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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고 따르는 소위 말하는 성인(聖人)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가장 분명한 차이를 나타내는 주님의 역사의 부분을 다루게 된다. 인간 이성의 최첨단이라고 하는 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이 부분이기도 하다. 사람의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일반적으로도 이해가 가능하지만 죽어 있던 사람이 다시 살아 난다고 하는 부분은 사람의 지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다.
또 일반적인 어떤 사람들의 죽었다가 살아난 부분은 본인의 의사(意思)나 형편에 상관없이 일어나는 사건들임에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본인이 죽으시기 전에 이미 여러 번 예언했었다는 사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다.
이 역사 속에 많지는 않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고 성격 속에서도 몇 번 기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사람들은 성경 안의 사람이건 비신앙 세계의 사람들이건 다시 살아났지만 분명히 다시 늙어 죽었지만 주님은 살아나신 후 영원히 다시 죽지 않으셨고 또 죽으실 수 없는 분이셨다는 사실이다.
구약성경 속에서 엘리야나 엘리사 등등의 유명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사람을 살린 일이 있었고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비롯해서 나사로 등등의 사람들의 죽은 생명을 기적으로 되살리시면서 선언 하시기를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마르다에게 물으셨던 주님의 말씀에 대한 사실로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살아나신 삶과 죽음의 주님이심이 입증된 구원 복음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주님의 죽으심은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것으로 죄의 용서는 받는다고 해도 의롭다고 선언 받을 수는 없기 때문에 부활을 통해서 사죄와 구원을 완전히 증명하시기 위해 무덤을 부끄럽게 하신 사건이라는 데서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의 역사이기도 하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주님의 연약해 보이는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그 죽음 속에 잡혀있는 자들을 죽음의 저주에서 끌어 올리고자 하는 놀라운 계획의 과정이 주님의 죽음에 숨겨져 있었고, 사람이 영원히 살아도 고통과 절규의 영원함이라면 사실 짧은 것만 못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희생의 역사는 그 저주 즉, 죽음을 가져온 죄의 문제까지도 도말하시는 놀라운 비밀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 뒤에 감추어져 있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다는 승리의 쾌재를 불렀겠지만 십자가야말로 영원 속에서 순간과 영원을 동시적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을 살려 놓는 기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여 장사 지낸바 되는 세례에 동참한 사람들은 그의 부활을 본받아 반드시 죄로 인한 죽음과 절망의 저주를 벗고 부활의 영광의 몸을 입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도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모두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부활의 역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본문을 생각하기보다는 또 다른 측면의 내용들을 나누며 주님의 능력의 역사를 경험하는 …
Ⅰ.마귀의 인봉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찢었다.(1~2)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극진히 사랑하는 주님을 장사 지낸 어둠이 내리는 골고다의 무덤 앞에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27:61)는 모습을 본바 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의 사랑과 정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음을 여기서도 본다. 니고데모와 부자 요셉이 충분한 향 재료를 써서 주님을 장사 지냈음에도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1b) 라는 기록을 이 첫 부분에서 보게 되는데, 왜 이 아직 밝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에 다시 무덤을 찾았는지의 이유를 마가와 누가가 기록을 하고 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막16: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눅24:1)
비록 그 여인들은 부활을 기대하고 가지는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들이 주님을 극진히 사랑했다고 하는 한가지는 분명하고, 주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고 했던 그들이 맨 먼저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전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신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은혜의 약속을 이 여인들이 확인하게 된 샘이다.
