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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일 5:13~21 2006-04-02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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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57~6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

겟세마네 동안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는 각오로 마음을 추스리고 계시던 주님 앞에 일행 중에 그래도 제자들 중에 계산에 밝아서 일행의 쓰는 전대를 맡겼던 가룟 유다가 칼과 몽둥이로 중무장한 군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하속들을 이끌고 나타나서, 그들과 암호를 짜 두었던 대로 주님께 입맞춤으로 인사를 하고 그 순간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함께 장담했던 제자들은 하나같이 도망가고 주님만이 외롭게 이들에게 끌려가고 계신 모습을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다.

복음서마다 이 기록은 조금씩 보충적인 내용들을 다루고있는 것이 특징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요18:13)는 기록을 첨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누가는 주님께서 잡혀가시면서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눅22:53)는 당시의 사람들의 어두운 세력의 도구로 역할 하고 있음을 말씀하셨다.

사실 이렇게 된 것은 절대로 즉흥적인 일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이사야 선자를 통하여 예언되었던 사실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53:7~8)

주님은 사실 창세전부터 인류의 죄악을 대속할 제물로 준비 되시고 때가 차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실행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이었다. 그렇다고 볼 때 주님은 벌써 당할 일을 너무나 분명히 아시면서 이 간악한 인간들의 손에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성취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내어 놓으시는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도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58) 적극적이지 못한 미온적 신앙의 태도는 결국 수치를 당할 뿐이다. 베드로의 이러한 자세가 세 번씩 주님을 부인하고 눈물을 뿌리는 결과로 가고 마는 것을 보는 데서 경계 되는 믿음의 자세이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약4:8)고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권면 한다. 진리이신 주님을 멀리 하는 것은 그만큼 실족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가든지 주님을 가까이 하면서 불의와 타협치 말고 빛의 자녀로 행하므로 늘 흔들림 없는 생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



Ⅰ.하나님의 진리를 떠난 종교 지도자들의 추함을 본다.(59~63)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유대인들의 산헤드린 공회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최고의 의결 기구였다. 이 기관은 명목상으로 사형언도까지 내릴 수 있는 이스라엘의 자체 의회이자 판결기관 이었지만 당시 로마의 지배 하에서는 사형의 최종적인 재가는 총독의 허가를 얻어야 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여하튼 이 공회는 밤에는 모일 수 없고 특히 사형판결 같은 중요한 의결은 더더욱 밤에 할 수 없는 것으로 자체 법률로 장치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하는 시도에서 이들은 밤에 급히 모임을 갖고 자신들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인 새로운 신앙적 반란자라고 생각되는 주님을 제거하고자 하는 간교한 의도에서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법조차도 어기고 있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이들이 왜 이 모양일까 싶지만 사실 이들은 절대적인 법인 하나님의 법을 이미 버린 사람들로 주님의 지적을 받은바 있다.

이들을 향하여 주님은 “…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마15:3) 라는 책망을 하시면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15:8~9) 라는 결정적인 지적을 받은바 있다.

절대적은 하나님의 법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상대적인 사람들의 법 즉, 세상의 법이 있을 뿐이다. 세상의 법은 어느 나라의 법률이건 언제나 한계가 있고 그런 이유에서 계속 계정을 하게 되지만 세월이 지나게 되면 또다시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이 생기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불변의 법을 주셨지만 어리석게도 그 절대적인 생명의 법을 던져버리고 자신들이 만든 온전치 못한 세상법과 같은 법을 스스로 취하고, 지금 절대적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지 못하고 배척할 뿐만 아니라 죽이려는 엄청난 죄악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엘 시대에 왕을 구하는 것도 이런 유(類)다.- 삼상8:4~5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

저들은 이미 예수께 사형 판결을 확정해 놓고 그것을 합리화 하려고 증거를 만들고 있다.(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이미 판결은 확정해 놓고 모양새를 갖추기에 급급하다. 66절에도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죄로 인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반대로 사람을 죽이고 있다.

