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마 24:29~39 2006-01-22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불신자간에 역시 가장 민감한 부분의 하나 중에 속하는 부분이 바로 이 재림의 부분이다. 아니 같은 신앙의 사람들 간에서도 차이를 내는 부분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바라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신앙 상태의 차이를 생각할 수 있다.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사모하는가? 나이든 이들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그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제자들이 주님께 “…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24:3b) 라는 질문을 드렸고, 오늘 내용은 좀더 이 질문에 다가서는 말씀이다. 사실 주님께서 제자들이나 우리에게 주시는 경계는 재림의 시기에 대한 것보다는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의 자세에 더 초점을 두고 계심을 본다. 이 부분도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이 갖는 생각과는 크게 다름을 본다.

사실 우리가 복을 사모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복을 받을 수 있는 삶의 자세이다. 성경에는 수 없이 많은 복이 약속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아무리 복을 받으려고 해도 그 복을 어떻게 해야 받을 수 있는가? 라는 가르침을 삶으로 순종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그 복은 나의 것이 되지 못하고 그 복 받을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만 받을 것이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우리를 죄에서 사주신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구원을 사모하고 기대하면서도 구원에 합당한 순종이 없다면 이 엄청난 구원의 복도 순종하는 자들만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믿음은 관념적으로 생각에만 머무르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이 나의 것이 되도록 나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계명(명령)아래 복종시키는 믿음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을 비롯해서 주님께서 재림의 사실을 말씀하실 때마다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모든 죄의 값을 치루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셔서 우리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고 죄악이 관영 할지라도 다시 오실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깨어서 성령과 더불어 의를 행하며 사는 사람들은 오심의 날에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신앙적 자세만 된다면 언제 주님께서 오신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주시는 경계의 교훈들을 순종하여 재림의 날을 영광과 승리의 날로 맞는 저와 여러분 …



Ⅰ.재림의 영광과 그 영광에 참여치 못할 자들의 탄식(29~31)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지난 두 세 주에 걸쳐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언과 이 역사의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함께 말씀 드린바 있지만 이 말씀은 분명히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님이 분명한 것은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29)는 말씀을 볼 때 분명하다. 예루살렘의 멸망 사건은 분명 땅에서만 있었던 사건이었고 천상에 다른 징조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세상을 심판하실 마지막 때를 대개의 경우 ‘여호와의 날’로 표현하고 있으면서 하늘에서의 변화의 징조들을 예언하고 있는 내용들을 읽을 수 있다.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사13:9~10)

사실 구원의 역사 속에 이 우주적이고 태양계 혹성 안에서의 변화들이 두 번 정도 구약 성경에 언급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수10:12~13)

또 한번은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연장해 주신 징조로 “… 그림자가 십 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 도가 물러갈 것이니이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왕하20:8~11; 사38:8)는 기록이 그것이고 더 분명한 하늘의 변화는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위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고통하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광경을 보실 수가 없어서 해가 빛을 잃었던 사건이었다.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마27:45; 막15:33; 눅23:44) 라고 공관복음의 기자들이 한결 같이 증거 해 주고 있다.

이런 천체의 변화는 이제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마지막으로 있게 될 것임을 신구약 성경에서 한결같이 증거 해 주고 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욜2:31; 행2:20) 베드로 사도는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7)

우리는 지진이나 쓰나미, 태풍 같은 땅에서 일어 나는 변화와 재해에도 떨게 되는데 하늘의 큰 변화들에 얼마나 두려움이 클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쓰나미?)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눅21:25)는 말씀으로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29b)는 내용들은 외형적인 모습이기도 하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이 땅의 명예와 영광(별-Star)들이 가치를 잃는 모습으로도 이해가 되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는 말씀은 정사와 권세 즉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 더 이상 힘을 떨치지 못함을 말씀해주고 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30)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광체가 나타날 때 가슴을 치는 일이 있을 것인데 그들은 바로 ‘땅의 모든 족속들’이다.

바울은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고전15:40) 라고 부활의 논리를 가르치고 있다. 땅의 사람들에게 감춰져 있던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 위엄을 들어내는 순간 후회와 탄식을 하겠지만 때는 늦은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 역사 이전에 하늘을 향해서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하고 비록 땅에서 연약한 모습으로 죽으신 것으로만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나님 우편의 영광을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깨달아야만 한다.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31) 이제는 사람을 땅에서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동시적으로 주님께 딸린 자들을 천사들을 통해서 모으실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재림의 순간을 좀더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①주께서 호령과 ②천사장의 소리와 ③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2~13)라고 당부를 주고 있다. 주님의 말씀과 약속에 살아서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



Ⅱ.종말의 확실성(32~35)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종말의 시간을 지정하여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종말의 때가 다가옴을 감지할 수 있는 상징들을 가르쳐 주신 것도 믿음의 사람들에게 큰 은혜이다. 사람들의 느낌이나 감성보다도 더 분명한 것은 자연이다.[자연 속에 일어날 징조들에 대하여 사람들보다 미물의 자연이 민감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배우는 겸손을 가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땅에서 흔하디 흔한 무화과 나무를 들어 비유를 주신다. 앞에서 말씀하신 여러 가지 징조들을 보면서 무화과 나무로 여름의 가까움을 감지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34) 이 말씀은 적어도 두 가지 입장에서 이해를 해야 옳을 것이다. [세대, 헬, 게네아(genea), 세대뿐 아니라 가족, 탄생, 혈통, 민족, 대대(눅1:50; 엡3:21), 시대(눅16:8; 행15:21), 만대(골1:26) 등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번역이 가능한 낱말이다.]

