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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6:36~46 2006-03-19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주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도 40일간을 광야에서 기도하셨고 12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도 기도하셨고(눅6:12) 주님의 일상이 늘 기도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자신의 최상의 사역이자 육신으로 가장 힘겨운 사역인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이렇게 힘겨운 기도로서 무장하시는 모습을 보이신다. 운명의 순간에 기도로 닥칠 일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여기서 배우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는 뜻의 성취를 위해서 간구를 드리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의 뜻이라는 귀중한 구원의 역사를 위한 기도보다는 우리의 약함을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셔서 해결해 주시고 복되게 해 주시고 승리케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사실임을 볼 때 주님의 직접적인 기도의 자세는 역시 기도를 가르침과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The Passion of the Christ 라는 영화를 보면 시작하는 장면이 바로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으로부터 였음을 기억한다. 영화를 봤던 사람이라면 그 장면이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겟세마네는 주님과 제자들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복음서에서 나타난다. 누가복음22:39에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제자들은 주님과 달리 자주 갔던 장소인 만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지명이 뜻하는 것처럼 “겟세마네(기름틀)” 자신의 진을 짜내는 기도를 들이시는 것을 본다.



Ⅰ.마지막 기도의 장소에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36~38)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고 비록 지키지는 못할 약속이었지만 가룟 유다를 제외한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의 주님께 대한 충성을 약속 받고 그 반대일 것이라는 아픈 마음을 선언하시고 이제는 유대에 내려 오실 때마다 늘 그들과 함께 자주 찾으셨던 감람산에서 인간으로서 치욕과 고통의 극치인 십자가를 지실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의논하러 들어 가신다.

열한 제자를 데리고 가셨지만 정작 기도하시는 장소 가까이 에는 늘 중요한 일에 함께 하셨던 세제자들 만을 데리고 들어 가시면서 자신의 안타까움을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에게는 별로 감응이 오지 않는 것 같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하셨는데 이 용어들이 사실상 주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들이다.[고민하고, 헬, 뤼페오(lypeo), 고통하다, 슬퍼하다, 근심하다(마19:22; 엡4:30)], [슬퍼하사, 헬, 아데모네오(ademoneo), (낙담 중에 있다)의 파생어 (마음에)괴로워하다, 마음이 무거운, 매우 슬픈]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자리였을 다락방에서 가르치신 말씀 중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온 인류의 근심을 해결하시기 위해 그 근심을 스스로 떠 맡으신 것을 이해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주님의 자연적인 모습이시다. 만약에 이런 고통 없이 십자가로 나아갔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고 인간이 아닌 신으로서만 십자가를 지셨다고 해도 완전한 속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반대로 전혀 하나님이 아닌 인간으로서만 십자가를 지셨어도 그것은 완전한 속죄의 역사를 이루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에서 드리는 고백은 지극히 당연한 고백이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38)

“내 마음[헬, 프쉬케(psyche)]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가감 없으신 주님의 진실된 고백이시다. 아담이후의 역사 속에서부터 세상의 마지막까지의 모든 인류를 대신한 죄의 형벌은 우리의 머리로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털어 놓으시면서도 기도라기보다는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시는 부탁은 하나님으로서 또는 인간의 대표자인 아담으로서 속죄의 역할을 위한 희생은 인간의 도움이나 협력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7~18)고 고백하고 있다.

구속의 역사 이후에 성령과 인간이 그 십자가의 은총을 세계 모든 이류에게 퍼뜨리는 것은 가능한 과제였지만 죄의 해결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서 나아가시는 주님의 희생 앞에 제자들의 기도나 도움이 전혀 무가치했기 때문이다.



Ⅱ.인간으로서 고뇌를 하나님 아버지게 탄원하시는 모습을 본다.(39~41)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앞에 닥치게 될 고난의 십자가가 얼마나 무시 무시한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마저 외면할 수 밖에 없는 처절한 것임을 이미 보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입장에서 하소연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특이 이 부분에서는 주님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의 모습이라는 데서 귀감이 되신다.

1.지극한 겸손을 보이신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눅22:41) 마치 갈멜 산상의 다급한 엘리야처럼 “…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왕상18:42) 기도했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눅18:11~13) 물론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바친 솔로몬도 백성들 앞에서 최고의 겸손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이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뢰기를 마치고”(왕상8:54) 라는 표현에서 읽을 수 있다.

2.기도의 모범을 보이신다.(39b)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너무나 자연적인 인간의 모습을 여기서 대할 수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렇게도 혹독한 시련을 자신에게 지우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지만 친밀한 음성으로 기도를 시작하신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14:36)

①인간적인 입장에서는 그래도 아버지께 하소연을 드리고 있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39m)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6m)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라는 데서 동정감 마저 느끼게 하는 모습이다.

