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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 인생에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우리는 하나님의 적절한 도구로 살면서 행복할 수 있는가? 이것은 신앙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고 사실적인 질문이다. 여기에 답변이 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인간의 수준 이상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할 때 사실 육신적으로는 더욱 불편한 일이 많을 것이고 힘겨운 일이 많을지라도,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더욱 담대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들의 인생에 이김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하늘의 도움으로 인생을 승리로 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다른 사람들과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처럼 언제나 나 자신을 죽음에 내어 줄 때 자신에게도 생명이 풍성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신앙의 귀중한 논리를 제공한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입장에서 분명한 답변을 주면서 믿음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다. 그 해답은 본문의 지속적인 논리와 마찬가지로 나 자신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의 육체를 통해서 사시는 것이다. 바울의 많은 서신들 속에서 동일하게 우리 육적인 삶이 죽고 또 죽어 약해질 때 주님은 더욱 능력으로 역사하실 수 있다는 희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때문에 이 말씀은 우리가 계속 죽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 동시에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도 또한 설명하고 있다.
Ⅰ.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이유를 고백하고 있다.(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은 유약을 바르지 않는다면 별로 모양이 없고 약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유약을 발랐다고 해도 질그릇은 질그릇일 분이다. 유약의 종류는 여러 가지이며 유약은 우리의 걸친 사람의 모양을 내는 것들의 여러 가지들이다.
1.우리 자신은 결코 신뢰 할만 한 것이 못 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모습을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까지는 생명도 없고 모양도 없었을 것이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라는 두 번째의 행동을 통하여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범죄하고 하나님의 영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 모양이 가히 상상해볼 만하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인간이 아무리 큰소리쳐도 주님 보시기에는 모양 없는 뭉쳐진 야성의 진흙덩이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대도 단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뭉쳐졌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비평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피조물로서 모순된 자세일 뿐이다.
“…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사29:16)
결국 흙덩이에 불과한 사람들은 잘될 때는 자신을 칭찬하고 불행할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부조화의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다. 화려하게 문양을 그리고 유약을 발라 빛이 나는 그럴싸한 외모를 갖춘, 아무리 세상적으로 갖추어진 사람일지라도 깨어질 진흙덩이에 불과함을 안다면 절대로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게 될 것이다.
믿음생활 한다고 하는 우리조차 오히려 이 질그릇인 육체로 인하여 유혹과 시험을 당하고 환난을 만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때문에 어떤 모양을 갖추었든 어떤 유약을 발랐던지 쉽게 깨질 질그릇일 뿐임을 항상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 자신자체에는 결코 어떤 능력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질그릇이 대단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2.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그럼에도 이 천하고 보잘것없는 질그릇 같은 인생들에게 영원과 생명을 부어주시려고 주께서 피를 흘리셔서 죄로 인해 소멸된 하나님의 생기인 성령을 회복시켜 주셨다. 그럼으로 깨질 볼품없는 질그릇들에 생명의 빛을 담게 되었다.
왜 이 질그릇에 생명을 감추게 했을까? 이 생명의 빛을 오늘 바울은 [보배]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보배를 질그릇에 담아 주신 것은 이 질그릇을 빛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기드온의 3백명의 용사들에게서 이 사실을 배운다.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삿7:16) “기드온과 그들을 좇은 일백 명이 이경 초에 진 가에 이른즉 번병의 체번할 때라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삿7:19)
사실 이 보배로운 빛을 우리 속에 두신 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해서임을 깨닫는다. 기드온의 군사들의 손과 손에 들려진 횃불을 감추었던 질그릇은 필요한 때에 깨어져서 빛을 드러내어 적군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꼭 이해해야만 한다.
만약에 이 질그릇인 항아리가 깨어지지 않았다면 횃불은 들어 나지 않았을 것이고 전쟁의 승리나 하나님께 영광은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우리의 질그릇 같은 자신이 깨어지지않는다면 결코 주님의 승리의 도구들이 되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빛은 들어 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오늘 우리의 승리와 영광의 비결은 연약한 깨어질 질그릇인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두신 복음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러한 논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좀더 구체적으로 해설되어 지고 있는 내용이 다음 구절이다.
Ⅱ.항상 십자가의 희생을 몸에 간직해야 할 이유들을 설명한다.(8~11)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두절씩 바꿔서 이해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10~11-새)
여기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이나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이란 말은 같은 내용으로 반복적인 내용이고 항상 기드온의 용사들에게 들려진 항아리처럼 언제든지 필요하다면 깨뜨릴 준비를 하고 다닌다는 고백이고 바울을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문제는 오늘 우리 모두가 그래야 당연하다는 권면이다.
글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깨어지고 죽어질 때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고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된다는 귀중한 메시지이다. 반대의 형태가 될 때는 결과도 당연히 반대가 될 것이다.
비록 나의 육체가 죽음에 내어 던져지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고독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면 바울은 기꺼이 그렇게 하였고 우리에게도 기쁘게 그렇게 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효과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 각자가 죽음에 넘겨질 때 예수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깨어질 우리의 육체에게도 비교될 수 없는 유익이 있게 될 것임을 앞에서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8~9)
질그릇인 우리 자신에게는 확신을 가질 수 없지만 이 하찮은 옹기 같은 우리 속에 담고 있는 것이 귀하다는 사실이고 이 귀한 보배를 보전키 위해서 가치 없는 그릇인 우리를 귀하게 지키신다는 사실이다. 믿습니까?
