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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3:3~8 2006-07-02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우리는 외형적인 교회당을 새롭게 세움에 있어서 보이는 세계를 구성하는 내면의 영적인 세계를 새롭게 점검하고 있다. 아무리 화려하고 그럴싸한 외형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생명이 없는 내면이라면 하나님 앞에서는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방법으로써 이 방법자체가 사람에게서 만들어지거나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마련하신 방법이고 구원에 관한한은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는데 중요성이 있다.

또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의 기준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을 순종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지식수준이나 감성지수나 권력과 금력의 높고 낮음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순종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오늘 이 귀한 대화를 주님과 직접적으로 나누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요 율법학자인 니고데모를 교훈하시는 주님의 교훈에서 직접 지적되고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10)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구원의 논리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은혜요 감사가 된다.

이러한 영적인 교훈은 가장 기초적인 믿음의 원리요 교훈이면서도 또 다른 위험성은 이론적으로만 이해할 뿐 실질적인 면에서는 이 귀중한 약속이 너무나 삶과는 먼 그런 모습으로 믿음의 삶을 살고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고 하는 데 심각성이 있다.

적어도 오늘은 이 귀중한 구원의 논지를 이론으로 풀어내는 것 뿐만 아니라 사실적인 삶의 교훈으로 다루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은혜를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



Ⅰ.사람의 가치관은 주님의 피에 의해 뒤집히지 않으면 하나님에 관한한 어떤 것도 볼 수 없다.(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처음부터 좀 더 직접적인 부분을 다루었으면 한다. 왜 하늘을 향해 간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늘을 위해 하늘에 모든 것을 쌓는 것 보다는 이 땅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들을 더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이 땅에 쌓는데 혈안(血眼)이 되어 있는 것일까?

여기에 정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바로 오늘 주님께서 지적하시는 말씀이 정답이다. 하늘의 것들보다 땅에 가치 있는 것들을 쌓기에 바쁘고 그것을 위해 가장 귀한 시간과 정력을 허비한다면 그 당사자가 뭐라고 하든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삶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이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고 거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죄인 된 인간의 눈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하늘의 눈으로 바뀌지 않는 한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사람이 복음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가장 크고 구체적인 변화는 시각의 변화이고, 가치의 변화이다. 지금까지 귀하게 여기던 땅의 것들이 가치를 잃고 하늘의 신령한 것들이 더 큰 가치로 보이게 되는 변화를 가져오고, 자신의 가장 귀중한 마음의 자리는 사람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거듭났고 그리스도인이며 천국을 향해 가고 있다고 주장할 찌라도 그의 삶이 즉, 그의 추구하는 바가 그의 가장 사실적인 그의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입술로는 고백하면서도 삶에 있어서는 여전히 세상의 귀중한 가치들이 하늘의 것을 앞서고 있다면 오늘 주님께서 지적하는 이 가르침이 지적하는 것처럼 하늘의 귀중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 여전히 세상의 것들에 종 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늘이 보이는 사람이 이 땅에 가장 귀중한 자신의 것을 다 투자하고 라도 하늘의 보화를 사게 되어 있는 것이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천국의 이론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4~46)

보화만큼이나 눈을 가리는 것도 없다. 보화를 볼 줄 모르면 가짜를 비싼 값에 사게 된다. 한 마디로 속는 것이다. 요즘 특이한 것은 가짜를 가지고도 즐거워 해서 일부러 싼 가짜를 사서 진짜처럼 가지고 다닌다. 왜냐하면 가짜는 진짜 같지만 잃어버려도 손해가 적기 때문에 요즘은 짝퉁이 인기가 있고 관세법을 어기면서 이 가짜를 들여와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많다.

더 심각한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짝퉁을 가지고 즐거워 한다는 것인데 천국은 절대로 짝퉁이 없다. 비슷한 것일지라도 천국이 아니며 오직 천국만이 천국일 분이다.

많은 사람들은 천국을 볼 수 있는 거듭난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즉,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귀중한 하나님의 영광나라를 보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의 귀중한 것들을 쌓기에 혈안이고 그것을 오로지 주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유치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변화된 고백이 여기에 직접적인 해답이 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빌3:7~9f)

이 땅의 것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다 쓸 수 있는 사람이 눈이 바로 뒤집힌 사람이다. 아직도 세상 것들이 천국의 것들보다 귀하게 보인다면 심각하게 자신의 거듭남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Ⅱ.하나님의 약속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는 한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의 어린아이 같이 유치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요한 복음 특유의 표현 법으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친절히 일러 주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이것은 좀더 구체적인 거듭남의 사실을 가르침이다.

거듭난 자라야 비로소 신령한 천국이 보이고 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물과 성령으로 남에 관한 신앙적인 논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이해 하면서도 실질적인 삶에는 충족이 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서 안타깝다.

또 이 거듭남을 영접이라고 이해하는 데서 같은 1:12~13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는 말씀과 함께 너무 관념적으로만 이해하려 드는 부분이 안타깝다.

성경전체를 통해서 이해하는 영접은 바로 죄인 됨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물속에 자신을 장사 지내고 거듭남을 통해서 성령의 선물을 받는 구체적인 순종의 행동을 통해서 임을 이해할 때 비로소 “물과 성령으로 남”이 충족되어지고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실현됨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이 이런 이론적인 논리만으로 채워짐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보이는 현상 속에서의 순종과 그 이면의 영적적인 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외형적인 것만으로는 온전치 못하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이는 모습과 보이지 않는 모두가 다 채워져야만 한다.

