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삼상 7:1~17 2006-05-01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  
☞야외 예배로 음성 녹음에 실패하여 텍스트 파일은 올리지만 음성은 다른 것을 올립니다.☜



롬1:18~25 “그의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보여 핑계치 못할지니라!”

우리는 자연 앞에서는 사실 어떤 설교도 의미가 없어짐을 배우게 된다. 자연 그대로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주님의 위엄을 드러내기 때문에 말로 전하는 설교보다는 보이는 메시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시19:1, 3~4f)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자연 자체를 신으로 보고 피조물들을 창조주처럼 경배하는가 하면(모든 우상은 자여의 형상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자연을 보면서도 오히려 또 다른 신을 만들어내고 섬기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은 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 사용과 거기에 반응하는 우리 사람들의 영적인 부분들을 나누면서 우리 각자가 적어도 핑계치 않아도 될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들이기를 …



Ⅰ.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보이다, 헬, 파네롯(phaneros), 빛나는, 즉 분명한, 나타난, 표면적인, 드러난, visible; 막4:22; 행7:13)

1.하나님은 인간의 양심에 자신을 나타내신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19)

사람들은 비도덕적이고 범죄라고 여겨지는 일들을 행할 때 누가 그것을 지적하지 않아도 분명이 마음으로부터 제재(制裁)를 받는데 이것을 가리켜 양심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를 듣지 못한 자들에 대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4~15)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범죄 한 인류는 이 양심마저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

그러므로 인간 속에 나타내셨던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보이지 못하고 일그러지게 나타나게 되고 만다. 깨진 거울이나 출렁이는 물에는 형상이 절대로 바로 비추이지 못하는 것처럼 마귀 사탄에게 화인 맞고 일그러진 양심에 하나님께서 바로 나타나실 수 없으셨다.

2.하나님은 그 피조물을 통해서 자신을 보이신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20f)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죄로 인해 굳어져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이지 하나님은 자신을 수없이 자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고 알리셨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욥12:7~9)

그러나 역시 아무리 보여 주려 해도 못 보는 것은 역시 범죄 한 인간의 눈이 문제이다. “우준하여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렘5:21)

3.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20b) 하나님은 인간들 속에 양심을 통하여 자신을 보이시고 이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통하여 자신을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절대로 침묵하고 계신 적이 없으시다.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행14:17)

핑계는 절대로 충성 된 자들은 하지 않는다. 언제나 게으르고 악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핑계이다. 하나님은 속으로도 겉으로도 쉼 없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결국 핑계는 호소력을 잃게 된다. 몰라서 그랬노라고 핑계치 못할 만큼의 증거들을 충분히 주셨다.

어느 시대 누구보다도 증거를 충분히 가진 우리 모두는 아무도 핑계로 변명하는 자가 아니라 감사로 찬양하는 자리에 서는 …



Ⅱ.그러나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들 관계 속에서 서로 안다고 하는 것은 여러 관계가 있다. 이름은 들었다. 그 사람의 성품을 안다. 그 사람의 식성이나 취미까지를 안다. 경쟁자로 안다. 같은 직장인으로 안다. 그 사람의 목표를 안다. 친구로 안다. 가족으로 안다. 부부의 관계로 안다. 등등 안다고 하는 수준이 다 다르고 관계 속에 사용하는 언어도 다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입장에서도 천차만별(千差萬別)의 차이를 갖는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 그분의 하신 일을 안다. 나를 위하여 하신 일을 안다는 등등의 앎의 깊이는 곧 신앙의 깊이가 될 것이다.

1.영화롭게 하며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첫째 조건이다.(21f)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그러나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는 반드시 그 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아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창세전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시고 복 주신 이유를 3번씩이나 고백한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6)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1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라는 모습은 사랑 받는 자세가 아니다.

2.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앎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지적한다.(21b~22)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사람이라는 존재 속에서 하나님을 제해버리면 사실 짐승과 다름이 없게 되어 버린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실 짐승과 다름이 없이 산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영원에 대한 관심도 없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15:32) 하고 짐승처럼 오로지 강한 것을 위해서 훈련한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은 절대로 영광을 취하지 못하신다. 생각도 미래도 없는 짐승 같이 초라해 지고 만다.

3.결국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추한 것으로 바꾸고 만다.(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결국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면서 자신과 교제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러한 속성이 남아 있어서 무엇인가를 섬기고야 안심이 되는데 그 하나님의 자리에 결국 피조물을 앉히고 그것에 자신을 맡기는 어리석음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도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사44:15~17)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17:23)



Ⅲ.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18, 24~25)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을 영화롭게 받들지 못하면 오히려 진노케 해 드릴 수 있다. 그러한 형편은 돌이킬 수 없는 무서운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를 볼 때 그 비극의 정도를 알게 된다.

1.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대상을 주님은 분명히 말씀한다.(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①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 ②경건치 않음 ③불의 ④하늘로 좇아 나타나

[진노, 헬, 오르게(orge),(마3:7; 롬3:5). anger, wrath, (마음의 흥분으로), 난폭한 열정, 함축적으로 징계, 노, 분, 복수, 진노] [불경건, 헬, 아세베이아(asebeia), 불의, 헬, 아디키아(adikia), injustice; (법적) 불의(본래의 의미로는 불의의 성질), 도덕적으로 (불의의 성격, 생활, 행위) 사악함] 모두가 다 하나님과 반대편의 용어들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다.

2.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저주 받은 대로 버려 두신다.(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사람에게 버림을 당해도 비극이고 절망인데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다는 것은 완전히 절망의 끝이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26)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8)

3.이런 사람들은 어쩔 수없이 피조물로 조물주를 대신한다.(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우리는 앞에서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감 없이 들어낸다고 했다. 그러나 그 자연이 곧 하나님은 아니다. 그럼에도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Ⅳ.그러나 주님은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5b)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말씀 바로 앞에서 바울 사도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6~17)고 복음의 놀라운 능력을 선언하고 이 복음이 주님을 순종하는 모든 자들의 삶과 정신은 물론이고 인간의 모든 것을 바른 궤도로 회복하는 생명의 능력이 된다고 증거 한다.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죄로 인해 저주와 절망으로 가는 사람들을 위해 죽으시고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하여 부활 하시고 하늘에 승천하시고 그 구속의 십자가를 믿고 순종하며 의지하는 자들을 다시 데리러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0~31)

참으로 그렇다. 사람이 자연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아직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연에 더해서 완전한 계시인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말씀을 주셨다. 그리고 이 말씀을 자연을 통해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죄진 인간을 사랑하시는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게 하신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19:7~10)

자연은 하나님의 형상을 계시하는 가운데 바로 우리 모두의 신앙의 모델이다. ①변함이 없다. ②순종한다. ③자기의 자리를 지킨다. ④희생적이다. ⑤회복이 빠르다. ⑥탐내지않는다. ⑦자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마음 구원코자 하는 긍휼, 겉으로 속으로 끝없이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핑계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미련하고 어리석어져서 하나님 자리에다가 자연을 대신하게 된다.

그런 사람을 복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저주의 대상이 되고 버려져서 동물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 범죄 한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려는 이유는 사죄의 은혜를 누리고 복주리셔는 것 뿐이다. 그래서 자연을 통해서는 그러한 완전한 의도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성경)을 주시고 그 성경의 결정판으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고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셨다. 그러나 오늘도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연을 통해서 신앙의 자세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