②그러나 최종적인 선택을 아버지 하나님께 돌려 드린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39b)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맨 마지막에서 이러한 자세를 읽는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13b) 모든 믿음의 기도는 이래야 한다. 우리의 소원을 가감 없이 부탁 드리되 거기에 대한 선택은 아버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해야만 한다.[BCC게시판]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입장에서 울고불고 탄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사실인데 주님은 역시 아버지의 뜻의 이루어짐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들의 나약함과 수치스러움을 또 한번 비교해 보게 된다.

3.이 와중에서도 제자들을 염려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본다.(41~42)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인간적으로 볼 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거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큰소리치던 그 용기는 다 어디로 가고 “깨어 있으라!”시는 당부도 아랑곳 하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이 얼마나 얄미웠을까?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눅22:40)

그러나 주님은 아직도 눈물 젖은 촉촉한 음성으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안타까워 하시는 것이다.

사실 주님 자신을 염려하시는 것 보다는 장래 자신이 잡혀 십자가에 처형되실 때 제자들이 시험에 들게 될 것을 염려하시고 걱정해 주시면서 기도로 준비할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조차도 잘못 사용하여 자신들의 처지를 변명하는 것으로 악용한다. “마음[헬, 프뉴마(pneuma)]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자신의 약함이나 소신 없는 행동을 합리화 하는데 주님의 말씀을 그렇게 사용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육신과 영의 관계 속에 좌우되는 모습을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고 단언한다. 육신을 기준 한 신앙은 어떤 것에서든지 하나님과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라고 단언한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한가지의 교훈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이다. 시험이나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8) 하였지만 그 시험에 들어 신앙적 힘을 잃고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늘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조차도 교훈 해주고 계신다. 그것이 약한 육신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비결이다.



Ⅲ.간절한 기도 후에 감당해야 할 십자가를 향하여 담담히 나아가시는 모습을 본다.(42~46)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주님께서는 오직 한가지 제목의 기도를 세 번씩 올리셨다. 한번 기도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고 다시 가서 기도하셨다. 그리고 이 기도가 얼마나 애절했는가를 히브리서를 통해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 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 주님의 기도가 외면을 당한 것 같은데 신앙의 사람의 확신은 들으심을 얻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기도의 준비와 응답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감당하실 수 있었다는 고백이다.

이러한 주님의 애절한 기도의 모습을 누가가 가장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더욱 미화 하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다. 어떤 신령한 것이 과장되는 것은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킬 뿐이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려 는 단계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이기신 주님께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4:11)는 기록처럼 간절한 주님의 기도를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눅22:43)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실 때마다 제자들은 주님께 더욱 안타까운 실망을 드릴 뿐이었고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주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하여 계속 당부하고 계심을 듣는다.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43) 그 때나 이 때나 무개로는 얼마 안되는 이 눈꺼풀은 왜 이리도 무거운지…! 다른 세상일의 호기심에는 초롱초롱 빛나면서 어찌 하나님의 영광의 면전에서는 이리도 무거운지…!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눅22:46)

우리는 수시로 우리 자신의 영혼을 깨울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꾸뻑꾸뻑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신 주님께서는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45~46)고 가룟 유다가 군병들을 데리고 닥칠 것을 예언 하신다.

참 사람은 믿을 것이 못 된다. 3년씩이나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 많은 교훈과 이적을 손에 잡히도록 눈앞에서 보여 주셨는데도 그들은 아직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부터 힘을 잃고 졸고 있는 모습은 주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과 제자들이 다 힘겨운 이 고난의 때를 지나 오순절날 성령의 임재와 함께 복음을 증거 하는 미래의 제자들을 내다 보고 계셨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오늘 우리 모두를 비롯하여 모든 인류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셔야 했고 그것을 감당하시기 위하여 기름을 짜내듯 말할 수 없는 고민과 슬픔을 친히 감당하시며 기도하셨다. 아무에게도 심지어 제자들에게서 조차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독과 슬픔 속에 십자가를 감당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인간으로서는 당연히 힘겨운 이 일이 지나가 주기를 소원하며 기도 드렸지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최종적인 선택을 아버지께 넘겨 드리셨다. 그러나 이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 보다는 제자들을 염려하셨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기도 후에는 어떤 응답이든지 상관없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을 향하여 묵묵히 나아가시는 주님을 본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래야 할 것이다. 기도는 우리 자신의 소원의 관철이 아니라 감당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아뢰고 거기에 대한 응답이 우리의 소원대로건 반대이건 오늘 내가 주님 앞에 감당해야 하는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붙들어 감당케 해 주시는 주님이시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13) 이라는 기도의 결론으로 주님의 뜻을 순종하여 십자가를 감당하시고 죽으실 뿐만 아니라 부활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 우편의 영광에 오르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