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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5:31~46 2006-02-19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이 마태 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심판적인 나눔의 역사를 더 많이 그리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심판의 복음이라고 까지 부를 정도이다. 특히 이 재림의 마지막 비유에서 주시는 교훈은 좀더 실제적이고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한다.

여러분들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대하는가? 여기에 좀더 확실하다면 그래도 감사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영원한 세계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의 것들이 좋다면 그런 사람들의 미래는 불분명할 것이다.

우리의 삶에 따라서 각 사람의 미래는 오늘 본문의 둘 중에 하나일 수 밖에 없다. 과연 오늘 나는 오른편의 사람인가? 왼편의 진노의 대상인가? 점검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오늘도 주님은 이러한 경계의 교훈을 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의 기회도 그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더 이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계를 오늘 이 시간 이 세상에서 받는 것 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일 수밖에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의 멸망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자신이 진노의 형벌을 친히 십자가에서 감당 하셨다. 함에도 그 은혜의 십자가가 보다 많은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무의미한 은혜의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Ⅰ.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 인류 앞에서 영광을 입으실 때가 있을 것이다.(31~3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짐승의 우리간에 초라한 모습으로 나셔서 나사렛에서 아버지 요셉을 순종하며 역시 부유하지 않은 삶으로 청년의 때를 보내시고 제자들과 3년의 시간을 가르치시면서도 결코 한번도 폭력을 사용치 않으실 뿐 아니라 구속의 십자가를 바로 앞에 두신 주님께서는 여전히 조금 후에 있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비교하여 육신적으로는 너무나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게 될 자신의 모습을 이미 내다 보신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신 후 부활하실 뿐만 아니라 하늘로 승천하셨다가 천사들을 거느리고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위엄찬 모습을 직접 소개 하시면서 그 때가 바로 온 인류에 대한 심판의 때가 될 것임을 선언하신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직접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2) 라고 증거하신 바 있고 바울 사도도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4:1) 라고 디모데와 이 땅의 신앙의 사람들에게 공포하신바 있다.

여기에 특이한 표현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라는 내용이다. 주님께서는 이 가르침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는 기도에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라는 고백의 기도를 드리시는 것을 본다. 이미 창세전부터 가지신 그 영광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잠시 종의 형상을 입으시고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을 뿐이지 그리스도의 위엄은 결코 없어질 이 땅의 영광과 같은 것이 아님을 믿음의 사람들은 역시 고백하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까지 온 인류를 위하여 희생하셨음에도 구원을 누리지 못한다면 사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요, 불쌍한 것이다.

그 영광의 위엄을 입으시고 모든 세상의 법 위의 절대적인 법인 진리로 이 역사 속의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하셨는데 그곳의 심판의 기준인 절대적인 법은 과연 어떤 법인가? 주님께서는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12:48) 하셨는데, 쉽게 말하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들고 있는 성경이 바로 심판의 기준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자긍심을 갖게 하는 동시에 책임을 통감케 하는 일이다. 우리가 이미 심판의 기준이자 진리의 말씀인 이 성경을 가졌다고 하는 입장에서 심판의 표준이 무엇임을 알 수 있다는 이점과, 분명한 심판의 기준을 알면서도 그대로 살지 못한다면 더 이상 변명치 못할 이유가 된다고 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는 말씀은 비로소 호소력을 가지에 된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것 보다도 각자가 읽고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법이자 심판의 법인 성경을 아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고, 깨닫는 대로 행하여 복 받는 인생들이 되어야 하겠다. 이러한 삶의 질의 변화를 영생이라고 하기 때문에 주께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한다고 하는 주님의 사자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질 것들이나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떤 것을 더하는 것 보다도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도덕적인 규범이나 철학적인 강연은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고, 듣기 행복한 개그는 TV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너무나 짧은 이 시간에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하늘의 진리를 듣게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천상의 비밀인 구원의 십자가를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에 나중 주님으로부터 역시책망 받지 않을 것이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하셨는데 창세 이후로 역사 속에 왔던 모든 인류가 될 것이다. 마치 애굽에 마지막 재앙 때에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출11:5) 했던 것처럼 이 역사 위에 왔던 사람들 중에 제외 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며 예수를 전하던 사람도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예수를 저주하던 사람도 예외는 없을 것이다. 주께서 이 땅에 임하실 때부터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2b~33) 했는데 여기 오른편과 왼편, 양과 염소를 구분 한다는 것이 중심을 이루는 표현이다. 성경의 오른 편은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구약 성경에 엄청나게 많지만 대표적으로 두 곳만 소개를 하면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시17:7)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10) 그러므로 반대인 왼 쪽은 당연히 진노의 대상이다.

양과 염소는 다 제물로 사용할 수 있는 데서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염소는 어느 정도 방어력을 갖는 짐승이고 양은 스스로는 전혀 방어력이 없는 목자에 의해서 철저하게 보호 받아야 사는 짐승이라는 차이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이라면 철저히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어야 하고 일 순간이라도 스스로를 의지하고 주님의 보호를 거절 한다면 그것은 염소와 다를 것이 없다.

주인의 고삐에 매어 가면서도 언제나 가파른 곳을 즐겨 다니고, 몰고 가는 주인으로 하여금 힘들게 하는 것이 염소라면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10:3~4) 음성만으로도 기뻐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 양이다. 그러므로 염소는 불순종의 상징이라며 양은 순종의 모델이다.

