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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마 24:40~51 2006-01-29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재림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중에 이러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다시 오심을 은혜로 감격하며 맞을 자와 반대로 이 은혜의 순간이 저주의 시간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계속되는 비유로서 경계를 주고 계신다.

신앙 생활의 결과는 마지막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셨을 때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따라 주어지는 경계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b)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죽을 힘을 다해서, 죽을 때까지 충성하는 것을 당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마태복음 24:13에서도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이미 상고한 바 있다.

한 순간의 충성이나 경계는 누구나 가능하지만 끝까지 충성은 어렵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은 순간적으로 임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3:14)

우리 일상의 삶이 재림의 때에 가져올 결과와 다시 경계를 주시고 말씀에 충실하여 주님의 다시 오심의 때에 인정 받아 상을 받을 자들과 수 없이 경계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책망 듣는 자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두 가지의 모습을 비유로 주시면서 오늘 우리 각자의 믿음을 일깨워 주고 계신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옆으로 흘리지 말고 자신의 말씀으로 받아서 예비하고 매순간 수시로 일깨고, 끝까지 충성해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오실 때에 복 있는 종들로 영광의 유업을 기쁨으로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Ⅰ.데려감을 받을 자와 버려둠을 당할 자의 모습.(40~41)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여태껏 예루살렘 멸망과 주님의 재림을 함께 말씀해 오셨지만 여기서는 확실히 예루살렘 최후의 예언과는 관련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앞 절(40)에는 두 남자의 모습을 그리고 다음 41절에서는 두 여자의 상황을 말씀 하심으로써 주님의 다시 오심의 과제는 남녀의 구별이 없음을 본다. 남자든 여자든 재림의 때에 이 땅에 버려둠을 당한다면 그것은 분명 절대적인 비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가 현재의 이 세상에서는 무시를 당하고 서운함을 겪어도 나중에 회복될 수 있지만, 마지막으로 이땅에 죄와 상관없이 다시 오시는 주님으로부터 버려둠을 당하는 것은 영원히,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절망과 수치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믿음 생활 잘하는 것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외로움을 겪는다 해도 나 자신이 철저하게 주님을 섬기는 이유 때문이라면 그러한 서러움은 반드시 주님께서 갚아 주시겠지만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외면을 당한다면 그것은 회복될 수 없는 슬픔과 저주가 될 것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늘 이것을 마음에 두고 이 세상의 삶을 살았음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히10:34) 다시 믿음 장이라고 하는 11장에서 모세에 대하여 평하기를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고 증거 한다.

세상의 것은 다 잃어도 괜찮다. 그러나 하늘의 상급과 영광을 잃는 것은 인생을 다 잃는 것이요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은 밭에 있다가,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다가 최후를 맞는 데 생각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들이 ‘예배당에 있음에’ 가 아닌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녹이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창5:22~24)는 사실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경건으로 사는 삶은 반드시 기도원이나 수도원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일상의 일을 같이 하였지만 늘 주님을 의식하고 목적하고 사는 것과 그렇지 못한 삶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일생이 다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일하는 것이 필요하고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내 일생 다가도록 주 의지하리, 주 내게 기쁨 주네 주 의지하리, 천국 길에 검은 폭풍 몰려올 때도, 주 나를 놓지않네 주 의지하리, 주는 내 친구 진실한 친구 세상 끝까지 주 의지하리”

오늘 그리고 계속되는 나의 삶에 의해서 마지막 순간 우리의 영원한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인도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갈 수도 있고, 버려둠을 당하는 절망으로 끝날 수도 있다. 우리 모두가 매일 매순간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는 바울 사도와 같은 당당한 마지막을 맞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



