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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시간에 주님의 눈물어린 간절한 기도 말미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어떤 형편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의를 이루기를 비는 주님의 처절한 기도와 함께 오늘 우리 자신들의 드리고 있는 기도들을 비교하며 생각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단한 혁명가요 반란을 계획하는 사람으로 오해를 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 오셔서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요2:14~16) 라는 모습을 보면서 대단히 폭력적인 사람으로 판단을 하고 주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를 매수하여 가만히 예수를 체포하고자 했던 것 같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눅19:38) 라고 평화의 주님을 찬양했던 군중의 반응과 달리 이러한 주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가장 잔인한 병기들과 몽둥이들을 동원해서 나타난 것을 보면 실패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하라는 작전명령이 내려졌고 단번에 끝내려고 작전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죄악에 길들여진 세상이 행하는 모습이다. 상대의 반응에 관계없이 권력과 무력과 사악한 지혜를 총동원해서 자신에게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단숨에 제압하려는 시도는 역사 속에 수없이 반복되었고 그러한 방법에 의해 권력을 잡은 무리들은 같은 방법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을 보면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52b) 오늘 주님의 말씀은 진리로 입증되고 있는 것을 가까운 우리 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본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도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이 행사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칼보다 강한 것은 펜이며 펜보다 강한 것은 사랑이요 희생이며 인격(人格)임을 확인하게 된다. 분명히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의도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데 빠를 수 있는 있지만 그것은 인격으로 제압하는 것보다 생명이 길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어리석고 무딘 방법일지라도 인격적인 사랑과 희생이 무기보다 사람들을 확실히 굴복시키는 힘임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배우면서 이 투쟁의 역사 속에 우리 각자의 위치를 바로 판단하고 세울 수 있었으면 한다.
Ⅰ.사랑의 이름으로 악을 행하는 사악함을 본다.(47~49)
자신의 동료나 스승에게 불만이나 서운함을 노골적으로 들어내 놓는 것은 아름답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진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원수이기를 자처하고 대적하는 것보다 더 비열하고 부끄러운 것은 제자인척하면서 스승을 욕되게 하고 아군인척 하는 적군 즉, 간첩이 더 사악한 것이다. 오늘 이 역사 속에서의 비극은 동료인 줄로 알았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움을 자행하는 것들이다. 이것은 바로 어두움의 세력인 마귀의 방법이다.
그런 일을 당할 때 우리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슬퍼하고 절망하게 되는데 그럴 때도 감사해야 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나로 인하여 바로 그런 일을 먼저 당하셨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그 일을 그대로 당하신다.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바보’가 되신 것이다. 누구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보가 되셨나? 바로 오늘 나를 위하여 주님은 간도 쓸개도 다 빼 놓으셨음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손해나 욕은 충분히 감사할 이유가 된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바보’가 되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 입맞춤의 인사로 주님을 죽음의 자리로 팔아 넘기는 가룟 유다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얼마나 주님을 여러 번 팔아 먹는지 모른다. 은 30이 아니라 크지도 않은 지극히 작은 일에도 예수를 아름다운 이름으로 얼마나 자주 팔아먹는지 모른다.[침례병원]
우리는 선생을 팔아먹고 죽은 가룟 유다를 흉보지만 사실 그 가룟 유다는 자세히 살펴보면 나 자신이다.
