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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7:51~66 2006-04-23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지난 주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를 채찍을 맞아 가면서 죽음의 언덕으로 힘겹게 오르셨고, 해골의 언덕, 절망의 골고다가 된 인류를 위하여 피 흘리시고 돌아가신 주님의 운명의 순간까지를 상고한 바 있다.

주님의 피흘리심, 십자가 희생이 만 인류 즉, 복음 이전의 사람에서부터 이 역사의 종말까지의 모든 사람들의 속죄를 위한 것이 첫째의 목적이지만 그 은혜와 긍휼의 역사는 단순한 인간의 영혼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전 인격의 회복을 위해서임을 증거 한바 있다.

범죄 한 이후의 모든 인류는 인격에 있어서도 비정상이 되어서 대부분 해골처럼 머리형의 인간, 이성화 된 인간이 되서 ‘진리냐 생명이나’라는 가치보다는 ‘합리적이냐 비합리적이냐’ 하는, 사랑의 자리인 가슴을 상실한 모습으로 가슴으로 느껴야 될 것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또는 머리로 이해해야 할 것 조차도 너무 감정으로 치우치는 불 균형의 인격이 되어 버린, 인간의 회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에 쏟으신 생명의 피로 회복되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눈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 인류를 대신해서 받은 십자가 상의 저주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모두 충족시키시기 위한 역사였다고 하는 입장에서도 그리스도의 고독과 고난은 극에 달했음을 감히 짐작케 한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범죄 한 모든 인류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절정이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의 십자가의 이해는 범죄 하여 저주의 운명이 된 인류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용서와 사랑의 절정이다. 죄를 거저 용서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독생자의 저주를 통해서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 하시고자 하는 절대적인 애정의 성취였다는 데서 주님의 구원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은 그 대속의 죽음이 그 죽음의 현장과 이 역사에 끼친 실재적인 결과와 거기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또 다른 믿음의 고백을 여기서 읽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의 완성은 그 죽음의 언저리에 또 다른 결과와 반응들을 불러 일으키는 모습을 본다.



Ⅰ.사람들에게 감춰졌던 지성소가 열렸다.(51~56)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에 가장 첫째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51f)었다는 기록이다. 출애굽기26:33에 “휘장을 갈고리에 걸어 늘어뜨리고 그 휘장 뒤에 증거궤를 모셔라. 휘장으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막는 것이다.”(개역개정)라는 기록을 보는 것처럼 법궤를 모셔둔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는 간격을 바로 두꺼운 휘장으로 가렸고 그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속죄일에 모든 성결의 제사를 자신을 위하고 백성들을 위하여 드린 다음에 금방울을 달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출28:34~35)

보통 사람들은 물론 제사장들까지도 도저히 들어가 볼 수 없었던 지성소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시면서 동시에 열려 버린 것이다. 더 이상 성소는 은밀한 선택된 대제사장들만 접할 수 있는 구별된 곳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가르쳐 이르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 이후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힘입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은 구약의 제사장보다 더 나은 제사장의 신분을 얻게 된 것이다.(벧전2:5, 9; 계1:6, 5:10, 20:6)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1:6)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5:10)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20:6)

거룩한 제사장의 지위 이것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부여된 지위가 아니라 새언약의 복음에 속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이후 거룩한 ‘성도’라고 구별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두려움으로 일년 일차에 지성소에 들어 갔던 대제사장의 지위보다 더 나은 지위를 얻었다.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외에는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주님을 섬기게 되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 하심으로 나타난 두 번째 증거는 완벽한 설명은 불가능하지만 닫혀 있던 무덤들이 죽음에 잡아 두었던 사람들을 토해 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51b~53) 이 모습은 심판주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먼저 보여주는 모습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4:16)

무덤은 본래 에덴에 없던 것으로, 죄로 인해 아담이 낙원에서 쫓겨나 에덴의 동쪽에서부터 죄로 인해 생긴 죽음을 잡아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죄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감당하시자 죽음은 더 이상 왕 노릇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5:17)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죽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음에 잡아 두지 못하는 죄와 사망에서 완벽한 해방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믿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죽음의 세 번째 결과는 이를 지켜보던 그를 처형하던 이방인이 믿음을 고백하게 하였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54) 선택 받았다는 이스라엘이 십자가에 달아 죽인 예수를 보면서 이방인들이 믿음을 고백했고 이것은 고넬료를 시작으로 오늘 우리들의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구원의 예표가 되는 놀라운 최초의 고백이었다.

오늘도 같은 믿음의 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이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의 보혈이 유효하게 될 것이다.

이 단락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주님의 십자가에 운명하시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는 몇몇 사람들이 기록되고 있는데, 그들은 남자도 아니고, 병사도 아닌 여인들이었다. “예수를 섬기며[눅8:2~3]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55~56) 사나이들인 제자들은 팔고, 도망가기에 바빴으나 연약하다는 여인들은 비록 멀리 이지만 최후 죽음의 순간까지 주님을 지켜드리는 것을 보면 여성의 강함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믿음은 연약한 자 같으면서도 강한 자들이 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역사 속에서도 본다.



