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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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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31~35, 6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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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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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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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주에 십자가의 희생을 앞두고 이 땅에서 최후로 유월절을 제자들과 지키시면서 바로 자신이 새로운 언약 속에서 유월절 제물이 되신다는 비장한 각오와 함께 이제부터는 유월절 절기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자신의 희생의 죽음을 유월절처럼 확실하게 기념하라는 간곡한 당부를 상고한 바 있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주님 앞에 나타났던 마귀는 이 마지막 밤에 더 강하게 주님을 유혹했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그렇다면 십자를 질 필요가 없지 않느냐, 희생이 속죄의 방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유혹의 음성이 수없이 주님의 머리를 어지럽혔을 것이다.
다음에 상고하게 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처절한 몸부림의 기도를 보게 되는 것처럼 어찌 보면 주님의 가장 철저한 자기부인의 과정이 이 마지막 밤에 있어야 했고, 그러한 고독과 고통과 슬픔에 3년 동안이나 가르치고 이끄셨던 제자들 조차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면서 이 육신으로서의 삶에 수시로 다가오는 죽음과 어둠의 공포를 홀로 맞으며 ‘아버지의 원대로’ 라는 철저한 의탁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범이시다.
주님께서는 구약 스가랴서를 인용하시면서 고난으로 나아가실 사실을 마지막으로 다시 예언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13:7)
이러한 찹찹한 주님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철저하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목숨을 걸어 지키겠다고 호언장담(豪言壯談)을 하고 주님은 그러한 육신적 과신이 얼마나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어리석은 것인가를 말씀 하신다.
오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그러한 장담이 얼마나 연약하게 무너지는 가를 연이어 살피기 위해서 겟세마네의 기도(36~46), 잡히심(47~56),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심(57~68)의 내용들을 다음으로 미루고 주님의 이 비극적인 예언의 성취를 상고하면서 우리 자신들의 같은 신앙 속에서의 어리석음을 살피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바른 믿음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Ⅰ.슬픈 마지막을 예언하시지만 여기에도 소망이 약속된다.(31~32)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예언되긴 했지만 만찬은 조용하고 온화한 가운데 끝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습대로 유월절의 만찬 행사의 마지막 시편의 찬양을 드리면서 감람산으로 가시는 길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여태껏 짧지 않은 3년이란 기간동안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이적과 기적을 보고 배우면서 따라온 그들에게 조금은 서운할 말씀을 주시고 계심이 제자들에게나 베드로에게 조금은 마음을 상하게도 했을 것이다. 그것도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까지 말씀하시는 것이 대단히 제자들을 섭섭하게 했을 것이다.
[만약 오늘 주님이 아니라 신앙의 지도자가 3년 이상씩 신앙 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오늘 당신들이 다 주님과 믿음을 버리게 될 것이다’ 했다면 오늘 우리의 기분은 어떨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그럼에도 이 예언 속에는 예수께서 여전히 제자들을 버리지 않을 것과 자신의 부활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배신하는 제자들을 말씀하시면서도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계심을 확인하고 계시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어떻게 보면 신앙은 주님께서 나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될 정도의 환난이나 고난을 통해서 더욱 확고해 지고, 나 자신이 주님을 버리거나 의식하지 않고 죄를 지은 후에 더욱 겸손하고 견고해질 수 있는 그런 경우가 더러 있다.[다윗이 대표적인 예 - 주님은 순결하다고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더욱 의지하고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더 귀하게 쓰신다.]
세상은 배신한 사람을 절대로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다르다. 사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배신자다.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지 않고 믿는 다고 하는 우리들조차 얼마나 수없이 사랑의 주님을 배신하는지 모른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
그럼에도 주님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아직까지 주님께 신뢰를 드리지 못하고 수없이 주님을 배반했는가? 이제는 그만큼 주님을 사랑해야 할 차례이다.
