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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6:1~16 2006-02-26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모든 사람은 죽을 운명에서 나고 이 운명은 어떤 힘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러나 죽으러 이 땅에 오신 분이 계시다. “…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12:27b) 이제까지 주님은 3년을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지만 주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고,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의 요셉의 아들로서의 목수의 삶은 더더욱 아니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하여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했던(요11:49~52) 사실에서도 더욱 분명해진다.

3년의 공생애는 자신이 구속의 십자가를 지신 후 이루실 구원의 역사를 인류에 퍼뜨리기 위해 제자들을 모으고 가르치실 선생으로서의 생애였다면 이제 이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범죄 한 인류를 위한 한번으로 완전한 제사를 드리시는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바로 그 제물로서 바쳐지기 위해 십자가의 제단으로 나아가시는 우리 모두를 대신한 주님의 슬픔과 수치와 고난의 모습이 이 26장에서부터 27장에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분명하게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공관복음과 요한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의 삶을 비교적 간결하게 기록하는 마가도 이 십자가에 이르시는 주님의 행보를 14~15 두 장에 걸쳐서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눅22~23장, 요18~19장)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가르침과 이적과 표적의 삶은 사실 이 대속의 은혜를 이루시기 위한 준비에 불과하고 이 대속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역시 한 위대한 성인이라는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여기서부터 다룰 내용은 신묘막측(神妙莫測) 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되도록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간결하고 빠르게 진행하고자 한다.

오늘 상고하는 이 말씀과 다음 이 시간에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의 행사를 기념하시면서 그때까지 기념해온 유월절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라면 자신이 바로 온 인류를 위한 유월절 양이심을 증거 하시면서 새언약으로 갱신되는 유월절의 깊은 의미를 말씀하시고 겟세마네에서 제사장적인 기도를 드리시고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잡히시는 과정까지 나아가심을 상고하게 될 것이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아주 미묘한 심리적인 차이들이 교차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 먼저 예수께서 이 유월절 후에 십자가를 지시게 된다는 예언과 대제사장의 집에 모여서 예수를 죽이려는 흉계, 그리고 한 여인의 가장 귀한 것을 바쳐서 죽으실 예수님께 향유를 붓자 거기에 만족하시고 칭찬하시는 주님, 그런가 하면 여태껏 그렇게 믿고 재정을 맡겼던 가룟 유다의 스승을 팔아 먹는 배신, 반복되는 역전의 모습들이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고 감사케 하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자아내게 한다.

오늘 이 말씀을 대하고 있는 우리 각자는 현재 과연 주님께 어떤 것을 주고 있는가를 한번 점검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이왕에 주님의 피로 구속을 받고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 주님께서 다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하겠다는 안타까움을 드리고 있는 존재인지, 아니면 사람들이야 무어라고 핀잔을 주든 나의 가장 귀한 가치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 이름없는 여인인지, 기회만 되면 주님의 이름을 팔아서 세상의 것을 챙기려고 상황을 살피는 유다 인지 바르게 진단할 필요가 있다.



Ⅰ.주님의 희생의 예언과 그것을 모의하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본다.(1~5)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주님께서는 마지막 비유적 교훈을 마치시면서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는 가슴 아픈 사실을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어느 하나도 이 비통한 주님의 심경에 반대하거나 위로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우리가 세상에 붙잡혀 있을 때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처럼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는 안타까움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한다.

1.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절대적으로 자발적이신 희생이심을 이 말씀은 가르치신다. 아담의 범죄 후에 주님의 희생은 이미 선언되어 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어떤 상황에 떠밀려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결단으로 지신 것이다.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8) 왜 주님께서 이런 치욕의 방법을 스스로 선택하셨는지 아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신 헤아릴 수 없는 크신 사랑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바로 오늘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셨다는 사실이다. 믿습니까?

2.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구체화 하기 위한 간악한 무리들의 간교한 회합을 본다.

주님께서도 이미 23장에서 지적하셨지만 이 때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의시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야말로 종교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고 있었고, 죽을 때까지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게 되어 있는 율법(민20:26)은 로마에 의해서 지켜지지 못하게 된다.

