든 성경을 일컫는 표현이다. 성경 모두가, 신구약 어디든지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어떤 하나님의 말씀도 하늘의 사람들에게 필요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는 말씀에서도 이를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모세가 애급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어 가나안 건너편 요단강 동편에까지 왔음에도 결국 약속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하는데 이것은 오늘의 신앙의 지도자들에게 주어지는 분명한 경고의 교훈으로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성경의 기록을 보면 분명하다.
민수기 20장에 나타나는 ‘다툼’의 물이라고 하는 ‘므리바’ 물의 이유 때문이라는 것은 다 일관되게 말하면서도 그 나머지에서는 구구한 이론이 많다. ‘지팡이로 바위를 가르쳐 물을 내라 했는데 지팡이로 쳤기 때문이다.’ ‘한번 치라 했는데 두 번 쳤기 때문이다.’ 등등 이론들이 많다. 여기에 대한 가르침도 성경으로 돌아가보면 분명히 나타남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8) 하셨다.
그 다음은 모세와 아론의 행동이 기록되는데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의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9~11)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노기(怒氣)를 발하는 모세의 모습이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물을 내게 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였고 그 분감으로 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을 친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는 것이었고 반석을 두들기거나 가르치거나 다른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결국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평가를 듣는 것이 정답이다. 바로 이 사건 뒤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20:12)고 말씀하신다.
다시 민수기 27장에서 모세로 하여금 아바림 산에 올라 가나안 전경을 바라보게 하시면서 이 사실을 다시 한번 환기 시킨다.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제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민27:14)
그 다음에 다시 요단강 동편에 이르렀을 때도 같은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확인 시키신다.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라”(신32:51)
결론은 분명하다. 이스라엘 회중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영광)을 나타내지 않은 것이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지않은 결정적인 이유였음을 확인할 수 있고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제목과 더불어 생각할 때 모든 신앙의 지도자들이 가져야 하는 경계의 말씀이다.
모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평하시기를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라는 말씀은 결국 다른 말로 ‘나의 영광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영적인 지도자의 존재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것이 비록 분노할 수 있는 상황일지라도 주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해 줘야 한다는 경계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대신 분노했던 모세는 그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거절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런 말씀을 이해하는 저 자신도 두렵다.
오늘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라는 말씀은 이런 입장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이어지는 내용은 너무나 감사하다. 단순히 경계로서의 교훈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4b) 단지 두려움의 경계 뿐만 아니라 [인내, 헬, 휘포모네(hypomone)], [성경의 안위, 헬, 파라클레시스(paraklesis)]로 [소망, 헬, 엘피스(elpis), 기대, 혹은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고 증거 한다.
기록된 약속의 교훈만이 힘겨운 압력을 견딜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런 가운데서도 위로가 되고 소망의 등불을 끄지 않게 하는 능력이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5) 먼저 하나님께서 죄 투성이인 우리를 끊임없이 참아 주시고 위로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순종을 본받도록 기다리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세가 될 때 비로소 뜻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바탕이요 기초다.
하나님의 기록된 모든 말씀으로 인하여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구체적인 경계를 삼아 이 불합리한 세상의 온 갓 압력과 스트레스를 이길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소망을 더욱 견고히 가지게 되 것이다.
Ⅱ.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당부한다.(6~7)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드리고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적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구원의 확신과 견고한 성장을 위하여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함께 예배 드리고, 격려하고 권면 하는 서로의 관계를 새로운 집단인 교회 속에서 이루어 가게 된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교회의 통일된 모습이 당부 되고 있다.
만약에 오늘날 교회가 한 마음과 한 입이 된다면 즉, 완벽하게 성경의 말씀 안에서 통일성을 갖는다면 세상에 놀라운 역할과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원하는 대로 감당해 갈 것이다. 우리는 다양성(多樣性)이라고 하는 것으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교회의 각각 다른 것들을 합리화 하고 변명하려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불신의 사람들조차 분열되고 나눠진 볼상 사나운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찬다. 한 건물의 귀퉁이마다 다른 종류의 교회 간판으로 인하여 구원의 그리스도가 가려지는 것이 사실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욕을 돌리는 일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바울 사도는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고 분열에 대해 경고를 한다. 이것은 비단 교회들 간의 권면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간의 권면이기도 하다.