‘열 둘 중에 하나’ 이스라엘에서 대단히 영광스러운 이름이다. 가룟 유다는 가장 낮은 종의 몸값으로 이 영광된 이름을 팔아먹고 만다. 우리는 가장 말씀에 충실한다는 이름 ‘서면 그리스도의 교회’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대신 너무 쉽게 기죽어 하고 열등감을 느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유다는 그처럼 많은 교훈을 듣고 배웠으므로 복음을 들을 다른 제자들을 주님께 데려 오는 대신 주님을 사지로 데려갈 군인들을 데리고 어둠 속에서 나타난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 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47b),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눅22:52,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요18:3f]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48~49) 마치 야구 선수들이 싸인을 주고 받듯이 ‘내가 입맞추는 자가 예수’ 라고 미리 암호를 짜고 그 마음을 들여다 보고 계신 예수 앞에 간교한 인사를 올린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보다 못한 예수께서는 “…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22:48b)
늘 평화를 가르치시고 화평을 이룰 것을 가르치셨던 주님 앞에 어울리지 않게 군관들마다 칼과 몽둥이를 추켜들고 차가운 눈빛을 번쩍거리며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들었다. 그럼에도 주님은 주저함이 없이 저들에게 다가가셨서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요18:4~5f)
하나님 아버지의 원하시는 일이라면 가장 처참한 십자가형의 죽음 조차도 기쁘게 받아 들이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우리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우리는 사랑 입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랑의 이름으로 미움을 행하는 이중적인 삶에서 반드시 자유 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속에서 [입맞춤]은 가장 아름다운 인사 법이었고 1세기의 교회들 속에서도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사도들의 당부는 교회들마다 당부 되었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16:16; 고전16:20; 고후13:11; 살전5:26; 벧전5:14) 그러나 간교한 자들에게는 어떤 아름답고 귀중한 것들도 악으로 사용될 소지는 얼마든지 있었고 오늘도 그렇다. 사탄은 구원의 말씀조차도 시험의 도구로 쓰고 있는 것을 성경에서 본다.
바울은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고 선언하였다. 주님께서는 이 유다의 사악함 조차도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심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의의 도구로 평화의 도구로 복음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경성하고 깨어서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 …
Ⅱ.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는 폭력을 경계하신다.(50~52)
이 말씀 바로 뒤에 요한은 주님의 귀한 사랑의 역사 하나를 더 삽입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요18:4~8)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체포하려고 하면 ‘나는 아니다’ 라거나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주님께서는 너무나 태연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내가 바로 너희가 찾는 그 사람이다” 하시는 모습에 오히려 군사들이 놀라 기겁을 하면서 땅에 나뒹구는 것을 보게 된다.[빌립보 감옥의 바울과 실라]
이전에 초막절에도 예루살렘으로 내려 오신 예수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잡아오라고 군사들을 보냈지만 오히려 그들이 감동을 받아 돌아오는 모습을 요한 복음 7장 말미에 기록되고 있는데 예수를 잡으러 갔던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요7:46) 라고 오히려 주님의 인자 하심과 위엄에 굴복 되어 돌아 왔던 하속들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요18:8) 이 다급한 상황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의 안녕을 염려하심을 본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했지만 사실 주님께서 먼저 그들의 안전을 염려하셔서 보내신 것이다.
이러한 주님이시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고 주님의 인자와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님과는 다르게 제자들은 침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51~52)
공관 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는 베드로가 살아 있는 상황이었고 베드로에게 어떤 불이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름이 기록되고 있지 않지만 1세기 말에 베드로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에서는 가해자나 피해자의 이름을 다 기록하고 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18:10~11)
일단 칼과 몽둥이로 주님께 달려드는 이 상황에 성미 급한 베드로는 무엇인가를 군사들에게 해야만 한다는 성급한 판단이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눅22:50~51)
결국 이에는 이라는 율법에 익숙해 있던 제자들이었고 칼에는 당연히 칼로 맛서야 한다는 율법의 확대 해석이었을 것이다. 사실 사랑(선)으로 미움(악)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일을 당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악을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가 아니기 때문에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면서 베드로가 자른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본래대로 고쳐 주셨다. 나중에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배운 베드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고 권면하는 것을 읽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서슬이 파랗던 바울도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7~18)고 최종적으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당부한다.
