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오늘 우리는 너무나 유명한 주님의 예배의 초청을 듣는다. 이 주님의 음성은 비록 범죄 했지만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의 자리로 회복을 원하시고 또 그것이 가능하도록 친히 마련하신 구원의 초청이기도 하다.
이 말씀에는 헛되고 거짓된 것들에 인생을 의존하면서 삶을 허비하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사람들의 진정한 가치의 추구를 만족시키려는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진정한 아버지를 버리고 가정을 뛰쳐나간 탕자들을 부르시는 사랑의 아버지의 눈물어린 호소가 들어 있다.
이 예배의 가르침이 주님으로부터 이 장의 중심에 있다는 것조차도 의미를 갖는다. 사마리아를 통과하게 된 주님과 제자들 일행, 점심 때가 되어서 제자들은 마을로 먹을 음식을 사러 들어가고, 주님께서는 행로에 피곤하셔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다가 모든 사람들이 낮잠을 즐기는 시간에 사람들의 낮을 피해 물 길러 나온 운명이 파란만장 한 여인을 만나 생수의 대화에서 이 신령한 예배의 가르침을 베푸시고, 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에 마을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마을이 모두 주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이 4장 자체에서 마치 이 인류의 역사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주님께서는 바로 신앙 한다고 하는 유대인들로부터 개처럼 취급되는 이 사마리아 성에 오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시키는 과정과 그 은혜의 역사가 사마리아 전체를 지배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돌아오는 이 모습을 보면서 죄악의 역사 중앙에 오셔서 개처럼 취급되던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 이 구원의 복음을 세상 끝 날까지, 땅끝까지 증거 하셔서 온 지구촌의 잃어진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역사를 보는 것 같다.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 조차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만 그의 자녀로 일꾼으로 부르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시기를 원하시지만 교회의 가장 일차적인 존재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중생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도 예배를 위해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희생을 치르시고 장사 지낸바 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고 이 땅에 그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신 이유조차도 범죄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사탄을 받들어 섬기는 자들을 예배자로 변화시키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합당하게 예배하기 원하신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얻은 힘과 감격으로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기를 원하신다. 먼저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일도 할 수 없다. 성령님은 오직 예배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는 일하지 않으신다.
Ⅰ.바른 예배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1.참예배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음에서 출발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예배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합당하다. 모든 신앙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만 진짜이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주님과 함께 올라갔던 산에서 변화되신 주님께 넋을 잃고 있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17:5; 막9:7; 눅9:35) 하신 하나님아버지의 명령은 당시 세 제자들 뿐만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역사 속의 모든 사람들에게, 또 모든 신앙하는 삶의 절대불변의 원칙이다.
예배의 장소나 방법에 있어서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고 이 불경건한 여인이 예배자로 초청 되었다면 누가 예배에서 제외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 주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유식이나 무식, 죄인이나 도덕적인 사람 모두를 주님은 부르셨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은 요한이 이 복음서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는 초청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처음의 삶은 이 여자보다 더 험하고 사악해도 상관없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음으로 예배 드리고 살 필요가 있는 것이다.
2.장소에 구애되지 않는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솔로몬 성전의 시대에만 해도 예루살렘만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응답하시는 절대적인 장소였다.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대하6:40) 하였고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은 바로 뒤에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대하7:15)라고 언약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간구를 드리는 솔롤몬 조차도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대하6:18)라고 어디든지 충만이 거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신을 어떤 장소에나 국한시키는 사상자체가 참된 진리를 모르는 이방인들의 사상이다. 이스라엘과 전쟁에서 진 “아람 왕의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저희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저희가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저희와 싸우면 정녕 저희보다 강할지라”(왕상20:23)는 우스꽝스러운 말을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갖지 못한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판단이다.
구약에서 주로 약속의 예루살렘을 통해서 제사를 받으시고 만나시고 기도를 들으셨던 장소적인 개념은 구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 끝 날까지, 땅끝까지 함께 하실 약속으로 오늘 이곳에도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심지어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는 놀라운 약속을 주셨다. 할렐루야!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으므로 임마누엘의 엄청난 복을 예배와 더불어 풍성히 누리는 …
Ⅱ.무지의 예배가 있다.(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1.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드리는 무지의 예배가 있다.
경건한 삶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생활을 하면서 예배한다고 하는 사마리아 인들의 예배를 본다. 이것은 무속적인 예배를 뜻한다. 하나님과 신령과 진정의 교통을 하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라면 그의 삶은 분명히 평상시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것이고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는 구별된 빛 된 삶을 살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막연한 예배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그 의식을 통하여 육신의 유익만을 기대할 것이며 영원에는 관심이 없으므로 비도덕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분명히 이 사마리아 여인도 조상 때부터 전례 되어 오는 예배를 알고 있고 주님께 고백하고 있다.(20) 어떻게 보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종교의 행위나 기부의 일에서는 더 진지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런 행위로 자신의 죄스러움을 용서 받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환상의 경지를 예배라고 착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음악을 예배로 착각한다. 마음을 흥분 시키고 거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지에 몰아넣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예배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죽음의 경지에 이르러서 신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많은 종류의 예배가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을 받지 않으신다. 종교적인 체험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전부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교인들끼리 어울리면서 서로 따뜻한 우정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교회에서는 아름다운 파이프오르간 소리와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지고 온 갓 악기들로 정신을 현란께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곧 참예배는 아니다. 구속(救贖)과 관계없이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다. 회계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으면서도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분명한 명령에 따라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알지 못하고 막연히 예배하는 사마리아인들과 다를 것이 없고 그러한 사람들의 삶은 예배와는 다른 유치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될 것이다.
2.의식의 장엄한 유대인 같은 제사가 있다.
