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마 27:1~26 2006-04-09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  
자신들 나름대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구실을 찾았지만 로마의 권력아래서 사형을 확증할 수 있는 권한을 갖지 못한 저들은 위대한 메시야를 죽이기 위해 이방인의 권세를 빌리기 위해 당시의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주님을 결박한 체로 끌고 갔다.

그런 저들의 행동을 마태는 숨김없이 이 역사 속에 고발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시작이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1~2)

이들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의 영적 지도자들도 잘못되면 얼마든지 이럴 수 있다는 경계로 경성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당시 외형적으로는 백성들로부터 최고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영적으로 눈이 멀어서 사람을 살리는 대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데 자신들의 정력을 모두 소모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본다.

오늘 우리는 상당히 긴 부분을 읽었지만 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각 사람들의 상황의 차이이면서 그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입장에서 어떻게 처리 되기를 바라는가 하는 줄거리들로 오늘을 사는 우리 각자에게도 비춰질 수 있는 결정과 행동들이라고 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이 말씀을 다뤘으면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희생으로 나아가시는데 등장하는 각 사람들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이뤄진 경계의 교훈으로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 각자는 더 이상 주님의 대적자로 남지 않고 온전히 십자가의 은총을 은혜로 누리는 …



Ⅰ.비극적인 역할로 예언을 성취시키는 악연의 주인공 유다가 먼저 이다.(3~10)

가장 경계 되는 인물이면서 아이러니 하게도 최근에 발견되었다는 유다 복음서의 소식을 듣는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구속의 역사 후에 한 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 인본주의가 신본주의를 밀어냈던 르네상스 운동이 한번 온 유럽을 휘감고 지나간 후의 이성주의자인 철학자 볼테르(Voltaire, 1694~1778 François Marie Arouet)는 계몽주의시대에 무신론자였다. 그가 선언하기를 자신이 죽기 전 사람들이 성경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라고 장담했고, 심지어 이와 같은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고 학교까지 세웠다. 볼테르가 1778년에 죽었는데, 그가 죽고 50년이 채 안되서 그가 세운 학교는 교회당이 되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한 성경은 그에 대한 모든 대항과 비평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끝날 까지 健在할 것이다. 성경은 영원하고 지속적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도구로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서 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런 부정적인 조짐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의심된다면 그것은 오직 不信의 사람들, 주님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게 진리가 가려질 분임을 성경은 선언한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3~4)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0, 12)

구원의 복음은 마치 팽창한 풍선처럼 이 역사 속에 존재하면서 결코 줄어들 수 없다. 마치 유럽이 복음에서 위축되면서 아메리카가 복음으로 부풀고, 미국이 위축되면서 다시 아시아로, 지금 죽의 장막(竹의 帳幕, the Bamboo Curtain)이라고 하는 중국이 복음으로 팽창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복음은 다시 아프리카와 유럽으로 세력을 펼쳐가고 있다. 물론 쉼 없이 땅끝을 향하여 이동하는 복음의 확산에 때때로 부정적인 이론들이 발생했지만 그것은 결코 지속적으로 힘을 미치지는 못하는 것은 복음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바로 이 우주와 역사의 창조주요 운행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믿습니까?

유다는 주님께서 사형판결을 받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이렇게 까지 되리라는 짐작을 못했던지 점점 비참한 취급을 당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있다. “그의 정죄 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3~4)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은 진정한 회개를 이루기보다는 저주의 모델이 되어서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는 것은 역시 그의 이러한 결정과 행동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일반적인 죄의 사람들의 행동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뉘우쳐, 헬, 메타멜로마이(metamellomai), - ‘뒤에, 후에’ 라고 번역할 수 있는 기본 전치사'메타(meta)'와 ‘꺼리는, 염려’ 등등을 의미하는 '멜로(mello)'가 합쳐진 말로 ‘후회하다’에서 진전이 없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돌이키는 ‘회개’ '메타노이아(metanoia)와는 다르다.]

팔았던 은 30도 돌려주고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고 고백도 하지만 결국 용서하시는 주님의 희생을 보지 못하는 까닭에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는 결과를 만들고 말고 이사실은 사도행전에서는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됨을 본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행1:18~19)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6~7) 사람을 죽이는 피값이라고 이런 돈은 성전에 두지 않으면서 참으로 죄없으신 주님의 피를 흘리는 담대함의 앞뒤가 서로 다른 저들의 사악함을 본다.