신앙이 잘못되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을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본다. 그래서 바른 진리에 입각한 신앙은 사실 생명이 걸린 문제로 대단히 중요하다. 양심에 화인 맞은 이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기다리고 소원했던 메시야를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고 있는 엄청난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약속한 메시야를 말씀대로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자신들의 생각에 맞게 각색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나름대로 설정해 놓은 메시야는 이렇게 유약하고 힘없는 사람이 아니라 큰 이적과 기적을 행하면서 당시의 로마의 정치적인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능력의 사람일 것이라고 기준을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의 기준에서 메시야일 수 없었고 그런 이유에서 자신들의 손으로 약속의 메시야를 죽이고자 안달인 것이다.

이래서 성경의 객관적인 진리의 바른 이해가 대단히 중요함을 깨닫는다. 그들도 메시야에 관해 예언한 구약의 이사야서를 수없이 읽고 또 읽었을 텐데 수난 당하는 메시야의 교훈은 저들이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저들의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큰 호령과 능력으로 임하는 메시야를 기대했기 때문에 저들은 이 땅에 재림하시는 주님의 다시 오시기까지는 아직 메시야는 오시지 않은 것이 되고, 영광 중에 재림하실 주님도 저들에게는 소망이 아니라 절망을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람을 죽여야 자신들의 위엄과 이익에 손상을 입은 것이 회복될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죽이려고 결정을 해 놓고 죽일 증거를 찾고 있지만 적절한 거짓증거는 너무나 모자라고 나타나는 증인들도 저들의 요구에 만족할 수가 없을 뿐이었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60)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60b~61) 라고 증언을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요한복음 2:19~21의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 말씀을 당시로서는 제자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 사람들이야 자기들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음절에 보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는 내용을 봐서도 분명하다.

계속 침묵하시는 주님 앞에 오히려 다급해진 것은 주님을 심문하는 이들이었다.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62) 그러나 여전히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63ff)

사실은 주님을 당시의 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 모셔가기 전에 요한 복음에 보는 대로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요18:13)[24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는 이유가 있었고 요한복음2:13~16의 말씀이 그 이유라고 보면 크게 빗나가지 않은 이해가 될 것이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성전 제사를 도구로 대단한 이윤을 챙기고 있었고 당시로서는 아무도 그러한 일에 감히 부당성을 지적하거나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갈릴리서 올라온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의 이 사업에 제동을 걸고 나서는 것이 제사장들의 기분을 대단히 상하게 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 물었다. “…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요2:18) 여기에 답변하셨던 말씀이 바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는 말씀이셨다. 그래서 이 심문의 자리에서 이 사건을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무반응이신 주님께 다급하고 성질이 난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63)고 다구치는 것이다.

이 모습을 가만히 상상해 보면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이 떠오른다. 벌겋게 닳아서 소리지르는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반대로 너무나 침착하고 조용하신 주님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아이러니 하게도 심문하는 사람은 생각 없이 물었는지 모르지만 바로 베드로의 입에서 나왔던 신앙고백이 이 사람의 입에서 주님께 고백이 아닌 질문으로 드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b) 라고 고백을 드렸고 이것은 구원을 얻으려는 모든 사람들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신앙의 중요한 과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은 오늘도 여기에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는 완벽한 신앙 고백이다. 오늘도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생명이 풍성 하시기를 …

기억합시다. 진리를 떠난 종교는 더 이상 사람을 살리는 종교가 되지 못한다. 마치 효과가 좋은 약의 농도를 자른 것을 섞어서 전혀 효과가 나지 못하는 쓸데 없는 약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이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율법과 성경은 우리에게 도덕적인 교훈 외에는 생명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가 충만 하시기를 …



Ⅱ.저주와 고통의 죽음 앞에서도 위엄으로 다시 오실 재림의 영광을 바라보고 계신다.(64~6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진리가 사실로 인정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본다. 여기까지 열이 나서 다구치던 저들에게 침묵으로 일관하시던 우리 주님께서 여기에서는 드디어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심과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위엄과 영광으로 저들을 포함한 온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미래를 선언하신다.

