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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도 그 은혜 받을 자세들이 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보다는 세상의 논리와 많이 혼합이 되어 있어서 새롭게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장애를 가져오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리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약속하지만 일반적인 종교사상이나 세상적인 가치에 익숙해 있다면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 없이는 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진리를 향하여 문을 열고자 하는 순종의 사람들은 진리를 이해하고 수긍하게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가 불가능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의 본문 역시 철학만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다고 인식되고 있는 당시 일세기의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백은 사실 오늘날 첨단 과학과 논리 체계에 익숙해 있는 세상적인 지식의 소유자들에게 역시 같은 반응을 가져올 수도 있는 내용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이지만 결코 편하게 그의 일을 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 자신이 세운 교회들로부터도 오해와 푸대접을 받아야 했고, 사도권에 대해서 끊임없이 도전을 받았다. 특히 갈라디아 교회나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고린도 교회로부터 그러했다.
사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모함보다도 더 걱정하고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러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다수의 교회와 사람들이 믿음에 손상을 받을까 봐서 이러한 변명 아닌 변명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면적인 도전은 말할 것도 없고 육신의 불편과 고통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주님께 부르짖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이런 문제들은 해결이 불가능하고 싸움밖에 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깨달으면서 자신을 적대시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나는 매일 죽는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사람들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과제를 두고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바울처럼 육신적인 입장에서는 응답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지고 그것이 어려움이 되는 경우도 더러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이해가 바로 되지 못해서라고 생각되어 진다. 어떤 이유에서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려움을 당하거나 고통스러운 것을 복이라고 이해하기 어렵고 그런 이해를 깨뜨리지 못해서 결국 복음에 왔다가 세상으로 되돌아 가 버리는 경우의 사람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면 오늘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거나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우리는 늘 형통할 때 교만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에 때로는 형통함 보다는 고난이 우리의 삶의 육신에 머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오늘 바울의 같은 고백을 하나님께 찬양으로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모두의 신앙이 바울처럼 성숙해져서 바울과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는 하늘의 사람들로 사시기를 …
Ⅰ.원치 않는 고난의 의미를 바울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때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10f) 라는 고백은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라는 고백도 세상적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런 고백이 될 것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라는 자신의 고통의 이유를 분명히 읽고 있는 바울은 오히려 고통스러움을 감사하고 있다. 하늘의 상과 신비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세상이 갖지 못할 하늘의 것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고통이라는 바울의 해석이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세상에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보화이고 그것을 갖기 위해서 세상의 귀한 모든 것을 다 투자하여 그 보물을 샀다면(마13:44, 46), 이 땅의 보물을 지켜가는 것 보다도 더 힘겨운 영원을 위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물이 바울에게나 오늘 우리들에게나 동일하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공통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직접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고 주님을 위한 고난의 대가를 분명히 약속하셨다.
오늘 과연 우리 각자의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처럼 최고의 보물인가? 귀한 것은 그것을 지켜가는 데도 분명히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리고 바울에게는 그것이 무엇이라고는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육신의 고통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각 나라마다 귀중성의 가치는 다를 수 있다. 각 가정이나 사회의 가치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바울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다 동일한 하늘의 상급이다.
바울의 주님에 대한 충성심은 모두가 다 인정하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달릴 때 나를 듯이 빠른 말을 제어하기 위하여 재갈을 물리고, 사람을 끌고 달릴 정도의 황소를 제어하기 위해서 코뚜래를 사용하시듯이, 많은 신앙의 사람들 가운데 더욱 큰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고통이라는 제어장치를 두신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고통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헌신적으로 섬기는 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고난이 있다면 바울과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은혜를 더 받은 사람이구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인류가 다 공인하는 생명의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주셨구나!”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다면 낫지 않는 질병도 새로운 이해가 가능하고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게 될 것이다. 믿습니까?
나의 육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복음의 능력을 원자로처럼 분열을 일으키시기를 원하시는데 너무 과도하지 않고 교만하거나 지나치지 않도록 고난을 제어봉으로 주셨다는 은혜로운 이해가 진실하게 신앙하면서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같고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 같을 때 돌아볼 수 있는 믿음의 자세이다.
이런 이해는 신앙을 떠나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해이다. 오늘도 신앙하면서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 울고있는 사람이 있는가? 내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는 이해로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은 어떤 것도 결코 나쁜 것이 없다. 그렇게 때문에 고난도 아픔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은혜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믿습니까?
