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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계속해서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을 상고하고 있다. 지난 주에는 주님을 죽음으로 내모는 5가지의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 우리 각자가 그 중에 하나일 것이라는 교훈으로 우리의 믿음 생활을 점검한바 있다.
우리 각자는 가룟 유다처럼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할 수도 있고 빌라도처럼 권력을 더 사랑할 수도 있고 종교 지도자들처럼 칭찬과 영광을 주님보다 더 사랑할 수도 있고 선동 당한 군중들처럼 불합리하게 보이는 주님보다는 거짓된 부추김에 더 쉽게 움직여질 수 있음에도 당시의 살인과 민란과 강도 짓을 저지르고 당연히 사형당할 바라바와 같은 우리가 뜻밖의 대속적인 사형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살게 되었다고 증거 했었다.
오늘도 사뭇 많은 양을 다루게 되는데 십자가 상의 칠언 같은 자주 논의되는 부분들은 미뤄두고 로마의 사형 판결을 받아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의 언덕에 십자가의 죽음까지를 다루고 다음 시간에는 주님의 죽음이 가져온 결과들과 장례의 내용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사실 이 거룩한 구속의 역사를 더 이상 주석할 필요도 과장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이 내용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감사하게 하고 무릎 꿇게 한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정이면서 가장 귀중한 역사이지만 너무 진부하게 다루어 가는 것도 주님의 귀중한 대속의 희생의 가치를 약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반적으로 나누는 내용들보다는 다른 측면에서 이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조심스럽게 다루고자 한다.
Ⅰ.철저하게 버림과 조롱을 당하셨다.(27~31)
1.철저하게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시는 주님을 뵙니다.
①제자들로부터 3년 동안이나 주님의 그 수많은 이적과 기적을 옆에서 경험했고 기적의 떡을 먹을 뿐만 아니라 주님과 같은 이적을 행하도록 권능을 받아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10:17) 하던 제자들, 그들이 마지막 잡히시기 전에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슥1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26:31, 34) 하실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35)고 큰 소리치던 그들, 그러나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56)는 서글픈 기록 조차도 너무나 주님을 슬프게 만든 사건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여자들은 연약하기 때문에 도망갈지 몰라도, 제자들까지 주님을 저버린 것은 견딜 수 없이 외롭게 만든 사연이었고 이러한 모습은 오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일 것이다. 은혜와 사랑과 기쁨의 순간에는 주님을 믿노라고 큰 소리 치지만, 어려움과 힘겨울 때는 주님을 외따로 돌려두고[물론 이 반대일 수도 있다.] 나의 삶에서 주님을 고독하게 할 때도 있는 우리 자신들이다.
②당시의 자기 약속의 땅, 자기 민족으로부터 이 땅에 오시는 순간부터 구속의 생애를 마치실 때까지 철저히 외면을 당하시고 계신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요1:11) 이것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요, 우리의 이야기이다. 주님의 통치를 받는다고 하는 교회,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오늘 주님께서 찾아 오신다면 참으로 반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을 갖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도취되어 옆의 형제나 자매는 안중에 없고 나를 선전하고 높이고 자랑하는 세상 바닥의 자기선전 장 같은 교회에 주님께서 오셨을 때, 아니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우리 마음 밭에 과연 주님께서 계실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세상과 다름이 없이 추하고 더러워져 있는 우리 자신들이 되어 있지 않는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③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바로 구별하고 뽑으신 민족, 선택하신 계보, 언약의 말씀을 기록으로 주셔서 자신의 오심을 준비케 했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백성의 장로들이, 그 약속을 따라 오신 주님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삶에서 섬김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결국 그들은 주님을 섬기는 대신 명예와 영화를 섬기고 있으면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림보다 오히려 은근히 오지 않았으면 하는 못된 바람으로 자신들의 명예와 이익을 섬기는 바람에 주님은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고 계신다.
오늘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시고 죄에서 사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신 우리 자신들은 나은가! 전혀 그렇지 못함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사주신 거룩한 지위를 구약의 제사장의 자리로 생각하는가 하면, 반대로는 마치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 누구든지 수송아지 하나와 숫양 일곱을 끌고 와서 장립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 허무한 신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다”(대하13:9b)라고 하는 여로보암처럼 거룩한 성직을 영적인 자격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마구 남용하는 모습도 주님을 제외해 버린 불경건의 모습일 것이다.
④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여태까지의 사람들로부터의 버림 받음은 범죄 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할 수 있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범죄 한 세상의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철저히 외면을 당하셔서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45~46) 라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눈을 감으신 것처럼 어두움 속에서 고독의 탄식을 외치신다.
