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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이 25장에서는 재림 때에 있게 될 3가지의 현상에 대한 비유로 중요한 깨달음을 주고 계신다. 오늘 다루게 되는 말씀은 ‘준비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한 내용이고 14~30에서는 다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충성과 불충성의 결과’를, 31~46에서는 ‘심판의 모습’을 최종적으로 경고하신다. 물론 여기 세 비유 모두에서 같은 것은 천국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결론 된다.
이 말씀은 역시 이미 앞장에서 상고한 내용에 대한 확인처럼 반복되면서 보다 분명하다. 이 1~13의 내용은 24:36~44까지의 내용의 확증이라면 다음 주에 다루게 될 14~30절의 내용은 24:45~51절과 내용을 같이 함을 깨닫는다.
오늘의 비유는 역시 당시의 이스라엘에서 가장 흔한 혼인예식을 사용하셔서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의 마지막의 혼인예식을 위하여 준비한 삶과 그렇지 못한 모습을 비유하신다. 그러나 신랑은 분명히 언급되지만 여기에 신부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도 신비한 점이다. 대부분의 성경 해석자들은 열 처녀를 신부의 들러리라고 이해를 하지만 저는 좀 다른 이해를 갖는다.
신부는 바로 이 준비된 다섯 처녀라고 봐야 되는 것은 외형적으로 교회를 들락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기 본문에 나오는 열 처녀처럼 외형적으로는 전혀 다르지 않으나 최종적인 혼인잔치에 들어설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진위(眞僞)가 가려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무엇보다도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신부된 참 성도에 대한 구분의 비유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가 하면 본문의 내용에서는 주님의 일상적인 가르침과는 좀 색다른 점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그런 내용을 보면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는 기름을 준비치 못한 처녀들에게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냉정하게 거절하는 것은 산상보훈에서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42)는 내용과는 조화가 되지 않지만[평상시 가르침 대로라면 자신이 신랑을 못 맞는 한이 있어도 모두다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실 것이다.] 복음이 증거 될 때까지는 모든 것은 열려있고 나눌 것을 가르치시지만 마지막 심판 때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상선벌악(賞善罰惡)에 대해 조금의 이해도 용납치 않고 냉정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용서의 때 은혜의 때를 놓지는 것은 어리석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 사도는 재촉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1~2)
그렇기 때문에 비록 어두움의 마지막 때이지만 깨어서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잘 하여 이미 닫힌 문밖에서 슬프게 문을 두드리는 일이 없이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혼인잔치에 다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Ⅰ.열 처녀의 모습은 겉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1~5)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이스라엘은 주님 당시까지도 혼인 풍습은 좀 독특했던 것 같다. 시간을 약속하지 않고 다만 어느날 ‘저녁’으로만 알리고 준비케 했던 것이다. 대개의 경우는 초저녁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었고 예수께서는 바로 이점을 자신의 재림의 비유에 사용하고 계신다.
사실 주님의 이 땅에 다시 오심의 시기도 죄의 어두움이 극에 달할 때에라는 사실을 영적인 사람들이라면 이해하는 사실이다. 이 시대의 도시는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고 어두움은 없는 듯 보이지만 보이는 빛이 다 빛이 아닌 것은 대낮에도 밤에 일어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의 신부될 약속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신부의 순결을 잃은 체로 오히려 주님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보다는 욕을 돌리는 일이 많다고 하는 데서 역사의 마지막 때를 더욱 실감하게 되는 것 같다.
열 명 모두가 같은 목적과 자세로 보인다. 이 열이라는 숫자는 비유인 만큼 상징적인 수이다. 혼인예식을 위하여 차려 입고 등불을 들고 나간 모습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 기다리던 신랑이 오는 시간이 지체되자 자는 것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5) 라는 내용으로 봐서 다섯만 졸다가 잔 것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들에게서 외관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었다.
그들 중에 절반은 ‘미련한 다섯’과 ‘슬기 있는 다섯’으로 분리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3~4)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주님의 신부로 영원한 혼인예식에 참여치 못할 미련한 자는 사실에 있어 50%가 아니라 99%가 될 것 같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는 말씀을 볼 때도 그렇다. 물론 이 비유의 교훈은 구원의 비율에 있지 않다.
물론 열 처녀가 다 등불을 밝히고 있었다는 사실은 뒤의 8절에서 “미련한 자들이 …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라는 사실에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미련한 자들의 등불은 꺼져가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슬기 있는 자들은 신랑이 늦게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각오하고 여분의 기름을 함께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보이는 모습에서는 별로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지만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미련한 자’와 ‘슬기 있는 자’로 평가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영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땅에 사라질 것들에는 예민하게 신경을 쓰면서도 영원과 관련된 것들에는 무딘 것이 더 딱한 비극이다.
여기서 그냥 지나갈 수 없는 한가지가 바로 비유적으로 사용한 ‘기름’이다. 여러 가지 짐작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역시 기름은 성령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4) 라는 여분의 기름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먼저 우리가 가진 성경에 성령에 관한 많은 구절들이 있겠지만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는 요한의 가르침은 성령의 역사로 모든 영적인 것이 밝혀진다고 하는 사실에서 빛이신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성령이 그리스도의 사람들 속에 거하심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라는 베드로의 선언은 그 성령께서 우리 죄인 되었던 사람들 속에 어떻게 오심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으며 이러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천국을 볼 수 있도록 밝힘을 요한복음 3:3, 5에 약속되고 있고, 다시 에베소서1:13에서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라는 사실에서도 믿고 순종하는 자 속에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의 약속을 본다.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4) 라는 여분의 기름은 바울 사도의 당부의 내용처럼 바로 바닥나지 않는 성령의 충만[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으로 이해 하는데 무리가 없다. 이런 입장에서 그릇은 바로 성령을 모시고 사는 우리의 마음이 될 것이다.