Ⅱ.육신적인 용기와 그것의 부질없음을 가르치시는 주님의 예언을 듣는다.(33~35)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33) 이 말이 당시로서는 분명히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에게 오셔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라고 하셨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육에 속한 것들은 신뢰할 것이 못된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22:33) “…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b) 이 고백의 문제점은 역시 “나, 내”가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장담에는 역시 뼈가 있다.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해도 될 것을 “다 주를 버릴지라도” 라는 말을 앞에 덧붙이므로 은근히 자신을 과신하는 것에서 지나서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며 무시하고 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대부분 그렇다. 우리교회 모든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거나 ‘누구는 그렇지만 나는’ 식으로 남들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것이 일반적인 죄성의 사람들의 특성이다.[오늘 나(우리)는 그렇지 않은가?]
바른 신앙은 언제나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려고 애쓸 뿐이다. 그러나 비교의식을 넣는 것 자체가 죄악의 품성이다.[272:2죄악은 뿌리 깊게 우리 맘에 도사려, 편당심 일으키며 차별 의식 넣어서, 대화를 막으련다 대화를 막으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 이 말씀을 마가는 “…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14:30) 하였고 요한복음에서는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38)
특히 여기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언어의 특성상 완전히 부인한다는 의미를 뜻한다. 뒤에서 이 부분을 보는 바와 같이 주님의 이 안타까운 내용은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정하는 내용을 74절에서 본다.
이것은 아직도 성령에 의해서 움직이지 못하고 혈기와 성격으로 움직이는 베드로 사도의 특성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다.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을 받고서야 박해하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고 담대하게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언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 우리가 베드로처럼 만용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된다. 다음에야 어떻게 되든지 먼저 큰소리 쳐놓고 보는, 남들을 깎으면서 자신을 세우려 하는 자세는 밤낮 참소하는 마귀의 기질이지 하나님의 성령의 특성은 아니다.
이미 앞에서 “…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마16:21)는 주님께 “…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했다가 “…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마16:23) 라는 책망을 들은 바 있는 베드로 였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세워 주심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이나 능력을 의지하여 큰소리 치는 자는 반드시 실족할 수 있음을 믿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므로 어떤 극단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세워 주심을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Ⅲ.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못한 인간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본다.(69~75)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언제나 큰소리 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나약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세상에서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내용을 복음서들이 조금씩 독특하게 다루고 있는 내용이 상당히 이체롭다.(막14:66~72; 눅22:56~62, 요18:15~18, 25~27)
주님과 제자들의 앞에서 죽을지언정 나는 주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 쳤던 베드로의 나약해짐을 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자세를 강건하게 말씀에 세우는 자세가 필요한 것을 깨닫는다.
1.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된 대상이 대부분 하녀들이었다는 사실이다.(69m)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71m)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어디서나 앞서고 나서기 좋아하고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한 이유는 당시의 권력자들 앞이나 군인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가장 미약한 여자 하녀들 앞이었다는 사실이 더 안타깝다. [비자, 헬, 파이디스케(paidiske), 소녀, 여성 노예나 종, 하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모든 출발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지 못하고 자신을 중심 하거나 세상을 기준 한다면 용기를 잃게 되고 나약해 짐을 배우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혀가시는데 예전 같으면 스승을 잡아 끌고 가는 군인들에게 항의 하고 나설 것 같은데 나신의 위험을 생각하고 멀찍한 곳에서 되어지는 상황이라도 지켜보려는 안타까움은 베드로로 하여금 한없이 한없이 나약해 지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지 못하는 오늘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깨달음에서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5:34) 라는 가르침을 받은 베드로 이지만 (72)“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74)“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라는 말씀과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고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관계를 저주까지 하여 부인하게 되는 마지막까지 가게 되는 이유를 우리 모두는 경계해야 할 믿음의 과제이다.
결국 이것은 주님을 단순히 부인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떠나버린 모습임을 보는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마지막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이끄는 영적인 과제인 “회개”를 통하여 회복될 수 있음을 배우게 한다.
