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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의 恩惠만을 믿고 天路歷程의 길에 너무 안일할 때가 많다. 그러나 사실 이스라엘이 이런 자세로 버림을 당했던 사실에 우리는 마음을 두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사실에 대해서 경계를 주심에도 불구하고 선택 받았다고 하는 이스라엘은 엄연히 하나님과는 관련이 없는 삶을 살면서도 “…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요8:39) 거나 “…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1b)고 예수께 대들었다.
그러한 교만으로 무장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무서운 말씀을 주셨는데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8)
마찬가지로 우리가 경성하지 못하면 다시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가르쳐 주신다고 해도 이들과 같이 고집을 피울 수 있다는 경계를 늘 깨어서 기억해야 한다. ‘지금은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은혜의 시대이니까!’ 라로 자위할 수 있지만 언약에 대한 경계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히브리서 기자는 갈라디아서와 더불어 하나님의 약속의 견고함에도 불구하고 유난히도 구원에 대한 경계를 여러 곳에서 주고 있다. 특히 많은 부분에서 구약의 믿음의 백성들을 예로 들면서 은혜로 주신 구원에 대한 약속을 가볍게 여기지 말 것을 교훈하고 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시험을 만날 때일수록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바 구원의 은혜를 헤아리고 다시 하나님의 견고한 약속에 더욱 흔들림 없이 올라 서는 것이 중요하다.
489:1.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2.세상 근심걱정 너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주가 네게 주신 복을 세어라, 두렴 없이 항상 찬송하리라; 3.세상권세 너의 앞길 막을 때, 주만 믿고 낙심하지 말아라,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리니, 염려 없이 앞만 보고 나가라; (후렴)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받아 구원의 길에 있는가를 헤아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세상의 것으로 바꿔 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할 것이다.
Ⅰ.옛 언약의 불순종에서도 두려운 보응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1~2)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옛 언약에 대한 교훈을 가리켜서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10:1~4)는 불완전함을 증거 하는가 하면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히7:18)라는 새 언약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7:19) 복음의 우월성에 대해서 증거 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셨는가를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증거 하시기를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31:3)
결국 구약의 언약도 하나님의 불성실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온전히 순종치 못함으로 계속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지 못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옛 언약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에도 불구하고 사실 행위 언약이었고 이 사실을 야고보가 잘 증거 해주고 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2:10~11)
분명히 복 받을 조건을 제시하셨지만 인간의 죄성과 불완전성은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요구조건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확인하게 되었고, 이러한 행위 언약은 폐하시기 위한 임시조치 법이었음을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라는 바울의 선언이나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10:9)는 히브리서 기자의 같은 선언을 듣는다.
구약의 마당에서 범죄 한 인간은 위엄과 영광의 하나님을 직접 뵈올 수 없었고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천사를 도구로 전달하셨다. 스데반도 그의 마지막의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행7:35)라 함으로서 옛 언약 속에 나타나셨던 여호와를 만났다고 하는 것은 결국 천사들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다시 이 히브리서 기자는 이 서신을 시작하면서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1~2)
오늘 1~2절을 새 번역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바를 더욱 굳게 간직하여,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일이 없어야 마땅하겠습니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효력을 내어, 모든 범행과 불순종하는 행위가 공정한 갚음을 받았거든 …” 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은 오늘 우리들의 위치에 대한 더욱 확실함을 확인시켜 주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실체를 뵙지 못하고 천사들을 통한 하나님의 계명을 등한히 한 것에도 큰 형벌을 받았다면, 이제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맛보고 범죄하여 자신의 공로나 의지로는 도저히 구원될 수 없는 인간의 약점을 친히 십자가에서 감당해 주심으로 이루신 엄청난 사랑의 역사를 누리면서도 그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헛되게 한다면 거기에 대한 징벌은 얼마나 큰가를 경고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사1:19) 라는 빛의 밝고 행복한 면이 있다면 불순종하는 어두움과 부끄러움이 그 반대편임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꼭 같은 비와 햇빛은 생명과 죽음의 양면성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도 그렇다.
이왕에 허락된 복됨을 순종과 감격으로 누리는 …
Ⅱ.이제 변명하지 못할 분명한 언약을 받은 우리들은 더욱 경성해야만 한다.(3~4)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느니라”
“이 같이 큰 구원”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감격하며 증거 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 같이 큰 구원”이 되는가? 내 인생에 있어서 세상의 어떤 귀중한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구원인가? 귀중한 것의 가치는 먼저 그 귀중성을 아는 사람들에게 가치를 제공한다.
“다른 것을 다 잃어 버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 하나만 있다면 인생은 그래도 살만 하다!”는 고백을 드릴 수 있는 구원일 때 비로소 “이 같이 큰 구원” 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제물 삼아 이루어 주신 구원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정도의 가치로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예배는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것이지만 바쁘면 어절 수 없고 가능하면 드릴 수 있는 그런 것이라면 감히 “이 같이 큰 구원”이라고 고백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울처럼 인생이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뒤집어진 그런 변화가 “이 같이 큰 구원”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바울이 만약에 다메섹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지 않았다면 죄 없이 로마의 감옥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릴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억울해서 미쳐버리거나, 그런 불법적인 처사에 항의해서 감옥의 기둥을 들이받아 항의의 표시로 자살을 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 바울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너무나 다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다메섹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 후의 바울의 인생은 늘 “이 같이 큰 구원”에 존재의 이유가 맞춰져 있었다. 그럴싸한 집안도, 공부도, 명예도, 권세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가치를 잃었고 오직 그가 만나 모든 것을 다 지불하고 사버린 가장 귀한 보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자존심도 삶의 안락함도 다 뺏어 버렸지만 바울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f)
그의 영광된 이름 지극히 큰 자라는 사울이란 이름조차 지중해 바닷속에 던져버리고 무시 당하는 이름 동족들로부터 천대 받는 이름 바울을 기꺼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이 큰 구원” 때문이었다.