계속적으로 유다를 회유한 종교 지도자들은 또 다른 평가를 보겠지만 결국 유다는 비극을 예언한 구약 성경의 메시야 예언의 부분을 이루고 맒을 본다고 하는 것이 안타깝다. 유다는 단순한 물질의 욕심 때문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돈 몇 푼과 바꾼 대표적인 인물의 모델이다. 생명의 구원을 위해 주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으면서 이름없는 죽음들을 위한 토지 제공자로 만족할 인생이라면 그리스도를 따랐다는 의미가 없다.

구약의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도 허물과 죄는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회개의 삶을 살았고, 가룟 유다 같은 인물들은 자신의 실수만을 바라보며 긍휼과 용서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 데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성경의 예언들은 아직도 이루어지지않은 부분들이 많은데 우리도 보이는 이 세상의 것들에 치중하여 주님을 따르다 보면 영원한 영광의 예언의 성취자들이 아닌 비극적인 예언의 성취자들이 얼마든지 될 가능성도 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에 우리는 어떤 교회의 모형과 신앙인으로 역사를 성취할 것인가를 가룟 유다와 더불어 깊이 경성하여 모두가 은혜의 주인공으로 남는 …



Ⅱ.세속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의로운 자를 죽음에 내어주는 총독인 빌라도를 본다.

예수께서 분명히 의롭다는 확신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안정된 자리를 빼앗길까 봐 양심에 거리끼는 판결을 함으로 가룟 유다 다음으로 영원한 비양심의 소유자로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었다. 본문에서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반드시 놓아 드렸어야 할 증거들은 너무도 분명하다.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11) 직접적인 심문에서 분명히 주님께서 답변을 주셨고, 빌라도가 이 세상의 왕으로 오해하여 가이사에게 대항한다는 오해 조차도 없애기 위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고 확인시켜 주셨다. 그래서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눅23:4) 라고 선언도 했다.

그리고서는 다시 잠잠히 계신 주님을 향하여 “…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 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13~14) 다른 죄수 같았으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침을 튀겼을 텐데 침묵하시는 주님께로부터 죄가 없음을 다시 확인했다.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15~17)

다시 빌라도는 이 위기를 빠져나가고자 하여 유대인들의 풍습을 이용하려 하지만 역시 실패하고 만다. 성중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치를 떠는 바라바와 예수를 비교한다면 당연히 ‘예수를 놓아주라!’ 할 것이라는 빌라도의 약삭빠른 계산도 빗나가고 만다.

빌라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분명히 “…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알았기 때문에”(18) 군중들이 바라바를 선택하면 이들의 시기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라 짐작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음절에 보면 전에 없던 일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19)라는 아내의 간청으로도 이 예수의 무죄성을 확신할 수 있었다.

빌라도는 점점 자신의 한계와 위기를 깨달으면서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21~23) 물어도 물어도 되돌아 오는 대답은 한결 같다.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22b)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23b) 두 번씩이나 군중들이 소리쳤지만 사실은 이것은 온 인류를 위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결정이셨고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처리하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마지막까지 이루어져 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게 결국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한마디가 들려오고 만다. “…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19:12)

여태껏 가이사라는 권력의 그늘을 뺏기지않으려고 별별 이야기를 다 동원했는데도 되돌아 오는 반응은 변함이 없고 오히려 자신이 가장 우려하던 한마디를 듣게 되면서 빌라도는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마지막 결정을 하고 만다.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4)

양심도 영혼도 물로 씻을 수는 없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벧전1:19) 만 씻을 수 있다. 빌라도의 모습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피하려고 하는 수단이고 방법이며 소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은혜 없이는 죄의 용서는 있을 수 없다는 진리를 빌라도를 비롯해서 당시의 어떤 사람도 알지 못했다. 결국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던 빌라도는 죄를 전혀 찾지 못한 의로우신 주님을 죽음에 내어주고 만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4) 이 엄청난 불의의 판결을 내리면서도 자신은 무죄하다면서 거기에 대한 죄의 대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또 하나의 죄의 습성을 들어내고 있다. 이것은 모든 인류의 죄를 자신이 친히 십자가에서 담당하시려 는 우리 주님과는 얼마나 다른가! 어두움의 하수인은 큰 권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자신이 손해보지 않으려는 무서운 이기심을 본다.