2.대개의 경우 베드로는 불을 쬐는 가운데 이 말을 하고 있다. 본 마태복음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다른 세 복음서에서는 이 사실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막14:67f)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눅22:55~56)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요18:18, 25f)
예수를 멀리한 베드로 에게는 밖에서 스며드는 한기(寒氣) 보다는 마음의 추위가 그를 더 춥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어색하게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지만 마음은 시베리아와 같았고 그의 입으로 내뱉는 말들도 차갑고 냉정한 부정적인 언어들 뿐이었다.
주님의 따스함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비출 때 비로소 따스함과 긍정적인 자세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3.주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9)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71)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73; 막14:69, 70) 남들은 베드로에게 주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는데 베드로는 오히려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대단히 안타까운 사실이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한 역사를 부인해 버린다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다름이 없고 소망이 없는 사람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극한 마귀의 흔듦에 빠지면 이런 비극적인 저주를 자초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엮어온 나의 인생이 없었다면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나를 멸망으로 끌어갈 수 밖에 없다.
4.누가복음 기록의 독특성.(눅22:56~62) “이 여자여 내가 ①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57b) “이 사람아 ②나는 아니로라 하더라”(58b) “이 사람아 나는 ③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60b) 하나님을 부정해 버린 자리에는 나도 아니고 너도 없는 무의미와 무가치의 시간과 공간이 있을 뿐이다.
반드시 주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만이 나와 너를 가치 있게 만들고 사랑과 화해와 기쁨의 교제가 있게 됨을 깨닫는다.
5.주님과 다시 얼굴을 대했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었다.(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눅22:61)
인간의 최종적인 절망의 순간, 주님을 멀찍이 보내버린 탕자와 같은 인생이라도 주님의 얼굴을 기억하고 말씀을 회상할 때 회개를 가능케 하고 떠나온 먼 자리를 돌아올 수 있게 한다. 주님과 멀어져서 방황하는 인생이 있다면 다시 얼굴을 돌이켜 주님을 바라보고 하신 말씀들을 묵상하여 처음의 자리로 돌이킬 수 있어야 만 한다.
6.비록 실수했으나 회개했기 때문에 긍휼함을 입을 수 있었다.(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막14:72)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요18:27)
닭은 새벽을 알리는 동물이다. 오늘도 동틈을 알리는 베드로를 회개케 했던 닭 소리는 이 역사의 마지막을 일깨우는 우리를 회개케 하는 동일한 소리이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75b)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2)
요한복음13:30에 예수께서 자신을 판 유다에게 제자들은 모르지만 그의 행할 일을 행하라고 하셨을 때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결국 어두움으로 나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비극으로 들어간 것은 그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을 저버렸기 때문이라면,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는 회개를 통해서 그의 자리를 다시 찾아 돌아온 차이를 보게 된다.
이러한 베드로의 상황은 우리 모두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어떤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지라도 회개하면 버려지지 않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버려지는 이유는 오로지 회개치 못하는 어두운 마음의 결과일 분이고 어떤 죄를 졌을지라도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맹세하는 죄를 졌을지라도 회개하는 삶은 받으시는 우리의 두뇌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에 감격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절망이 없다. 그러므로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예수 그리스도 앞에는 마지막이 없다. 버림을 예언하시고 죽음을 말씀하시면서도 부활을 또한 약속하시는 주님이심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신앙이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외형적으로 가진 견고함이라도 결코 큰 소리 질 수 없다. 보이는 모든 것은 약한 것이고 무너질 수 있는 것임을 알아서 더욱 십자가를 의지해야만 한다. 오늘도 주님의 예언은 역사 속에서든지 한 신앙인 속에서든지 반드시 성취되며 주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눈치 보는 믿음이 될 때는 한없이 나약해질 수 있어서 어린아이 앞에서도 주님을 부인할 수 있는 위험성은 늘 도사리고 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는 경계를 자신의 교훈으로 삼아 늘 영육으로 강건한 하늘의 군사로 사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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