Ⅱ.다시 오심을 예비할 것을 당부하신다.(42~44)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우리는 이제 다음 장에서 깨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을 다시 보겠지만 이 말씀을 읽노라면 마치 밤잠을 설치며 도둑을 지키는 어느 집 주의 모습이 상상 된다. 요즘도 도둑이나 강도에 의해서 어떤 집들이 털리고 막대한 피해를 보는 것들을 뉴스를 통해서 종종 듣는다. 사실 이 모든 일들은 경비의 소홀로 즉, 방심하고 있다가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혼이 경성치 못하면 귀중한 생명을 도둑맞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방심하고 있다가 마지막 영광의 때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지 못할 위험성도 있음을 경계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5:6~8)는 바울 사도의 당부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42절에서는 ‘어느 날에’ 43절에는 ‘어느 경점에’ 즉, 날과 시를 상상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깨어 있으라, 헬, 그레고류오(gregoreuo), 정신차리다, 경계하다, 주의하다 의 동사형이다. ←이 낱말은 헬, 에게이로(egeiro), 깨우다, (잠에서, 누운 것에서, 병에서, 죽음에서, 활동이 없는 데서, 파멸에서)눈을 뜨게 하다, 일으키다, 세우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다, 들어올리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엡5:14)는 말씀에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깨어 있으라,(그레고류오)가 사용된 예를 보면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16:13)는 당부와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는 내용과 함께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3:2~3)는 사데 교회에 준 엄숙한 경계에서 읽게 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다른 말로 ‘깨어있는 사람’이다. 세상이야 어두움에, 술에 취해 자신을 가누지 못할 때에도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는 낮의 백성으로 이 역사를 지키는 파수꾼들이다. 그러나 이 역사의 밤이 깊어 갈수록 많은 신앙 하던 사람들조차 영혼이 잠들 위험성에 대하여 성경은 수없이 경계하고 있다.

“…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예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각지 않은 때’가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약속을 가진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땅에 쌓아둔 것에 마음을 뺏겨서 영원의 부름을 거절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영혼이 깨어 있는 삶을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시간을 말씀하시고 어떤 특별한 곳엘 데리고 가겠다고 하시면 우리는 마음이 설레서 다른 일에는 제대로 손이 가지 않고, 자꾸만 시계를 보면서 초조하게 기다렸던 경험이나,

옛날 결혼식을 앞둔 신부가 베갯잇이나 방석에 자수를 한 땀 한 땀 놓으면서 신랑을 만날 그날을 고대하며 가슴 설레던 그런 기대가 요즘은 문화 때문에 많이 퇴색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신부된 모든 성도들은 마지막 혼인예식에 들어갈 설레임으로 각자의 영혼을 씻고 단장함으로 아직 한번도 육신으로는 뵙지 못한 영광의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16:15) 모든 인류가 전혀 예상치 못할 때에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성결을 잃지 않고 깨어 있는 신부로 주님을 맞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



Ⅲ.재림 앞에서 복된 자의 모습.(45~47)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여기서부터는 좀더 구체적으로 주님 오셨을 때 심판 주를 맞는 자세를 비유해 주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의 모습으로 비유될 수 있는 것은 권리에 있어서는 분명히 천사도 부러워 하는 ‘하나님의 자녀’ 라는 엄청난 특권을 가진다. 그런가 하면 섬김에 있어서는 완전히 우리의 권리를 위임한 종으로서의 순종을 드린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나타나는 ‘충성 된 종’과 ‘악한 종’은 그 하는 일들에서 비유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넓은 의미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지만,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인도하고 관리하는 지위에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쁘심과 같이 충성 된 자라야 한다. 여기 ‘충성 됨’이란 열심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믿음직한’ 진실된 종을 의미한다. [충성, 헬, 피스토스(pistos), faithful, 믿는, 신뢰하는, 확신하는, 진실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신실한 자가 하나님의 집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생명의 양식, 우리를 혼란케 하지 않는 섞지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눠 줌으로서 성도들의 영혼의 건강을 보살피는 일을 주님 오실 때가지 지속적으로 감당할 것이고, 그런 좋은 양식을 함께 먹고 영혼이 건강한 하늘의 백성들이 이 충성 된 종과 함께 영원한 영광에 함께 들어가게 될 것이다.

‘충성’은 사실 하나님을 깊이 신뢰 함에서 오는 것이고 지혜는 세상의 哲學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지혜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의 충성 된 종은 하나님의 집을 섬김에 있어서 세상의 어떤 것도 사용치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것 만을 사용하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요즘 우리 나라를 비롯해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건강이 상하고 있는 것은 어려서 부터 좋아하는 fast food 때문이라는 학자들의 통계를 더러 듣는다. 아이들은 부모가 몸에 좋은 것을 줘도 잘 먹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자기가 먹고 싶어하는 페스트 푸드나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들을 먹으려고 애를 쓰고, 그러다 보니 요즘은 성인병들이 어린이들에게서부터 나타나게 되는데 특히 예를 들면 당뇨병 같은 것들이다.