오늘 우리도 어떤 경우에는 현재의 유리한 고지를 지키려 하면 빌라도처럼 예수를 또 다시 죽음으로 내어줄 수 밖에 없는 양심을 거슬리는 결정을 함으로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는 결과의 예수 처리를 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늘 하나님을 의지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믿음의 삶을 지속하는 …



Ⅲ.자신들의 영화를 위하여 의로우신 예수를 끝까지 죽음으로 내모는 종교 지도자들을 본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20)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가장 하나님 앞에 간악한 존재들일 것이다. 빌라도나 군중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야 무지해서 그런다 하더라도, 이들은 가장 죄벌이 무거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하는 것이고, 예언의 말씀을 분명히 읽고 있었음에도 저들의 악함과 욕심이 그들을 위해 그들에게 오신 그리스도를 죽이는 사악함을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바리새인들이 예전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9)고 백성들을 저주한바 있는데 이러한 그들의 선언은 사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선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단지 글자적으로나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경험 속에서 주님의 진리를 적용해서 검증되는 것을 안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에 진리를 가장 많이 접했다고 하는 저들이 사실 하나님의 구원의 뜻에 있어서는 가장 무지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저들로 하여금 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하신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쓰고 있는 것이다.

말씀은 바로 그들이 수 천년을 기다리며 고대하던 메시아를 예언했지만 자신들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서 적당히 생각과 버무려 버리는 바람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반기고 환영했어야 할 저들이 그 예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율법의 방법도 아닌 가장 잔인한 십자가 형으로 처리해 버리고 마는 것을 보면서 오늘 나 자신과 진리를 사랑하며 지킨다고 하는 우리 모두의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저들은 빌라도에게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빌라도가 헤롯에게 예수를 보냈을 때에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눅23:10) 라는 기록을 보면 예수를 죽이고자 온 갓 수완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 속 알 머리 없는 대제사장들은 로마의 무서운 압제에서 시달리면서도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요19:15) 라고 거짓 고백까지 한다.

가장 무지몽매한 군중들에게 까지 생명을 주지는 못할망정 충동질하여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동원시키는 것을 보면 잘못된 종교가 얼마나 사악한가를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속에서 자신들의 권위와 영광과 부귀와 바꾸고 만다.

이 부분이 우리 자신들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고 경계해야만 할 과제이다. 성령과 더불어 살아있는 믿음이 되지 못할 때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는 신앙인들이 우리의 지위를 잘못 이용하고 백성을 잘 못 선동하여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이는 도구로 잘못 사용하는 어리석음에 서 자유 하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Ⅳ.잘못된 가르침과 충동질에 속아서 생명의 주를 죽이라고 소리지르는 무지한 군중들을 본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20)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24b~25)

이들이 사실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던 주님께 “…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마21:1~11)던 바로 같은 그 군중들이었다.

사도행전19:21~41에 보면 에베소에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아데미 신전의 은감실의 직공들의 선동에 의해서 모였던 사람들에 관한 비슷한 표현 하나가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32) 군중은 진리나 정의 보다는 대개의 경우 특별한 사람들의 선동에 의해서 소리지르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이 죄악의 역사 속의 군중들이다. 언제나 군중의 다수는 선동에 의해서 움직인다. 또 이런 특징을 가장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 바로 정치가들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의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모이는 무리들도 사실 다르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런 집단은 어떤 경우 이익집단이 되기도 하고 진리를 거스르는 선동을 할 수도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고, 이런 다수의 무리는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고 물을 때 주님께 또 다시 아픔과 안타까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는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바로 알고, 군중의 입장이 아닌 개인적으로 주님을 깊이 알아서 적어도 선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우매한 무리로 역할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진리를 바로 알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하신 일을 바로 아는 무리들이 모일 때 비로소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귀한 하늘 나라의 백성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9) 라고 하속들과 군중을 싸잡아 비난한 바 있다. 참으로 진리를 모르고 모인 군중은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어리석은 군중들이다.

빌라도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4b) 라는 두려운 주문에도 “…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25) 라는 간 큰 장담은 바벨론 포로기보다도 더 심한 약 2천년을 나라 없이 방황하게 했고, 히틀러에 의해서도 천 만명 가까운 자손들이 한탄과 슬픔의 노래를 부르며 가스실에서 죽어간 것은 사실 이들의 어리석은 공언 때문이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사죄를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의 군사로 거룩한 싸움을 감당하는 …



Ⅴ.살인죄를 저지르고도 예수 때문에 죄에서 자유 하는 바라바를 본다.(16)

“그 때에 바라바[헬, 바랍바스(barabbas), ‘아바의 아들, 아버지의 아들]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흥미롭게도 복음서마다 평가를 각기 달리, 특이하게 하고 있다.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막15:7)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눅23:19)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요18:40) 이 사람이야 말로 모든 범죄자의 원형이면서 예수 때문에 가장 덕을 본 사람이다.

죄 값으로 당연히 죽어야 마땅할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음으로 살게 된 어쩌면 오늘 구원 받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유형의 사람이다.

가룟 유다, 빌라도, 종교 지도자들, 군중들, 바라바는 바로 오늘 나 자신이자 우리 각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