주님께서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말씀이고, 당시 여자가 말했던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b) 라는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예배와는 물론 다른 말씀이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제사의 외형적인 의식은 그대로 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제사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를 헤아리지 못했고, 그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 당시뿐만 아니라 이러한 외형적으로만 근엄한 예배는 이사야나 호세아 때에도 주님께서 한탄하신 바 있다.
이런 경우에는 영적인 체험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모습을 더욱 강조하고 근엄하게 치장할 필요가 있었고 이것이 안팎을 다 꽤 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역겨운 것이 되었었다. 사람이 특별한 옷을 걸친다고 거룩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복음은 속 사람이 거듭나고 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늘날도 속 사람으로는 회 칠한 담처럼 온 갓 더러운 것을 가득히 가지고 있으면서 것으로는 거룩한척하는 예배자들을 향하여 호세아처럼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사1:12~13)고 탄식하실 것이다.
어리석은 사울에게 “…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라고 경고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인 장엄함 보다는 예배자들의 마음을 읽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안팎으로 성령과 더불어 신령한 마음으로 예배 드리는 주님께서 찾으심에 합당한 …
Ⅲ.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있다.(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예배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참예배가 되려면 성령님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
1.성령과 함께 하는 예배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려야 할 이유이다. 이것은 비 물질적인 예배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속성에 합당한 예배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분의 본질에 따라 예배를 드려야 하며,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온전한 예배일 수 없다.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신적인 요소만으로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의지하여 거듭나고 죄를 씻어버린 새로운 피조물들에게 인침으로 부어주신 성령과 더불어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의 절대적인 조건이다.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면 결국 헛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형적인 격식도 중요하겠지만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더불어 경외감과 신비로움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드리게 하셨고, 그러한 예배를 받으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을 거슬리는 요소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사람에게는 진정한 예배가 되지 못할 것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장소의 제한이 폐해졌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차이도 있어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 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사람은 참으로 신령한 예배를 드림으로 영적인 세계를 깊이 경험하게 되지만 반대로 꼭 같은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육신적인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하는 개인차도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성령의 충만이 많은 인위적인 것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들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안타까운 것이다.(음악, 행동, 기자재 등등)
신령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거슬리는 요소를 온 교회 속에서 제하고 각 개인 속에서도 제거하여 사람들만 모였다 흩어지는 모임이 아니라 성령과 더불어 깊은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는 복된 예배가 되시기를 …
2.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한다.
예배는 신령만이 전부가 아니다. 진정이 함께하지 않으면 신비주의에 빠지고 외형적인 것을 무시하게 될 수 있다. 진정이라고 하는 것은 겉치레나 형식, 거짓과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사마리아는 거짓된 예배였고 유대인들은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것만 남아있었다.
진정은 사실을 바탕 한다. 성경의 사실과 반대되는 인위적인 모든 것은 반드시 배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에 나타나고 계시된 모든 하나님의 진리를 바탕으로 하는 예배이다. 여기에 구약의 제사의 원리가 나타나게 된다.
제사를 드리는 근본적인 이유와 그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바로 이해하고 드리는 예배여야 한다. 사마리아인들은 이것이 전혀 없이 예배를 드렸고 유대인들은 사람의 편리와 유익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진리를 개조해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주님은 예배에 있어 진정을 가르치시게 되는 것이다.
제사나 예배는 왜 이 행위를 행하는가에 대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①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 죄를 해결 받기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죄를 위하여는 ②대속이 필요하며 ③피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사의 이유이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복음으로 완성된 예배도 사도행전을 비롯한 초대 교회 속에서 이러한 모습이 분명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주의 만찬이 예배의 중심이 되었고 “이것은 몸, 이것은 피” 라는 소리를 밖에서만 듣던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먹는다는 오해까지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이후에 카톡릭의 말씀이 없는 성례전 중심적인 예배에 너무 민감한 나머지 말씀 중심의 예배라는 기치가 너무 지나쳐서(물론 종교개혁시대에는 주님의 만찬도 행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가르침(설교) 중심으로 되어버린 오늘의 예배는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예배이다. 그럴 때 진정을 회복하는 예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가르침이 무시된 예배는 반드시 처음의 상태로 되돌려야만 한다.
회복된 참예배만이 하나님과 만나는 ‘경외감’과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에 푹 빠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과 육의 전부로 드리지 않으면 만족치 않으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성령의 충만과 객관화 된 예배의 명령들인 진정이 모두 회복되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
하나님께서는 바른 예배자를 찾으신다.(23b)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신다. [찾으시느니라, 헬, 제테오(zeteo), 원하다, 바라다, 조사하다, 얻으려고 노력하다, 요구하다, 기다리다, 구하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배자를 찾으신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사람이 복음에 따른 실천적 삶에도 충실할 것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곧 거룩한 봉사의 의무를 강하게 느껴서 봉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는 곧 순종과 선행으로 연결되어 진다.
일보다 예배가 앞서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이다. 이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먼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예를 드리고 그 예배의 감동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할 때 보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예배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드리는 무지의 사마리아 예배가 많다. 의식만 장엄한 유대인 같은 제사도 있다. 참예배는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음에서 출발하고 장소에 구애되지 않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려야 할 이유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예배는 세상이나 사람들은 절대도 가르쳐 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만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의 예배도 성경에서 명령하고 있으므로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무리 합당한 이론이 있을지라도 진리의 예배자에게는 큰 손실이다.
만일 내가 생활의 근심 걱정 때문에 성경을 멀리한다면 영적으로 큰 손실을 입는 것이고, 성경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한다면 나는 영적으로 도둑맞고 사기를 당하는 것이고 영원에 손실을 입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는 주님의 요청에 합당하게 응답하고 예배하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