오늘도 이러한 진정한 승리의 원리를 모르는 악으로 악을 이기는 악순환은 세계를 공포로 밀어넣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시 원수 된 인간을 대신하여 자신의 생명을 대신 내어주신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만이 모든 싸움의 화해 조약이고 평화의 헌장이다. 이런 원리는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늘이 원리이고 이성적인 과학의 원리가 아니라 희생의 십자가의 원리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18~2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b) 주님은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요구는 반드시 순종으로 이루어져야 할 절대 원칙임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 들에게 삶으로 확실히 가르치셨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좋은 것이든지 궂은 것이든지 동일한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이 역사는 엄청나게 변하고 세상은 많이 밝아 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쓴 잔도 단 은혜도 기꺼이 받겠다는 모두의 각오가 될 때 주님의 영광은 밝히 빛나게 될 것이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이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는 이 말씀을 지키는 자들의 영원한 보호가 되실 것이다.
Ⅲ.마지막의 순간에도 하나님 말씀을 이루려는 정대적 순종을 배운다.(53~5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를 부리시는 주님이시고 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의 주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건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시다. 믿습니까? 예수께서는 어떤 쇠사슬로도 견고한 감옥으로도 묶거나 가들 수 없는 분이시다. 지금 주님을 잡으러 온 군사들이야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고 십자가를 지시지 않을 수도 있고 십자가에 달리셨어도 못을 빼시고 내려 오실 수도 있으신 분이시다. 믿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헬, 레기온(legion), 고대 로마의 군단으로 약 6,000명ⅹ12=72,000]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53) 거짓입니까? 사실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읽으면서 열왕기 하 6장의 도단에서 아람 군대에 둘러싸여 엘리사와 함께 걱정하는 게하시의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7)
주님은 연이어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54) 주님은 자신의 신변상의 위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이셨음을 여기서도 본다. 말미에서도 다시 한번 같은 말씀을 주신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56) 히브리서 기자도 이 사실을 확인 시켜 주고 있다.“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히10:7)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이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 자신이 평안하고 출세하고 행복하기를 욕심부리는 것이 솔직히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생애의 탄생 전부터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마1:22) 라는 기록과 함께 주님의 생에 말미에 와서도 직접 그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확인해 주신다.
우리는 짐짓 “그거야 주님이시니까 그럴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육신으로 조금도 우리와 다르지 않으신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가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주님의 후예들이라고 할 때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믿습니까?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55~56) 결국 군인들의 위협이나 힘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임을 자신을 잡는 무리들에게 증거 하신다.
주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달라고 하시자,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오히려 요한 자신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권면에서도 “…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3:15)고 말씀하셨던 주님이시다.
그리고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35)던 제자들은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56)는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31)는 안타까운 또 하나의 주님의 예언의 성취를 보이고 만다.
사실 사랑을 빙자한 배신이나 위선이 가장 무서운 죄악이며 신앙을 빙자한 자기 성취 또한 악한 추태일 수 밖에 없다. 율법 이전의 족장시대에도 거룩한 약속으로 이방인(히위 족속)을 속인 시므온과 레위는 그들의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창34장 - 창49:5~7)
사랑과 존경의 표시인 입맞춤으로 스승을 판 유다는 우리가 흉볼 대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서 찾아내어 회개해야만 한다.
어떤 이유에서도 무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악을 악으로 대항하는 것은 악에게 지는 것이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십자가만이 진정한 이김이다. 자신을 사랑에 쳐서 복종시키는 희생이야 말로 진정한 승리의 비결이며 악을 잠재우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십자가의 사랑은 이런 이유에서 모범이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지고 따라야 할 조건이다.
우리 모두의 고난과 아픔과 시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과연 기쁘게 견딜 수 있을까? 주님은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 앞에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했다. 오늘 우리의 작은 삶을 통해서도 이 역사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진다면 기뻐할 수 있어야 하고 기꺼이 드릴 수 있을 때 우리는 355:3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는 찬양이 진실이 될 것이다.
입술에만 요란한 주님께 영광이 아니라 오늘 나의 십자가를 기쁘게 짐으로 나의 작은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저와 여러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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