Ⅱ.숨어있던 제자들의 신앙 고백을 본다.(57~61)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로마인들의 관례에 따르면 처참하고 수치스럽고 최고의 고통으로 십자가에 죽은 시체는 밤낮 그대로 둬서 공중의 새들이 뜯어 먹게 하는 것이 십자가에 처형된 죄수의 시신을 처리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보니 죽음 후에 까지도 수치스러움을 사람들에게 주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관습은 달라서 시신을 욕되게 하여 나무에 달았을 지라도 해가 지도록 까지 두지 않는 것이 율법의 가르침이었다.(신21:23) 이런 이유에서 유대인들은 이미 예수가 죽지 않았으면 죽여서라도 치워 달라는 주문을 빌라도에게 이미 한 바 있었다.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요19:31)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57~58f)

아마도 이 요셉과 같은 지위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예수의 시체를 요구했다면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사실 이것 조차도 이미 구약의 메시야의 죽음에 이미 예언 된 부분의 성취라는 데 놀라움이 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53:9)

오늘 본문 보다는 병행되는 복음서들이 요셉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막15:43)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눅23:50~51)

어떤 이유에서든지 주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함께 한 기록이 없지만 죽은 후에 아무도 돌아보지도, 돌아볼 수도 없는 입장에서 주님을 장사해 드리고자 당돌하게 시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일을 위해서 늘 요소 요소에 일 꾼을 준비해 두심을 여기서도 깨닫게 된다.

또 한 사람, 바로 밤중에 주님을 찾아와서 거듭남의 비밀을 묻고 주님께 가르침을 받았던 니고데모도 이 일에 함께 함을 요한은 기록한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약 34Kg] 가지고 온지라”(요19:39) 비록 주님께 거듭남의 비밀을 물었다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3:10)고 핀잔을 듣기는 했지만 이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이루신 이후에 비로소 제자 됨을 나타내고 있음을 본다.

이 니고데모는 주님을 거절하던 공회원들 가운데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요7:50~52)라고 바른 말을 했다가 다른 이들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었다.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58b~59) 이 두 사람의 협력으로 주님은 아직 아무도 장례 된 일이 없는 새 무덤에 장사 되게 되는데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19:40) 평소에 주님은 이런 부드럽고 아름다운 천을 몸에 둘러보지 못하셨을 것이지만 죽어서 부활을 기다리는 가운데 썩지 읺을 육체로 귀하게 취급이 되신 것이다.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60)

분명이 이 일을 같은 산헤드린 공회의 동료들이 알게 될 때 불이익을 각오하고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이렇게 고백하여 성경을 성취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이 단락의 마지막에도 우리의 눈을 끄는 한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61) 스승을 잃어버린 허탈감도 있었겠지만 장정들도 있기를 꺼려 하는 공동묘지 무덤 앞에 두 연인이 서로를 격려하며 무덤을 지키는 것은 사실 오래가지 않을 일이지만 얼마나 갸륵한 사랑인지 모르겠다.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좇는다는 요한 사도의 가르침이 이미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가장 힘겹고 어려울 때 고백하고 실행하는 믿음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일 것이다. (366:3)“기쁜 때나 슬픈 때나 바쁜 때나 틈날 때, 예수 친히 하신 말씀 날 더 귀히 여겨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주신 주님께 우리 목숨을 바쳐 고백해야 할 때도 믿음을 표현하는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본 받는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되시기를 …



Ⅲ.범죄 한 자들의 여전한 두려움을 본다.(62~66)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여태껏 자신들의 행동을 감히 비난하던 사람들이 없었는데 감히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죽여 놓고도 저들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들의 공포감을 그대로 빌라도에게 고백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63) 그러나 저들의 말투조차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아부와 어리석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방 총독 빌라도에게는 “주여!” 라고 부르면서 진정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는 “유혹하던 자” 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표현 “유혹하던 자”란 예수에 대한 표현이나 사용은 오늘날에도 불신자들에게서 사용되고 있는 표현들이다. “예수 귀신에 씌우면 빠져 나오지 못한다. 가문 망친다. 조상들이 진노한다.”는 표현들이 예수를 행여라도 믿게 될까 봐 걱정하는 불신자들의 모습임을 종종 본다.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64)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사실은 나중에 예수의 부활의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하는 증거가 되는 것[마28:11~15]을 보면 하나님의 지혜 앞에 인간의 간교한 지혜가 얼마나 어리석은 가를 깨닫게 한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65~66) 사망과 절망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사람도 무기도 막을 수는 없다. 사실 공포를 가진 사람들은 남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모습들이 오히려 자신을 가두는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계3:7~8f)

두려움을 가진 자들은 어떤 것으로도 그들의 두려움을 없앨 수 없다. 공포라고 하는 것은 범죄의 결과로 오는 것이고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잠28:1)

주님의 죽음은 이 역사를 뒤집는 죽음이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영원히 멸망으로 잠겨있던 죽음의 족쇄를 끌러서 죽음의 저주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이루셨다. 이제는 힘없이 죽음에 바쳐지는 절망의 모습이 아니라 죽음을 향하여 호령하는 이김이 가능케 되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5~57)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에 사용된 사람들은 평소에 주님을 적극적으로 따르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평상시에도 늘 주님 편에 섰던 사람들이요, 오히려 주님을 변호하던 사람들로 이 절박한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들의 신분과 처지를 다 벗어 던지고 닥칠 불이익을 각오하면서 주님을 위한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는 인물로 역할 함을 보게 된다.

그런가 하면 평상시에도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8:2~3)던 여인들은 모든 제자가 도망가 버린 이 주님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의 능력을 힘입어 해골의 동산의 무덤을 사랑으로 지키는 무서운 사랑의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일을 막고, 행하려는 비리를 지적 받고 그것이 싫어서 자신들의 방법도 아닌 이 역사 가운데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형틀로 죽여 놓고도 안심이 안 되서 평소에는 진저리 나도록 싫어 하던 빌라도에게 ‘주’라고 하는 칭호를 가지고 아부까지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에 두려움을 가지고 군대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이 주님의 죽음과 장사에 믿음으로 동참하고 순종하는 자들은 죽음의 공포를 영원히 쫓아 버릴 수 있다. 바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고 회개하고 고배하고 세례를 받으므로 바로 이 죽음에 일치가 되고, 다음에 연결되어지는 부활에 하나가 되어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주님을 섬기고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보호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약속이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