우리 모든 신앙의 사람들이 같은 마음과 같은 언어를 사용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조건이 있다. 이것은 절대로 외형적인 모습을 갖춘다고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우리가 서로를 받아주고 수용해 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되는데 그 기준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완악하고 죄악 된 나를 받아 주신 것은 결코 우리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기준 때문이다. 만약에 나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받으신다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결코 머무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각자의 모습을 진실되게 헤아릴 때 더욱 그렇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받으신 기준이다.
아직 경건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 아직 죄인의 상태에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시고 그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우리가 서로 받아야 할 기준이고 주님처럼 서로를 받아 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귀한 교훈이다.
우리는 쉽게 상대의 기준에서 가 아니라 나의 기준에 상대를 맞추려 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남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것은 여전히 세속적인 자세이고 가치이다. 자기의 기준에 맞는 사람을 받아주는 것은 불신의 사회에서도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런 기준이라면 더 낳을 것이 무엇인가 하고 주님께서 지적하신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눅6:32)
특히 여기에 “너희도 서로 받으라”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에 있어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정되었다면 그런 바탕에서 서로의 관계는 용서 받은 관계라는 데서 대단히 중요하다. 서로 받는 사람들이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영원한 세계에 받아들여지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모두 한 뜻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구원을 선포하는 복된 말을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될 것이며 이것은 먼저 주님께서 악하고 부끄러운 나를 받아 주심같이 서로를 받아줄 때 가능하게 될 것임을 실천할 때 가능하게 될 것이다.
Ⅲ.약속된 구원의 역사들이 이루어 지게 된다.(8~9)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 오신 것은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믿음의 선진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약속의 민족 가운데 먼저 오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하시는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도 입증하시는 증거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보다는 상징(象徵)을 대단히 좋아한다. 이런 인간성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지만 이러한 계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과 오늘의 사람들을 본다. 구약의 한 가지 예를 보면 민수기21:4~9 [불뱀-놋뱀]의 이야기가 나오고 이것은 장차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에 대한 상징을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그러나 히스기야 왕 때까지도 이 놋 뱀이 숭배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 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18:4) 하나님께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신 은혜의 수단으로 삼았던 놋으로 만든 뱀이 무슨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이런 어리석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도 중요한 것은 사용된 도구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이 비교될 수 없으리만큼 중요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상징이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 했던 모든 그림자들의 실체이심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대 진리이고 불변할 생명 자체이므로 아무리 높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메시아는 이스라엘에 오셨고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다시 이방 세계의 사람들도 동일하게 구원으로 불러들이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시면서도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26:4) 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면 오늘 우리 주변의 사람들까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로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귀한 약속이다.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요즘 새로 사용되는 생소한 언어들을 더러 접하게 되는 데 특히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 라는 말을 듣게 되는 데 우리가 세 번째로 다루게 되는 부분이 그런 말에 어울림직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삶을 살게 될 때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기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는 파급효과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런 효과가 절대로 쉽게 저절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계산과 방법으로는 역시 불가능하다. 먼저 세속적인 방법을 벗어버리고 각자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나 자신이 은혜에 잠긴 그래서 바울처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15:10) 라는 고백을 드리게 될 때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이 은혜에 동참케 되고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막연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입에 붙은 말로 만족하지 말자! 마음과 뜻이 일관된 신앙의 삶이 되고 더 많은 사람을 복음으로 받아 줄 수 있는 넉넉한 은혜의 사람들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 속에서 진정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셔서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가 넓게 구원의 물결을 이루게 될 것이다.
바울은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2:19)고 당부하는 것을 듣는데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영광”을 외쳐도 우리의 근본 삶이 진리이신 말씀위로 옮겨지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불의에 떠나지 않고 머무른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하나님께 영광”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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