한 사람에게 절대 권력을 두는 것은 로마에 반란을 모의하기 쉬울 것이라는 로마 정부의 판단으로 결국 로마에 의해 몇 사람이 교대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게 되어 있었고 (행4:6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그 해의 대제사장이 가야바 였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이왕에 간교한 종교꾼들은 로마의 압제에는 전혀 대항도 못하면서 자신들의 앞길을 방해하는 자를 제거하고자 계획하지만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역사였음을 그들은 꿈에도 생각치 못하고 죄악을 모의 하고 있다. 결국 지혜의 사람이었던 솔로몬이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

사람을 궁극적으로 살려야 할 신성한 신앙의 지도자들이 기껏해야 의논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자는 간교한 의논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보실 때 참으로 안타까워 하실 수 밖에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들의 마지막 결론이 명절에 모여든 백성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많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이번 유월절에는 하지 말자고 의논하지만 가룟 유다의 반역이 이들의 이러한 결정을 바꾸게 하고 만다.

어느 시대나 신성한 신앙의 지도자들이나 신앙 하는 사람 모두가 권력과 결탁하고 세속의 이권에 사로 잡히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 가장 싫어 하시는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경계를 가져야 함을 여기서도 배운다.



Ⅱ.이름없는 여인의 헌신을 배운다.(6~13)

어두운 상황은 다시 반전 되어서 만 인류를 위한 유월절 제물로서 죽으실 안타까운 주님께 큰 위안을 주는 한 이름없는 여인의 헌신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에 ‘시몬’이라는 이름이 흔하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사람인 것은 모르겠지만 여하튼 문둥병에 걸렸다가 낳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물론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4복음서에 다 기록이 되고 있지만 마가복음의 내용은 본문과 같지만 누가나 요한의 기록은 다소의 차이가 있어서 이러한 일이 한번이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여하튼 이러한 헌신에도 칭찬은 주님께만 들을 뿐 제자들조차도 책망하고 분내는 것을 참아야만 가능했었다. 언제나 주님을 위한 헌신이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님을 각오하지 않으면 주님을 위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또 다시 배우는 것이다.

여기서는 3가지의 각기 다른 반응을 보게 되는데 헌신하는 당사자와 제자들의 반응, 그리고 주님의 최종적인 평가이다. 언제나 주님을 위한 일은 이렇다.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 그리고 최종적인 주님의 판단이 그것이다.

1.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붇는 여인의 모습을 본다.(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헌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단순하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의 이름도 이 귀한 헌신의 이유도 전해지지 않고 다만 이 여인의 행동만이 오늘 우리에게조차 아름다운 향기로 전해짐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은 역시 지켜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여자가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향유는 성령으로 기록된 말씀에 “매우 귀한[헬, 바뤼티모스(barytimos) – 값비싼, 고귀한] 향유” 였었다. 최고의 가치를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당시의 여인들의 옥합에 담은 향유는 자신의 절개나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전하는 것을 보면 이 여인은 단순한 향유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부어드린 것이다.

비슷한 내용으로 기록되고 있는 요한복음 12:5에 의하면 이 향유의 가치는 300데나리온으로 일용근로자라면 약 1년 정도의 임금을 모아야 살 수 있는 가치로 나타나고 특히 여성이라는 데서 그보다 더 많은 희생이 있어야 가질 수 있는 보물이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옥합까지 깨어 버리고(막14:3) 향유를 머리에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옥합[헬,알라바스트론(alabastron) 불투명한 유리의 알라바스트론은 BC 1000년부터 이집트에서, BC 600년부터 아시리아에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는 2세기부터 각각 있었다.]을 깨뜨린 것은 엄밀히 말하면 자기 자신을 깨뜨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여인은 아무 말도 없이 식사하시는 주님의 머리에 자신의 최고의 보물이었던 이 향유를 부음으로써 향유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하게 되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희생은 역시 향기로 나타날 것이다.

2.거기에 반응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말하는 것은…?(8~9)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향기를 함께 맡으며 좋아할 수 있는 제자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현하고 있다.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이것은 평소에 돈을 사랑했던 가룟 유다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무척 절약하는 자세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하나는 진정으로 주님을 위해서 사용한 것은 절대로 허비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믿습니까?

이들은 그 돈이 올바로 쓰여야 할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목 뒤에는 그 돈을 욕심 내는 욕망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까지를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서 이 상황을 정리 하신다.

3.최종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이 있다.(10~13)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①누구보다도 이 여인의 진실을 다른 모두는 몰라줘도 주님께서 아셨다.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 이 헌신의 마음을 읽으시는 주님께서는 이 여인을 위로하고 격려하신다. 이것이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들만 맛볼 수 있는 감격이다. 세상 모두가 몰라줘도 주님께서 아신다는 확신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주변의 모든 제자들이라는 사람이 꾸짖어도 주님께서 칭찬하시면 그 받는 위로는 무엇에도 견줄 수 없다. 이 맛을 본 사람이라야 수시도 변하는 사람들의 위로를 구하지 않고 그러한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주님을 섬긴다.