이제 여기에 4가지의 엄청난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①사방으로 우겨쌈[헬,들리보(thlibo), 압박당하다, 억누르다]을 당하여도 싸이지[헬, 스테노코레오(stenochoreo), 좁은공간, 막다른 골목] 아니하며, ②답답한 일[헬, 아포레오(aporeo), 길이 없다, 방법이 없다]을 당하여도 낙심[헬,엑사포레오마이(eksaporeomai), 모든 희망을 포기하다]하지 아니하며, 출애굽기14장의 애굽의 전차에 쫓겨서 홍해 앞에 이른 이스라엘의 상태를 묘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행하다 보면 크건 작건 이러한 홍해의 경험들을 더러 겪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뒤에는 애굽 전차,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히는 상황에서 질그릇 같은 육신을 의뢰하는 사람들(11~12)과 하나님을 의뢰하는 선택을 하는(13)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홍해를 열어 길을 열었고, 어떤 경우는 그의 백성들의 담력을 키우기 위해서 이런 삼수갑산에 주님의 백성들을 가둘 대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같은 고린도 후서1:8~10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는 경험을 같은 내용으로 고백하고 있다.
③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고, 주님은 “…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15:20)하셨고 바울은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확신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고 고백하고 있다.
④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하였고 솔로몬도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24:16)하였다. 이러한 네 가지는 싸우는 상황에서 있어질 수 있는 상황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군사들이라는 데서 그렇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하는 싸움을 싸운다면 이러한 사실은 분명히 경험할 수 있는 상황들이다.
Ⅲ.남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 죽는 것이 믿음의 사실적인 고백이다.(12~13)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앞의 내용과 연결되어지는 내용이다. 결국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십자가를 질 때 그 역사로 다른 사람들 속에 생명이 역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구언을 위해서도 우리가 십자가를 달게 져야 할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에 우리의 이기적인 신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좋은 것들은 다 받아 누리고 싶어하면서도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는 피해보려는 주님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적인 성향의 사람들로 넘치고 있고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피 흘려 이루신 구원의 역사가 다른 사람들 속에 생명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나타난다.
주님께서는 온 인류의 죄의 해결을 위하여 기쁘게 십자가를 지셨고 그를 다르던 제자들 역시 같은 길을 걸었으며 처음 1세기의 변질되지 않은 신앙의 사람들도 같은 천국의 길을 걸었다. 이 십자가의 원리는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기쁘게 질 그리스도인을 요구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져야 될 사람은 누구인가? 마로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이다. 오늘날 십자가와는 거리가 있는 신앙은 공적이 나타나는 것들에는 기쁘게 자신을 드리면서도 이면의 가려진 삶 속에서는 기꺼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므로 상대적으로 생명의 나눔은 진보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믿음은 입술로 뿐만 아니라 삶으로 고백 되어져야만 하고, 그럴 때 비로소 생명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역사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인용되는 시편의 내용처럼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시116:10)한 것처럼 믿고 행하는 것이고, 바른 믿음 없이 이것은 불가능하며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획하시고 이루신 구원의 역사는 이 믿음의 고백과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 충만하게 역사되게 될 것이다.
Ⅳ.죽은 자신 안에 예수는 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 것이다.(14~15)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하셨지만 사실 다시 살린다고 하는 표현은 죽어있지 않은 상태의 사람에게는 살린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다. 지속적으로 나를 죽일 때 죽는 자신 안에 예수는 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믿습니까?
사실 믿음의 사람들의 최종적인 소망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 여러분들도 그렇습니까? 비록 범죄 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지만 창세전부터 계획하시고 이루신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앞에 서게 하실” 그 엄청난 기대를 인생의 최고의 목표로 믿음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다. 맞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이 땅에 잠시 보이다가 없어질 그러한 것들을 삶의 목표로 삼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습니까? 바울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하였고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서 공언하기를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하였다.
그리스도인이란 결코 이 추하고 썩어지고 없어지고 사라질 것들에 연연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유한 한 것들을 모두 투자해서 썩지 않을 영원한 것들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맞습니까?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모든 절망을 생명으로 바꾸는 부활의 논리에서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4)고 선언하고 있다.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5) 바울은 아무 것도 자신을 위해서 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의 입장은 어떤 형편이 되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가 풍성하기를 원했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기를 원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을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는 목적이고 일하는 목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이다. 여기에 우리의 성패가 달려있고 또 운명이 달려 있다.
우리 자신은 결코 신뢰 할만 한 것이 못 되는 질그릇임을 기억하자.
우리가 믿음에 있다고 할지라도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로서만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희생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늘 짊어지자.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모든 문제는 주님께서 대하시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엄청난 유익이다.
주님을 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가 죽고 다른 이들을 살리려 할 때 주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능력으로 우리가 살았듯이 복음의 능력은 나타나고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은 비로소 모든 사람들과 주님께서 보시는 믿음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될 죽은 자신 안에 주님은 살아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교훈이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나 자신이 죽어야 나 자신도 살고 모두가 살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럴싸한 그림이 그려지고 유약이 발라지면 자신이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릴 때가 많다.
사울이 바울일 수 있었던 이유도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후2:11~12f) 라는 고백 속에서 확인이 된다.
끊임없이 되살아 나려는 나를 또한 끊임없이 십자가에 죽입시다. 그것이 나를 위해서도 인류를 위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도 좋은 것임을 잊지 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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