다시 지난 번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27:66 에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는 기록을 회상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은 당시의 세상왕권의 대표자인 빌라도에게 주님의 무덤을 인봉할 것을 부탁했고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에는 다른 무덤과 다르게(죽어 있는 무덤에 인봉하는 역사는 사람에게는 없다.) 당시의 세상 임금의 권세인 시저(Caesar)의 대리자인 빌라도의 인장이 붙여졌고 이것은 사실 세상 임금인 마귀 권세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최고의 권세자의 인봉이 붙여진 주님의 무덤은 세상의 다른 어떤 권세자들도 열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 이유에서 오늘 본문에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2) 라는 기록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마귀 사탄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세상 최고의 권세자의 인을 치고 승리의 축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덴의 범죄 후에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심판의 내용[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을 미쳐 몰랐을 뿐만 아리라 생명이신 주님을 무덤으로 가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만주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하나님의 권세로 열 줄을 미쳐 몰랐던 마귀는 세상의 최고 권세의 인침으로 주님의 생명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이유에서 가이사의 권세로 인봉한 무덤을 하늘의 권세로 천사를 통해서 열었고 절대적인 권세자가 부리시는 천사가 그 가이사(Caesar)의 인봉했던 돌 위에 앉았던 것이다.
오늘도 인간이나 세상의 권세나 돈으로 열 수 없는 문을 하나님께서 여실 것이다. 아니 마지막 나팔의 순간에 모든 무덤은 열릴 것이고 잠자던 모든 성도들을 천사들이 깨울 것이다.
Ⅱ.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무서움(두려움)이 정복되었다.(4~5, 8, 10)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 할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오늘 부활의 역사 앞에 네 번씩이나 ‘무서워하다’와 ‘무서움’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4)는 죽음의 문을 지키던 세상의 권세와 힘을 가진 자들이 무서워 떨었다는 모습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5)는 천사의 위로가 서로 다른 대상에게 나타남을 본다.
이러한 천사의 전갈을 들은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경외감과 구원의 감격)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8)라는 하나님의 하신 놀라운 일에 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경외감과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주님의 부활에 대한 감격이 교차하는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의 표현과 함께 다시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10) 하신 격려, 이런 다소간의 차이가 있는 의미로 기록이 되고 있다.
[무서워하다, 헬, 포베오(phobeo-동), 헬, 포보스(phobos-명), 경악하다, 두려워하다, 경외하다, (대단히)무서워하다, 놀람 혹은 공포, 두려움]
사실 이 세상에 두려움은 죄로 인하여 오게 되었고 죄의 결과인 죽음에 대한 공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무서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해결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공포라는 것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무서워하고 그 무서움을 쫓아버릴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은 바로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같은 공동묘지에서 군인들과 여자들이 있었다면 일반적으로 더 무서워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여자일 것임에도 주님을 극진히 사랑하고 사죄의 은혜를 누리는 여자들은 하나님의 하신 놀라운 일에만 경외감을 가질 뿐 대신 ‘큰 기쁨’으로 무덤을 떠나고 있는 데 반해서 무장한 군인들은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는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 일반적인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은 그리스도인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2:14~15) 라는 주님의 이루신 구원으로 무서움을 쫓아 버림에 대한 감사를 노래하고 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두는 생명의 주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찾아 주신 죄와 죽음에서 자유 한 은혜의 사실이 죽어도 살 주님의 약속을 믿으므로 결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지 않는 저와 여러분 …
Ⅲ.죽음은 부끄러운 속살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다.(5~7)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같은 내용을 기록하는 누가의 전하는 내용을 참고해 보면 천사는 여자들에게 “…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24:5)고 말하면서 이어지는 6~7절에 살아 계실 때 하셨던 말씀을 다시 기억시키고 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6) 분명이 무덤은 빛과 단절되고 어두움과 썩는 냄새로 코를 막아야 할 정도의 파괴의 장소이며 그러므로 당연히 무질서와 혼란의 장소여야 정상이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께서 무덤을 빠져 나오신 상황을 더욱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고해 주고 있다.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요20:6~8)