외 이 말을 하는고 하면 그리스도인들도 편식을 좋아 하는 것들을 보기 때문이다. 영혼에 좋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귀에 달콤한 얘기만을 좋아하다 보니 영적으로 건강치 못하고 병이 나는 예들을 특히 우리 대한민국 속에서 많이 보아오는 사실이다.

애굽을 빠져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만나를 계속 넘치도록 주셨지만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민11:4~6) 결국 이러한 그들의 소원이 이뤄지지만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입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충성 된 하나님의 종은 사람들이 즐기는 것보다는 때를 따라 영적인 사람으로 장성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만나인 양식을 나눠주는 종이라는 것이다.

또 이런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영원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소유를 유업으로 맡아 누리게 될 것임을 약속 받고 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하늘의 지혜와 충성으로 주님을 받듦으로 복이 있고, 우리 주인의 모든 소유인 천국을 유업으로 누리는 마지막의 재림에 합당한 모두가 되시기를 …



Ⅳ.다시 오실 주님 앞에 악한 종의 모습과 결과.(48~51)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기에서 말씀 하시는 종은 분명히 이방 종교의 지도자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럼에도 ‘악한 종’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이 악한 종의 판단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 즉, 생각하는 것 만큼 빨리 오시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에는 뒷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역시 세상의 것들에 마음이 팔려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이 사람의 대체적인 행동은 동료를 때리는 일과 술친구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이었다. 이것은 어쩌면 가장 오늘 세상의 일반적인 모습과 다르지 않다. 또 이 사람의 판단은 언제나 자기 생각이다. ‘마음에 생각하기를’, ‘생각지 않은’ 하나님의 집 사람들을 먹이고 양육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지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여기의 동무들은 그냥 동무들이 아니고 [동무들, 헬, 쉰둘로스(syndoulos), 함께 하는 종들] 이며, [때리며, 헬, 튑토(typto), 몽둥이로 치다, 망치로 때리는, (양심을)위배하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고, [술친구,헬, 메뒤오(methyo) 취하도록 마시다, 술 취하다←명사형인 헬, 메데(methe) 중독]

이 악한 종의 모든 것들은 전혀 영적인 행동이 아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 일꾼들에게 아픔을 주고 하나님의 성령이 아닌 세상의 다른 사상이나 생각에 중독되어 있어서 신령한 것을 전혀 판단할 능력을 잃어버린 모습이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일을 하는 것이야 말로 외식하는, 이중적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셔서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절망의 모습으로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맞게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출 취한 것 같은 다른 사상, 세상의 풍조를 쫓아 내야만 한다. 이것은 대단히 아프고 힘겨운 일이겠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주님께 대한 기대와 소망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재림에 둔감해지고 은혜를 나누는 것 보다는 서로 상처를 주고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사상에 취해있게 될 것이고, 마지막은 환희와 감격이 아니라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임을 주님께서 경고 하신다.

우리의 보이는 육신과 영혼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서 마지막 의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조금의 실수도 없이 데려가실 자와 남겨 두실 자를 가리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려둠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예비하고 깨어 주님의 명령을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깨어있는 자들에게는 오시는 날과 시간이 감추어 있어도 도적같이 임하시지 못할 것은 주님으로부터 반드시 영광으로 데려가심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흐름의 민감함보다는 하늘의 역사에 민감한 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모든 생각과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인 말씀을 유일한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그것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신실하게 일하는 동료 일꾼들에게 상처를 주고 세상의 풍조에 빠져 주님과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외식하는 자로 주님 앞에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16:3b)고 책망하셨고, 예수께서 이 땅에 대속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 오실 때에 하늘을 살피며 역사의 징조를 살피던 박사들처럼 이제 이 역사의 마지막 주님의 다시 오심의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하여 진실의 충성과 신령한 지혜로 충만함을 지속적으로 받는 저와 여러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