주님께서 왜 여기까지 말씀이 없으시다가 이 사안에서는 입을 여시는 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구구한 해석들이 있지만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63)는 질문에 응답하지 않으신다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응답이 말없는 것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사실 일세기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저와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누가 주님인가를 물을 때에 이 고백에 목숨을 바쳤고, 주님께서도 다른 이적적인 것에 대한 예를 들면 당시의 46년에 걸쳐 지어진 “성전을 헐면 사흘에 지을 수 있느냐?”는 식의 질문에는 답변할 가치를 못 느꼈지만 주님의 이 땅에 오신 직접적인 목적에 관한 물음에는 결코 침묵하실 수가 없으셨을 것이다.

또 이 응답은 주님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이 응답이 있기 까지는 저들은 아직도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었고 육신적인 눈으로 볼 때는 구약성경 레위기24:16에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는 계명에 위배된다고 생각되어 결정적인 증거로 선택을 하게 된 이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증거는 사실 앞에서도 이미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들었던 증거였다. 주님께서 요한복음10:30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시자 유대인들이 돌로 주님을 쳐 죽이려고 했었고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10:33)는 상황에서 벗어나셨던 일이 있었다.

이러한 대제사장의 증언을 들은 어리석은 무리들은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66)고 무지한 판단을 내리고 만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인간 같지 않은 저들에게서 조롱과 멸시와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당하실 것을 내다 보시고 각오 하시면서도 주님은 이미 죽음이후에 부활하셔서 영광의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가 진정한 심판주로 이 죄악에 찌들어 자신들은 물론이고 백성들조차 절망으로 몰고가는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공정하게 심판하실 영광과 위엄의 미래를 내다 보시면서 우리 죄인들을 대신한 이 치욕을 참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혹 신앙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생명을 인하여 고통을 당한다면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멀리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과 현실의 어려움으로 생명을 쉽게 포기하는 어두움의 세력의 영향을 더러 받게 되는데 우리 주님의 자세를 기억하면서 적어도 어두움의 세력에게 생명을 잃게 되는 양보는 하지 말아야 한 것이다. 믿습니까?



Ⅲ.벌레만도 못한 나의 허물을 위하여 주님께서 모멸을 당하고 계시다.(67~68)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이들은 자신들의 권한으로 예수를 죽일 수 없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넘기기 전에 주님께 최대의 모욕스런 포악을 다 행하는 것을 본다. 누가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우고 물어 가로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22:63~65)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선하신 주님, 죄가 전혀 없으신 주님께서 천한 죄인들의 손에 왜 이처럼 수치와 모멸을 당할 수 밖에 없으셨느냐 하는 것이다. 그 때까지도 가난한 자들을 수없이 거둬 먹이시고 소외당한 가련한 인생들을 위로하시고 죽을 병에 걸린 자들을 치료하시고 권력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가련한 백성들을 수탈하는 짐승 같은 존재들로부터 지켜주신 그 주님께서 왜 그 생의 마지막에 이런 대우를 받으실 수 밖에 없으셨는가 하는 가슴 아픈 사실이다.

이사야가 그 이유를 우리에게 분명히 전달해 주고 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3~4)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고 그 모든 사람 속에 포함되었던 오늘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제시한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죄로 인하여 마땅히 당해야 할 수치와 외면을 주님께서 대신 감당하셨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구속의 역사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지금도 우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 수치와 형벌을 그가 잘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당한다고 오해하고 있으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나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저주를 주님께서 대신 짊어 지심으로 오늘 죄의 저주와 중압감에서 자유 할 수 있게 된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면 지금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거짓 증거로 몰아 세우는 이들 무리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수시로 살아나는 나의 교만과 수치가 오늘도 주님을 슬프고 외롭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나를 위하여 모든 수치를 참으신 주님께 이제는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