여기서도 주님께서는 목자이신 주님을 즐겨 순종하며 따른 자들을 구원하실 것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이왕에 구속의 은총을 이루시고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즐겨 순종하므로 바로 같은 그 주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의 때에도 칭찬 듣는 오른편의 구원의 백성들로 사시기를 …



Ⅱ.복 받을 자들과 이유.(34~40)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최초의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실현이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26:4)

내용은 길지만 의미는 길거나 결코 복잡하진 않음을 본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34) 인간에게 참된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 한 분이며 그 복은 이미 이 역사 속에 흘러 넘쳐 흐르고 있다. 모든 사람이 믿음이라는 그릇을 통해서 얼마든지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게 하셨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복 받을 자들이여!” 라는 미래적인 표현이다. 이 복은 물론 현재적으로 구원의 복을 누리고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이 분명하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누리고 비록 땅에 살지만 천국을 누리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믿음 생활에서 누리는 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역시 이것과 비교될 수 없는 복이기 때문에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는 복이기 때문에 그 복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복 받을 자들이여!” 라고 선언하고 계신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의 복은 결코 이 세상에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진정한 복은 영원 속에 지속됨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창세로부터, 에베소서의 교훈을 따르자면 “곧 창세 전에”(엡1:4) 이미 예비 된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선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는 모든 인류가 이 넘치는 복을 다 누리기를 바라시지만 완악한 인간들은 굴러 들어오는 복조차도 차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여기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이 복 받을 자들이 행했다고 칭찬하고 계신 부분들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는 지극히 자선적이고 도덕적인 부분으로서의 칭찬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

도덕적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영원을 결정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성경의 전체적인 주제에서 볼 때 이 말씀은 오해의 여지를 갖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이러한 실천은 주님의 육신으로 계실 때에 가르친 하나님 경외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실천의 항목이었음을 볼 때 무리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상황에 관계없이 주님의 사랑으로 대해 준 것에 대한 결과일 것이다.

또 이러한 주님의 칭찬을 오히려 사양하면서 자신들은 그런 일을 한적이 없다고 사양하는 모습을 본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37~39)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행을 머리에 기억하거나 새겨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자신의 선행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셔서 행한 것이므로 자신의 공로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데서 이런 자세를 갖을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믿음의 사람들은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는 바울의 당부나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이라고 베드로 사도의 당부도 이를 증거 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잊어버린 선행을 주님께서는 낱낱이 기억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40)

이 말씀은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식사초대를 받은 데서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눅14:12~14)는 주님의 가르치심의 결과되는 교훈이다.

여기서도 지극히 작은 것과 함께 지극히 작은 자[지식적으로, 물질적으로, 권세적으로 기본적인 것 조차도 갖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자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에 대한 삶의 자세에 경계를 주고 계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믿음 생활이 실천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경계 하신다. 요한 사도의 가르침과 같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지극히 작은 자”가 바로 주님을 의식하고 이 땅에서 섬겨야 할 자들임을 기억하고 교회 속에서 약한 자들이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이와 같은 칭찬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Ⅲ.저주 받을 자들과 이유.(41~46)

마지막 부분의 내용은 참으로 영원히 소망이 없는 마지막 사람들에게 주시는 위엄 있으신 선고이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41) 여기서 또 다른 표현은 “저주를 받은 자들아!” 하신 것인데 앞에서 의인들에게 “복 받을 자들이여!” 하신 것과 차이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구원이든, 저주이든 이미 현실 속에서 가지고 있다.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하신 것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을 불순종함으로 받는 저주도 이미 현실 속에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가지 더 두려운 말씀은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하신 것인데 주님을 떠나는 것이 곧 저주임을 깨닫게 되고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말씀을 보면서 지옥은 사람을 위하여 예비 된 곳이 아님을 분명히 일깨워 주고 있다. 결국 영원 전부터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교만하여 자신을 높이기 위하여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어두움의 세력들을 벌하시기 위하여 예비 된 곳이다.(유1:6) 이러한 악한 무리들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당연히 그들이 들어가 형벌 받을 곳으로 함께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주님은 의인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반대로 표현하고 계신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42~43)

여기에 반응하는 악인들의 말 역시 의인들과는 반대되는 내용이다.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44) 결국 이들의 주장은 자신들은 할 바를 다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시느냐는 투의 변명이다. 악인들은 자신들이 한 선행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것이 하나님께는 기억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 지극히 작은 자들이 눈에 들어 오는 것은 바른 신앙의 사람들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권의 관계 속에서 나누고 교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가리켜 악한 자들이라고 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마지막은 결심재판의 선고문과 같고 또 사실이다. 여기서 선고 받은 것은 어디에도 상소할 법정이 없기 때문이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46)

모두의 영원한 운명은 현실 속에서 선택되고 결정된다. 그 결정적인 조건은 이 우주와 모든 생물의 창조주요 에덴의 범죄 후에 범죄에 예외가 없는 모두에게 대속의 역사를 이루어 주신 하나님을 순종하여 그 믿음이 현실의 삶 속에 행해지느냐 그렇지 못하는 가가 중요한 관건이다.

이 세상의 재판은 완전히 공정하지 못한 것은 나타난 증거만을 가지고 판결을 하기 때문에 때로는 억울한 피해를 입기도 하지만,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 특히 마음 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우리의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각자가 잊어버린 선행도 철저하게 기억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행위까지도 달아 보시는 완전히 공평하신 재판장이시다.

특히 불의가 관영 하는 이땅에서 작고 작아서 내 팽개쳐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주님의 사랑 때문에 행한 것이 곧 주님께 행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미 이 복음서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나눈 바 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분명한 것은 자신의 공로와 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행한 것들이 영원 속에서도 칭찬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 주어진 상황 속에서 매 순간을 주님을 의식하며 의를 행함으로 살아서 지금은 물론 마지막 영원 순간에도 주님으로부터 “복 받을 자들이여!” 라는 칭찬과 함께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축복의 대상들이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