죽음의 순간까지 철저한 고독으로 몸부림쳐야 했다. 이것도 사실은 나를 위한 고독이니 어찌 하겠는가!
2.모든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신다.
①전혀 관련이 없는 로마의 병사들로부터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 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28~31)
당시 십자가형을 당하는 죄수들은 철저하게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감히 로마에 대항할 생각을 못하게 하는 본보기가 바로 십자가 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형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체로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해야만 했다. 이런 이유에서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절대로 이 십자가 형을 내리지 않았다.
②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39~40) ‘불구경하고 싸움구경은 놓지지 말라’는 속담처럼 자기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임에도 …
③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부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사실 예언이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41~43)
이것은 사실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하던 마귀와 꼭 같은 주문이었다.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4:6)
당시의 예수의 고발자들에 대한 요한의 기록을 보면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요18:28)는 웃지 못할 사연을 읽게 된다. 자신들은 관습적으로 깨끗함으로 유월절 음식을 먹고자 해서 이방인인 총독의 관저에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엄청난 살인죄를 저지르고 있으니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④극악무도한 죄인들로부터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 양편에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38)고 기록되어 있고 한사람이 회개하긴 했지만 그들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44)는 기록을 본다.
자신들은 당연히 당할 형벌을 당하는 주제에 의로우신 주님을 욕하고 비방하는 것은 죄의 사악한 속성이다. 조롱하는 사람들도 군병, 군중,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함께 못 박힌 강도 순으로 집행자, 구경꾼, 종교 지도자들, 죄인들의 의미가 있다. 이렇게 철저하게 모두로부터 버림과 조롱을 당하신 주님을 우리들 만이라도 욕을 끼치거나 모욕을 끼치지 않고 영광과 존귀를 돌릴 수 있기를…
Ⅱ.감당할 수 없는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구원의 말씀을 성취하신다.
사나흘이 기본인 잔인하고 무섭고 수치스러운 십자가형의 그 모든 고통과 수치와 두려움을 감해주기 위해 먹이는 마취제,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34)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인류를 위한 저주를 조금도 감하지 않고 감당하시기 위하여 이것조차 외면하셨다.
물론 나중에 다 죽어가실 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48)했는데 사실 이것도 구약 성경의 성취였음을 본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69:21) 그리고 죽어가시면서도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는 요한의 보충적인 기록을 보게 된다.
우리는 앞에서 온 갓 종류의 사람들이 다 우리 주님을 희롱하며 조롱했다고 했는데 이 슬픈 사연도 역시 예언되었던 메시야의 대속의 희생에 연결되어 있는 말씀의 성취였음을 읽게 된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22:7~8)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35~36)는 철없는 로마 군병들의 이 작은 욕심의 행위도 그냥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이사야를 통한 메시야가 당할 모습이었음을 본다.(사53:12)
이러한 내용을 사도 요한은 좀더 구체적으로 전하면서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요19:23~24) 하면서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라고 저들의 무지함을 비유한다. 오늘 교회가 잘못되면 이러한 모습일 수 있음을 경계한다.
주님의 마지막 피 묻은 걸음걸음 조차도 자신을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로 계획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약속을 철저하게 이루며 죽어가시는 우리 주님의 삶에 너무나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우리의 삶을 꺾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인류 구원을 위하여 계획하신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는 삶이 되도록 회개하고 돌이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될 때 “주님께서 나를 영원한 죄의 저주와 절망에서 사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Ⅲ.골고다 위에 생명과 보혈의 피를 흘려 주셨다.(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1.범죄로 해골의 동산이 되어 있는 이 골고다인 지구 위에 생명과 보혈의 피를 흘려 주셨다.
“골고다”는 죽음의 동산이다. 우리는 구약 에스겔37:1~10까지의 골짜기에 그득한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 군대가 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 역사를 경험케 하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 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37:11~14)는 진기한 말씀을 읽게 된다.
희락의 동산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 한 인류의 삶의 터전은 무덤으로 가득하고 하나같이 다 죽음에 바쳐지고 있는 공동묘지가 되었다. 이제 이 죽음의 뼈만 가득한 해골의 골고다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졌고 그 피로인하여 마른 뼈들이 살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바로 이 해골의 동산 위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의 역사로 시작되었다.
누구든지 생명 없는 해골같이 끔찍한 죽음에 거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순종하여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므로 골고다 그리스도의 피가 유효하게 이런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역사가 있어지고 이렇게 살아난 자들은 당연히 의를 위하여 싸울 수 있는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게 하셨다.
2.골고다에 흘려진 보혈의 죽으심은 가슴을 잃어버린 인간 회복을 의미한다.