②주님의 안타깝지만 만고진리의 말씀을 여기서도 듣는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11) 이 말씀은 선한 일을 하려고 하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할 수 있다는 말씀과 함께 주님의 희생은 한번으로 영원할 것이므로 항상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명기15:11에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는 가르침이 있다. 이 땅에 사는 한 가난한 사람들이 없어서 도움을 줄 수 없는 일은 없을 것임을 가르치신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능하다.

③이 여인은 단순한 사랑에서 이 일을 행했지만 그것은 주님의 인류를 위한 희생제사를 위한 헌신이 된다는 깊은 의미의 칭찬이 담겨 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12) 사실 이 여인의 가치 있는 헌신은 역사 이래로 주님의 죽음을 준비한 귀중한 허신이 되었다.

④마지막 주님의 말씀은 이 여인의 칭찬이 적어도 이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칭찬으로 말하여 질 것임을 예언 하셨다. 사실 이런 기나긴 메아리를 남기는 칭찬은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칭찬으로 오늘 우리들 역시 이 여인의 행동을 말하고 있다는 데서 이 주님의 예언적 칭찬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13)

오늘도 주님을 위한 헌신이나 수고를 하려면 계산해보고 행할 필요도 없고,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칭찬을 기대할 필요도 없다. 이 땅에서 주님께 영광을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칭송될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이 여인 같은 헌신을 드리고 주님으로부터 이 여인 같은 칭찬을 들으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



Ⅲ.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는 가룟 유다를 본다.(14~16)

“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또 다른 반전이 여기에 하나 기록된다. 한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의 이야기 뒤에 또 다시 쓰디쓴 어두움의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앞의 10:1~5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 와 대조가 된다. 계산이나 수(數)에 익숙한 머리를 가진 사람으로 그래도 신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전대(돈주머니)를 맡기셨을 것이고 갈릴리 어부들이 대부분인 제자들 중에 유일하게 갈릴리 출신이 아닌 유일한 남쪽 출신이었다.

가룟이란 지명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헤브론의 그리욧이란 지명의 헬라어 형태로 여호수아 15:25에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마을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가룟 유다가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이거나 출신에 관한 것들은 성경에 별로 나타나지 않는 의문의 인물이다.

그러나 3년간을 데리고 다니며 가르치고 많은 예수의 기적과 표적을 봐 왔음에도 이 사람만이 12제자들 중에 은혜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나중에 자결하는 것으로 인생을 마무리하고 만다. 율법에서 은 30세겔 정도에 팔린 사람은 재산정도로 취급하는 종의 몸값에 해당하는 적은 돈이다.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지니라”(출21:32)

유다는 이런 종의 몸값에 스승을 팔 생각을 했는지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단지 그의 악하고 돈에 대한 욕심과 같은 성품을 마귀 사탄이 충동질 한 것 외에는 성경에 분명한 이유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은 30을 달아 받은 유다는 계속 스승을 넘길 기회만을 엿보는 어둠에 익숙한 자가 되고 만다. 이것 역시 세상의 어두움에 지배된 인생의 대표격이다. 그랬기 때문에 스스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을 본다.

구약에 비슷한 인물이 한 사람 나오는데 사무엘 하에 나오는 모사꾼인 아히도벨은 주인 다윗을 함정에 빠뜨리려다가 실패하자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17:23)는 기록으로 역시 인생을 마무리 한다.

여기에 큰 차이가 나타난다. 우직하고 어리석으리만큼 주님께 자신의 것으로 헌신하는 이름없는 여인은 칭찬을 세세토록 받는데 반하여 머리를 잘 굴리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가룟 유다는 세세토록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남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 이름없는 여인은 주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면서도 제자들의 핀잔으로 힘겨워 하지만 그 사랑의 행위는 이 인류를 위해 제물로 죽으실 주님의 희생을 위한 헌신이 된 것이다.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오늘 우리의 진실과 믿음으로 드리는 작은 헌신도 이 인류 구원의 역사에 귀중한 도구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주님을 대하는 원리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의 반응에 관계없이 우직하게 순종하며 섬기는 것과 온 갓 계산을 다하며 수지 타산을 맞추어 보며 주님을 따르는 것 오늘 나는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 후대에 이 여인과 가룟 유다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중 두 가지 다른 이름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