일세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히10:33~34)고 기록되고 있다.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런 손해와 형편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가?
1.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구원이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신병자이거나 아니면 사람이 아니심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선언은 사람으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말씀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조차도 예수를 미쳤다고 했던 것이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3:21)
그러나 주님은 정신이상자가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이셨고 그의 일생이 이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너무나 흔하게 하셨고 표적과 이적을 마치 일상적인 일처럼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한 것을 하나도 어기지 않으셨다.
만약에 주님이 정신 이상자셨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그렇게 목숨을 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기꺼이 버리시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저주 받은 죄인들의 죄를 위한 희생물이 되시기 위하여 냄새 나는 짐승의 우릿간에 초라한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의 모든 가난과 설움과 고통을 친히 맛보시고, 이 역사 속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의 도구인 십자가를 나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기꺼이 감당하신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라는 언약을 기쁘게 지키신 만 인류의 목자이셨고 지금도 목자이시고 미래도 그를 기쁘게 순종하는 이들의 목자로 계실 것이다.
2.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였다. 우리 주님께서는 직접 쓰신 글자 한자 남기시지 않으셨지만 옆에서 그를 지켜봤던 많은 사람들이 그분에 대하여 목숨을 바치면서 그를 증거 하였고 심지어 그를 반대하고 거절하던 사람들까지도 주님의 십자가와 무덤과 부활을 보면서 기꺼이 그분 편이 되었다.
전에는 반대하고 거역했던 그분을 목숨을 바쳐서 증거 하는 자리에 선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
심지어는 그의 혈육의 동생들조차도 너무나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나중에야 깨달은 그들은 육신의 형이 아니라 구주로서 자신들의 생명을 기꺼이 바쳤던 것을 역사 속에서 본다.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거역하며 그의 사람들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었다가 이제는 그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는 바울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3.표적과 기사와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증거 된 것이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느니라” 이러한 죽음으로 주님을 증거 했던 사람들의 증거도 호소력을 갖지만 그보다 더 분명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선포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 해 주신 것이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16:20)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행14:3) 그러므로 오늘 믿지 못한다면 표적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다.
어떤 것 보다도 가장 큰 표적은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행17:31)는 표적이다.
표적으로 말씀은 확증 되었으므로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그러므로 더 이상의 표적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주님의 일생이 표적이요, 사도들의 증거가 표적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수 만리 떨어진 이 대한민국 땅에 우리가 이 창조주요 구세주를 알고 믿게 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이적 중의 이적이다.
이 시대의 변명할 수 없는 이유는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그것을 보고 들은 자들이 표적과 이적으로 그분의 증거를 확증하여 우리에게 주어졌고, 이러한 분명한 정보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오늘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지 못한다면 구약의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한 것과 비교될 수 없는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Ⅲ.사람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귀하게 여기시는 가에 대한 감격.(5~6)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장차 오는 세상”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부패한 세상과 달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될 세상에 대한 확신이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히9:11) 한 것처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는 더 이상 상함도 해함도 홍수도 재난도 없는 미래의 영광의 약속을 천사들에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에 죄 씻음을 받은 자들에게 약속하고 계신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죄에 노출되고 은혜를 잃을 수 있는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 속에 갇히는 세상이라면 내세는 믿음의 성도들을 위해 준비되는 영원하며 그러면서도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그런 세상이 될 것이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13:14)
이러한 영원한 도성을 받을 우리들은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러운 존재들이다. 사실 죄의 고통에 시달려 본 사람이라야 자유의 귀중함을 실감할 수 있고, 힘겹고 초라한 인생을 살아본 사람들에게 라야 천국의 영광은 기대할 가치와 기쁨이 될 것이다.
미래에 준비될 영광을 누리게 될 대상이 천사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히브리 기자는 구약 시편 8:4을 인용한다.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물론 이 히브리서 전체적인 주제는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고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천사보다 못한 존재로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선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죄로 인하여 일그러지고 초라해진 인생들을 영광으로 올리실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나)에 대한 사랑의 확신이며 고백이다. 지금은 구원 받았다고 하지만 사실 천사만도 못한 존재들로 이 땅에 산다. 범죄하고 거역하는 우리 자신들을 생각하시고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참으로 감격이 된다.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이 감격은 구원 받은 순간부터 영원히 가져야 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누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다. 사실 우리들의 구원, 우리 각 사람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감사를 지속적으로 회복할 필요가 있다. 버려두면 영원한 저주로 자동적으로 갈 수 밖에 없는 배은망덕을 수없이 반복하는 나, 그럼에도 때마다 생각해 주시고 권면 해 주셔서 다시 견고한 구원의 자리에 게우시는 사랑을 매순간 감격하는 …
그러므로 늘 자신에게 경계를 가져야 한다.(1, 3)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구약의 이 세상에서의 복을 약속하고 그림자 같이 불확실한 임시적인 법에 순종을 요구했던 것에 대한 불순종도 징벌을 받았다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시고 만질 정도로 분명히 보여주신 생명의 법을 알고도 불순종한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심판은 얼마나 클까를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3:6) (→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그러기 위해서 사악하고 죄악 된 나를 위하여 천사보다 못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주님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오늘 우리 모두는 받은 구원에 대해 “이 같이 큰 구원”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구원의 크기를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도 귀중히 여길 수 있다면 역시 그것을 지켜 가는 데도 등한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모두 “이 같이 큰 구원”을 새 예루살렘에 이를 때까지 고백하고 지켜가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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