주님의 부활이전까지 무덤은 이 역사 속에 왔던 사람들을 다 삼키고도 만족을 모른다고 솔로몬은 탄식한다. “음부와 유명[지옥과 저승]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잠27:20)
그러나 주님께서 죽음의 저주를 박차고 나오신 무덤은 지금까지도 비어있어서 생명의 주님의 희생에 따른 패배를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5:17) 다시 21절에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 이상 무덤은 사람을 삼켜 뼈만 남기는 소화기능을 상실했다. 주님께서 살아나온 무덤이 여전히 그대로 있을 뿐만 아니라, 무덤들은 마지막 주님께서 이 땅에 심판주로 임하실 때 자신 속에 들어 온 모든 자를 토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20:13~14)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죄 씻음을 받은 자들은 더 이상 무덤을 두려워 하지않을 것이며 무덤이 오히려 그리스도인을 두려워 하게 되어 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돌리는 …
Ⅳ.안식일은 폐하여지고 승리의 예배의 날로 변화 되었다.(1~3)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율법의 최초의 변화를 이 승리의 새언약의 역사 속에서 본다. 이 세상의 창조의 역사를 마무리하시고 이레째 되던 날 안식하셨던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과 맺은 율법 속에서 안식일 계명은 대단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계명으로 주어져 있었음을 보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십계명에서 제 사 계명을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대개의 경우 소극적인 계명들은 “지키라!”는 명령들이다. 다른 말로는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령들이다. 예를 들면 십계명 중에서 그래도 하라는 명령은 이 안식일 계명(아무 일도 하지 말라)과 부모공경에 관한 “~하라”는 명령은 두 계명에 불과하고 “~하지 말라”는 계명이 여덟 계명이다. 율법의 조항들은 ‘이방인을 본받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경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등등의 계명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범죄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긍정적인 행위가 없기 때문이다. 죄인들은 할 수 있는 것은 범죄 하는 것이 더 쉽다. 그래서 전과를 가진 사람들을 교도(矯導)하는 것이 더 어렵다.[쇼생크 탈출-도서관장]
그러나 죄를 벗은 의인으로서의 인간은 이런 금지조항보다는 격려조항이 대부분이다. 복음 속에서 주신 명령들은 거의가 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다. “사랑하라, 감사하라, 기뻐하라, 기도하라, 찬양하라 용서하라” 등등의 명령들이다. 가령 교회 속에서 실제적인 신앙의 삶의 부분이라고 하는 로마서 12장을 봐도 그렇다.(NT에서는 부정적인 것들조차도 긍정을 위한 것들이다.)
사실 이것이 에덴에서 범죄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적인 명령들이었다. 금지 조항은 하나밖에 없었다. 일그러지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면 무엇을 해도 아름다울 것이고 그 모습이 바로 주님의 모습이셨다.
범죄에 속한 인간에게 주신 육신의 일을 쉬면서 신령한 영적인 세계에 마음을 쓰게 했던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부정적인 계명조차도 이제 그 죽음이 장사 된 무덤 속에 남겨둔 체, 그 절망의 무덤을 박차고 회복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감사와 찬양이 충만한 승리의 감사가 생명의 빛과 함께 어우러져서, 절망으로 인생을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던 과거의 죄에서 자유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감격을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손과 발을 제약했던 안식일은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살아계신 주님을 영화롭게 예배하는 감격의 날이 되었다. 할렐루야!
때문에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던 의문의 계명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날에 그 승리케 하신 이유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게 되는 것이다. “…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4~26)
아담이후 범죄 한 모든 사람들을 무덤의 절망에 가두어, 죽음 길은 영겁의 절망으로 닫혀졌던 비극의 마귀 사탄의 인봉은 그와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로 열려졌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무서움과 절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정복되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죽음도, 공동묘지도 더 이상 무서움의 장소가 되지 못하고 다만 생명을 찾아주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경외할 뿐이다.
주님의 부활의 역사로 말미암아 여태껏 죄의 대가로 저주와 어두움에 감추어 져있던 무덤은 부끄러움의 속살을 들어내고 빛의 광명이 비치게 되어 더 이상 모든 사람들을 영원한 저주에 잡아 두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는 사죄와 의롭다 함을 얻은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경계 되었던 율법을 완성하셔서 적극적이고 감격적인 조항들로 바꾸어졌는데 가장 먼저 예배의 날을 받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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