해골의 동산에 피가 흘려졌다는 또 다른 의미는, 범죄 한 인간은 하나님을 느끼고 감격하는 가슴을 잃어 버린 비극을 회복시키려는 은혜로 이해해야 한다. 하와에게 뱀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거짓말은 바로 전인격적이지 못한 이성의 인간이 되리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범죄 후 진정한 사랑도 기쁨도 알지 못하는 가슴이 없는 인간이 되어 오로지 해골 즉 머리만 있는 차가운 인간이 되어버렸다.
가슴을 잃어버린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머리의 이성으로만 판단하고 머리가 뜨거워져서 터질 것 같은, 머리만 큰 가분수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사실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은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거운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삭막해 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이 메마르고 차가운 해골 위에 그리스도의 뜨거운 생명의 피가 흘려져서 가슴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골고다에서 피를 흘려 죽으신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보는 것이다.
우리는 마른 해골을 보면 섬짓한 이유는 피가 흐르지 못하는 죽어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슴에 뜨거운 피가 흐를 때 비로소 얼굴에 핏기가 돌고 손을 맞잡으면 따뜻함을 느끼는 것이다.
진정한 따듯한 피가 흐르지 못하는 가슴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영원한 사랑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 머리형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뜨거운 그리스도의 피가 새로운 생명의 가슴에 흐르게 될 때 비로소 인생의 기쁨을 알고 사랑을 알고 감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왕에 골고다에 흘려진 그리스도의 희생의 보혈을 여러분 각자의 해골 같은 머리에 부어지도록 주님께 허락하여 지정의(知情意)의 완전한 회복된 사랑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Ⅳ.이 최고의 거룩한 고통을 욕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밤새껏 기도하시고 문초 당하시고 지칠 대로 지치신 주님께서는 자신을 달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도저히 힘에 부치셨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아마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그 주위를 지나던 구레네 시몬이란 유대교에 귀의했다고 생각되는 이 사람이 주님의 형틀을 대신 지고 가게 된다.
병행되는 기록을 보면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15:21) 라는 기록을 읽을 수 있고 이 가정이 나중에 로마서에서 문안을 받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16:13)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대신 졌던 시몬은 그 아들과 아내까지도 믿음의 가정이 되어 복을 받은 것을 보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건 결코 손해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주님께서도 이 마태복음에서 조차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10:38)고 당부하셨고 다시 16:24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명령하셨다.
또 누가복음14:27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경계를 주고 계시다.
그러나 오늘날 신앙 하는 더러의 사람들이 이 최고의 거룩한 고통을 흉내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래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 오늘날 이벤트화된 종교 행위는 주님의 희생을 흉내낼 뿐, 진정으로 자신을 달아 죽일 정도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은 주님의 희생의 사랑을 약화시키는 위험이 있다고 하는 데서 경계 되어야만 한다.
우리 주님께서 골고다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모형으로 가볍게 만든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만약에 주님께서 지셨던 십자가의 행렬을 재현할 필요가 있다면 주님께서 지신 것과 같은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만 할 것이다.
넘어지고 쓸어지시며 힘겨웠던 그 사실적인 십자가를 져야 주님의 고통을 지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전시적으로만 지는 흉내 만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음이 주님의 희생에 손상을 끼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신앙의 행위든지 전시적인 모양만 내는 것들은 주님의 영광을 가릴 뿐임을 알아서 진실하고 꾸밈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행동이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희생을 약화시키는 어떤 행동도 주님의 영광을 가릴 분임을 알고 모든 진리의 말씀을 사실적으로 지킬 때 생명이 될 줄 믿는다.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스럽게 골고다를 오르시는 주님을 뵈면서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눅23:27) 했는데 여기에서도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고 오히려 당부하시는 모습을 본다.
죽음의 동산 해골의 동산 골고다에 피 흘리시는 주님의 십자가위에 빌라도가 써 붙인 죄 표를 보면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요19:19~20) 했는데 이것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만 인류의 왕 이심으로 선포하게 하신 역사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21)고 시비를 걸고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22)는 답변도 우연이 아니심을 확신한다.
주님은 오늘 나(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하여 제자들로부터, 약속의 땅, 자기 민족으로부터,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당하시고 전혀 관련이 없는 로마의 병사들로부터,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부터, 극악무도한 죄인들로부터 희롱과 조롱을 당하셨다.
그러면서도 감당할 수 없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도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사시는 모습을 본다. 범죄로 해골의 동산이 되어 있는 이 골고다인 지구 위에, 따뜻한 가슴을 잃어버린 인간 회복을 위하여 생명과 보혈의 피를 흘려 주셨다. 그러므로 그이 희생을 욕되게 해서는 안되고 우리 위한 저주와 죽음을 모두 친히 감당하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제는 우리 각자가 십자가를 질 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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