또 뒤에서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9)는 말씀을 통해서도 성령은 사람이 줄 수 없는 것이므로 확실하다. 어떤 경건한 사람이라도 성령을 나눠줄 수는 없다.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는데, ‘사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 흘림만이 죄의 사람들을 사서 성결케 하고 성령이 거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증거 되는 메시지에 십자가가 얼마나 있는가 진정으로 죄인이 살 수 있는 도구 절망과 사망에서 인간을 살 제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지만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십자가 보다는 이 땅에서의 부귀와 영화만을 하나님의 복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이 말세지말(末歲之末)에 참으로 안타깝고 두렵기만 하다.
많은 사람들은 어두움의 마지막 때 성령을 소멸하고 불 꺼진 등불처럼 등의 모양은 있으되 빛은 없는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맞게 된다면 평생의 믿음생활은 헛것이 될 수도 있다.
주님 오실 때까지도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밝히면서 주님을 맞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Ⅱ.갑자기 닥친 신랑의 소리에 반응하는 각각의 다른 반응.(6~9)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기다림에 지친 처녀들은 차려 입은 옷에 관계없이 다 졸며 잠이 들었을 때 잠결에 들리는 소리가 그들의 운명을 갈라 놓는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6) 어느 소리 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소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불 꺼진 등으로 맞는다면 자신의 아름다움도 과신할 수 없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도 없을 것이다.
처음의 모습처럼 그들은 눈을 비비고 흘린 침을 닦은 후에 등을 준비한다. 하지만 여기서 미련한 자들과 슬기 있는 자들의 모습은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미련한 자들은 허둥대고 슬기 있는 자들은 침착하게 다음 행동을 준비하는 것이 엿보인다. 신랑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저들의 모습은 별 차이가 없었었다. 이 땅에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그럴 것이다.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 슬기 있는 자들에게 미련한 자들은 도움을 청한다.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그러나 여기에 반응하는 슬기 있는 자들도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미련한 자들이 등불과 함께 기름을 여분으로 준비치 않았던 것은 다른 편에서 생각할 때는 옆의 슬기 있는 자들이 기름을 여분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때와 마찬 가지로 여차하면 얻어 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가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늘 나눠 주기를 좋아 하는 신앙적 습관이다. “…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b) 늘 받기를 습관화 하는 신앙은 마지막의 순간에도 같은 습성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나눠주는 신앙적 행위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 땅에서는 얻어 쓰고 나눠 쓰고 받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늘 주려고 하는 자세는 이렇게 나누기 위해서 여분을 준비하는 아름다운 자세에 익숙해져서 충분히 준비하는 자세로 살고 물론 성령의 사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이와 같을 것은 기정 사실이다.
[손에 있는 부귀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Read, 1절:손에 있는 부귀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이슬 같은 목숨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사랑의 빛 잃어 가면 주님 만날 수 없어, 헛된 영화 바라보면 사랑할 수가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Sing 3절: 언제 다시 주 오실 지 아는 이가 있는가 신랑으로 오실 주님 맞을 준비되었는가,
기름 없는 등불 들면 주님 만날 수 없어 재림나팔 소리 나면 예비 할 수도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 들 뿐이니 주를 맞을 준비함이 금보다 더 귀하다.
Ⅲ.행복과 절망의 다른 결과를 본다.(10~13)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제 역사는 마무리되고 있다. 그리고 미련한 자와 슬기 있는 자의 이유가 들어 나고 만다. 모두가 이 마지막 순간을 위하여 여태껏 졸음과 고통을 견디며 밤을 지켜 왔는데 결과에 와서 두 부류는 너무나 다른 운명으로 나눠지고 만다.
1.예비하였던 자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 간다. 처음부터 이 마지막을 마음에 두고 밤을 지샌 다섯 처녀는 마침에 영광의 아침을 마지 한다.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10) 주님의 영광을 사모하며 그 곳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인생을 달려 온 자들이라야 이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항상 열려 있던 그 문은 마침내 굳게 닫히고 만다.
열려있을 동안은 자유로이 왕래하고 그곳에 문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그러나 닫힌 문 앞에 서보라! 그것도 내 것이 다 그곳에 있다고 하는 자신의 방문이 잠겨서 들어가지 못하는 경험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나의 모든 것을 그곳에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와는 완전히 다를 곳이 되어 버린다. 한번 닫힌 하늘의 문은 절대로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다.
2.기도는 더 이상 응답되지 않고 안에서 들려 오는 소리는 더욱 절망적이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11) 여기서도 산상보훈에서 증거 되었던 주님의 몇몇 교훈들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주여 주여”를 연거푸 불러 보지만 그 고백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만약에 예수께서 진정으로 주인이 되는 분으로 그 사람들 속에 존재해 왔다면 그들은 이런 모습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응답대신 안에서부터 들려 오는 말씀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거짓 종들에게 선언했던 말씀 그대로이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그렇게 안다고 큰소리치고 있었는데 나를 모른단다.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나 자신만 알고 있노라고 자만하지말고 정말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가에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겉으로는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이 미련한 자인지, 슬기 있는 자인지… 그러나 자신과 주님은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임하시게 될 주님 앞에 각자의 형편은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아시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남의 도움으로 신앙을 유지하는 모습에서, 성장하여 나눠주기를 즐기는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겉모양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마지막 때까지도 주님께서 아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완전히 구원 받게 하시려고 속죄의 피를 흘리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9~10)
언젠가 주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그 순간이 언제가 되든 준비된 자세로 맞으므로 천국문이 닫힌 후에 밖에서 열어 달라고 두드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고 그 여광의 혼인 예식이 바로 우리 각자를 위한 영광의 순간이 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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