바울과 같은 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조차도 감격으로 고백할 수 있는 …
Ⅱ.받은 응답이 어떤 것이든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 때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8b~9)
“…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1.우리는 우리의 고난을 해결 받기 위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우리는 대개의 경우 고통이나 어려움이 떠나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은 일반적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이것이 해결되기 까지 기도하는 데는 지쳐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어려움의 의미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바울 사도는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8)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눈 여겨 볼 수 있는 것은 “세 번”과 “간구”이다. 대개 성경 속에서 이해하는 삼(三)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에 관한 수이고 완전수의 하나이다. 다음으로 [간구, 헬, 파라칼레오(parakaleo)]는 단순히 기도를 넘어서 (가까이 부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 단어는 성령의 별명인 보혜사(保惠師)와 같은 의미이다. 완전히 하나님 가까이에서 의논하듯이 이 문제를 기도로 다루었다는 의미이다.
2.응답은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드는 것이 문제이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태에 관계없이 은혜의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응답을 주신다. 어떤 상태에 있든지 은혜가 족하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자체가 엄청난 은혜이기 때문이다. 진노의 대상이요 저주의 운명으로 죄에 종 노릇 하는 우리들을 독생자의 보혈로 사셔서 거룩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로 사랑해 주신 은혜만 생각해도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다.
바울은 성령과 함께 세계를 복음화 시키는 엄청난 일을 감당하고도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구원을 은혜로 소화할 수 있어야, 신앙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7~9)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각자가 받은 은혜는 이미 모두에게 족할 정도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는 주님의 음성은 우리 모드가 들어야 할 음성이다.
바울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는 고백이 가능한 사람은 늘 은혜가 족한 것이다. 살아도 죽어도 주체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째 나에게는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복음을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는 것 자체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엄청난 은혜이고 이제 그 나머지는 모두 덤이다.
3.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의무나 노력보다는 은혜를 의지하여 일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은혜로 감당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백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사실 이 고백도 바울의 뼈아픈 고백이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즐기면서 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힘겹고 어렵게 일을 한다. 차이는 단순하다. 은혜로 하는 자와 의무로 하는 자의 간격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지금 교회당을 옮겨 재건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스가랴서 4:6~7의 말씀은 대단히, 대단히 중요한 슬로건이다.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서면그리스도의교회 성도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새번역]
주님께서 바울에게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는 응답을 이 말씀을 듣는 …
Ⅲ.하나님의 능력은 내가 약할 때만 비로소 나 자신의 것이 된다.(9b~10
“…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자신이 너무 강하면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자신을 가지고 남을 저울질하고 평가하게 되기 대문에 사람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10:12, 18)
이것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꺼꾸러지기 전의 사울의 모습이었고 오늘도 자신이 죽지 못하고 그 사람 속에서 계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사람의 모습이다.
마치 주인을 만나려고 하면 강아지가 먼저 튀어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 먼저 튀어 나오는 모습을 보실 때 주님은 안타까워 하실 것이다.
자신이 살아 있는 사람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가 없고 자신이 충만한 사람에게서는 죄와 죽음의 인간 냄새밖에 날 것이 없다. 그래서 “…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세상에서 약한 것을 자랑한다면 사람들은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나 자신이라는 존재가 점점 소멸되어 가고 그리스도께서 점점 나 자신을 점령해 가는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천로역정(天路歷程)의 삶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의 약함을 크게 기뻐하고,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약함을 크게 기뻐하고, 자랑하는 이유는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최대한 부려서 자신은 왕으로 편하게 살려고 하는 엄청난 이기주의(利己主義)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이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천국의 원리가 아니라 세상의 원리, 사악한 죄악의 원리이다.
자신이 죽지 못하고 살아나는 모습은 바로 염을 해 둔 시체가 벌떡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을 그것도 천국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아프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들만이 비로소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부정적인 응답이었어도 기뻐하였다. 깊은 기도로 얻어낸 하나님의 응답이 부정적이었는데도 바울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것은 나의 기쁨이 아니라 사실 그리스도의 기쁨이었기 때문이었다. 의를 위해 기꺼이 손해보고 고난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주님은 또한 기뻐하신다. 믿습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진심으로 이 고백을 들 수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나 자신이 빈 껍데기로 존재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의 인생을 지배하시고 생명의 냄새를 풍기는 삶을 살게 할 것이며 그러한 사람을 가르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김소엽이라는 분이 쓴 시가 이러한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부서져야 하리 더 많이 부서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더 많이 무너져야 하리
깨어져야 하리 더 많이 깨어져야 하리, 씻겨야 하리 깨끗이 씻겨야 하리
다 버리고 다 고치고 겸손히 낮아져도, 주 앞에서 정결타고 자랑치 못할 거예요
부서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깨져야 하리 깨끗이 씻겨야 하리
이렇게 될 때 바울과 같은 고백이 가능하고 그리스도께서 비로소 우리의 인생을 온전히 운전해 가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 고백이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들임을 기억하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3~16)
원치 않는 고난의 의미를 바울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때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받은 응답이 어떤 것이든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 때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을 해결 받기 위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응답은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드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의무나 노력보다는 은혜를 의지하여 일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내가 약할 때만 비로소 나 자신의 것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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