진정한 믿음과 회개와 순종이 없는 사람이 보이는 외형적인 행동을 수 백번 거쳐도 하나님의 약속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완전히 채워지는 약속이 되지 못하면 그것은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보이는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는 자세도 옳지 않고 보이는 외형적인 형식에만 치중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는 온전치 못한 것이다. 사람들을 ‘이만 하면 됐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완전히 충족되어져야 한다.

같은 요한 사도가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5:6~8)는 진기한 기록을 읽게 된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또한 동일하게 중요한 증거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약속인 물에 세례를 받고(벧전3:21) 죄 사함을 얻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고(행2:38) 그리스도의 피의 새언약인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주의 만찬(눅22:20)을 기념하는 예식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합니다.

여기에는 자연(물)과 하나님(성령)과 예배 드리는 사람(인간)의 3요소가 증거를 충족시키는 조화를 이룬다. 창조자와 피조세계와 그 피조세계를 다스리도록 위임 받은 사람이 모두가 참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감격하고 찬양하게 되는 신비하고 거룩한 예식을 하나님께서 이 죄악이 관영하는 땅에 주신 것이다.



Ⅲ.하나님의 생명으로 나는 것이 영으로 나는 것이다.(6~7)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육신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한 구분을 말씀하신다. 이 가르침은 바울 사도의 가르침이 더욱 분명히 해준다.

“5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5~9)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거듭났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삶이 이 사실을 분명히 구분 지어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모든 사람들이 육신의 피를 따라 육신으로 이 땅에 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지만 그 육신으로 남은 모두가 한결같이 죽음을 결과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이러한 자연적인 생명으로는 아무리 고상한 생각을 하려하고 거룩해 지려고 애써도 불가능하다는 고백이다. 바울 사도는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공동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7:18~25)

소는 소를 낳고, 개는 개를 낳고, 돼지는 돼지를 낳듯이 육의 사람은 육의 사람을 낳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이다. 그러나 이 고기덩어리는 흙으로 돌아가 썩을 수 밖에 없고, 이 고기덩어리가 바라는 것은 세상에서 편한 것 세상에서 좋은 것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성령으로 나는 것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적인 면에서는 쉽지 않음을 본다. 우리가 성령으로 났다면 성령의 의지를 나타낼 것임에도 성령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전혀 영적이지 못함을 보는 것이 안타깝다. 그것은 다면 성령을 빙자할 뿐이지 진정한 성령의 의지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의 욕구를 분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유대인들과의 대화에서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8:39)

바울 사도는 성령을 따라 행한다면 그 결과가 반드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고 강조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여기에 덧붙여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5:24~26)

성령의 사람에게 육신적인 일이 나타나는 것이 기이한 것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신령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에 목숨을 바치는 것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 각자의 열매를 점검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바울은 안타까워 한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3:18)



Ⅳ.이것은 실제적인 가르침이다.(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분명히 바람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바람이 불면 나타나는 현상은 사람들이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육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죽고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그것은 이론적이 아니라 실제적인 변화를 나타낼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본 사람들은 역시 의아해 했는데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요6:42)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요7:15)

우리의 삶을 사람들이 볼 때에 육신으로서의 사람과 현제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기이해 할 수 있는 변화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날마다 살아나는 자신을 죽였음을 고백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이것이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여러분도 성령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날마다 살아나는 자신을 죽이는가? 성경의 거듭남이나 성령의 사람이란 절대로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이다.

교회는 바로 이 거듭난 사람들이 모인 집단으로 그런 입장에서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무리인 것이다.

다시 바울의 고백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세상적인 성격도 취미도 자랑도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육신적인 특성으로 오늘을 변명하려고 하지 않을 것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 안에 과거의 나 자신이 살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통탄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거듭남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과거의 나를 내세울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아직도 과거의 나 자신이 그대로 살아 있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신앙에 있어서는 실패한 사람이다.

이런 과거의 육의 사람으로는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복음을 감당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일을 절대로 바르게 수행할 수 없다.

믿음의 사람들은 매일매일이 새로운 사람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고백이 바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라는 고백이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아도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과 더불어 새로운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내세울 필요가 없다. 오늘의 새로운 경험이 풍성한 사람은 현실을 감사하고 자랑하고 과거의 향수에 사는 사람들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육을 벗은 성령의 사람이라면 오늘의 경험은 점점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로 채워질 것이고 그러한 삶 속에서 또 다른 사람들은 생명의 냄새를 맡게 될 것이고 함께 생명의 역사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많은 값을 지불하고 누구도 갖고 있지 않은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보석 감정사가 나타나서 그것이 가짜라고 판명된다면 그 실망은 어떠할까? 나에게는 하늘의 가치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보이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 자신을 죽이고 하늘로부터 거듭난 눈과 가치와 삶이 되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물과 성령과 피로 검증 받는 삶을 살고 있는가?

매일 매 순간 육신의 삶과 영적인 욕구에서 나 자신에게는 언제나 어느 욕구가 실질적으로 충족이 되고 있는가?

주는 그리스도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 늘 사실적인가? 아니면 아직도 우리 자신의 성격을 탓하며 과거의 삶을 벗지 못하고 있는 여전히 과거의 사람 그대로 인가? 아니면 과거의 나의 삶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볼 때에 의아해 하며 전혀 다른 모습을 이상해 하면서도 변화된 삶에 칭찬을 하고 부러워 하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바울처럼 매일매일 자신을 죽이고 죽여서 그리스도만이 나의 삶을 통해서 살아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