①당시에 이 말씀을 직접 듣는 이들에게는 예루살렘 멸망이 당시의 세대 안에 있으리라는 비극적 예언이었고 그 예언대로 그 후 대략 한 세대로 치는 3~40년 후에 예루살렘이 멸망했다.

②앞에서 주님께서 인용하셨던 15절의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는 다니엘서 12:11의 내용으로 이해한다면 바로 사람의 세대 즉, 허용된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 역사하는 인간의 세대라고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단12:9~11) 구태여 이 상징적인 숫자를 억지로 풀이할 필요는 없겠지만 사람의 시대의 상당기간을 가리킨다고 이해된다.

지난 주에 인용했던 말씀을 다시 한번 인용하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6:10~11)

이 말씀의 상징은 창세기15:16에서도 본다.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약속인데 가나안을 그 후손에게 주시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라는 의미로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고 말씀하심을 본다.

여기까지 상고해 온 것으로 볼 때 마치 소돔성과 같이 죄악이 관영하여 더 이상 구원의 말씀(복음)을 받아 드리지 않을 때까지 주님은 이 세대를 용납하시게 되는 데 그 이유는 엄밀히 말하면 한 사람이라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여 구원 얻게 하시는 사랑 때문이다.

주님은 여기에 한 말씀 덧붙이시기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5)고 말씀하신다. 천지는 이렇게 불 타서 없어진다 해도 하늘과 땅의 창조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약속은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이루실 것이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꼭 같은 이 역사의 마지막은 그것을 기다리는 자세에 의해서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예언의 말씀은 인간이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계라는 사실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1:16)

진정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마지막을 향하여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아무리 하늘의 변화와 징조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 수 있음을 감사할 수 있다.

가져오실 은혜를 온전히 바람으로 마지막의 역사를 기다릴 수 있는 깨어 있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역사의 파수꾼으로 온전히 사는 저와 여러분 …



Ⅲ.재림의 시기(36~41)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계속 일관되게 말씀 되어지는 부분이면서 또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떻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거나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요14:11)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9)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유독 여기서만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입을 닫으시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해와 날과 시를 계산해 내는 과오까지 범하는 예도 더러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일만은 육신을 입으신 주님께서 누설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바울도 많은 부분에서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는 표현을 많이 쓰면서도 역시 이 부분에서만은 주님과 같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과 다른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임을 본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정욕이 더 문제이다. 성경이 침묵하는 것은 우리 모두 침묵할 수 있는 겸손이 때로는 은혜를 은혜 되게 한다.

함에도 우리가 혼란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그 밖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필요한 것들은 어떤 것도 숨기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주님의 교훈대로 준비하고 산다면 그 날을 알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확신이 들기도 한다. 그런 입장에서 주님의 다시 오심의 날을 알고자 하는 욕심은 접는 것이 우리에게 오히려 은혜임을 확신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 더 마음을 써야만 한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37~39)

이 말씀은 우리의 대단한 경성을 요구하시는 말씀이다. 그 경성이라는 것은 세상의 향락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죄가 관영한 노아의 시대에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 밖에 없었고 이것은 순간적이고 반복적인 것일 수 밖에 없는 이 땅에 속한 것들이다.

사람에게서 영성을 제한다면 사실 남는 기쁨이란 이것 밖에 없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노아의 시대의 사람들이 찾았던 기쁨이 물질적이라면 이것은 대단히 영적이며 신령한 것이다. 여기서도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는 바울의 이론이 들어 맞는다.

더욱더 심각한 것은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라는 안타까움이다. 죽을 줄 모르고 살기 위해서 기쁨을 갖기 위해서 먹고 마셨으니 짐승과 다를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래서 영적이지 못한 삶은 짐승에 비유되고 그렇게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미래를 갖지 않는 인생이라면 개 돼지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면서 이러한 역사가 오늘 우리 시대에도 있을 수 있음을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경고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경성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일, 결혼하는 육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홀연히 임하실 수 있다는 경계가 사실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신앙의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런 모습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경계의 말씀을 주고 계신다. “나는 지금 이 일 때문에 무척 바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렵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에게도 주님은 같은 말씀을 주신다. “그래도 나는 홀연히 임할 수 밖에 없다.” “꼭 이 일만 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하는 사람에게도 “나는 너의 시간에 맞출 수가 없구나 그러니 경성하여라!” 누구에게 어떤 처지의 사람에게도 주님은 다르지 않고 봐 주실 수 없이 오로지 회개를 기다리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의 다시 오심이 어떤 사람에게는 탄식의 날이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감격의 날이 될 것인데 그러한 결과는 주님의 재림의 때까지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이런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주님의 다시 오심의 시간은 계속 이 역사 속에 다가오고 있고 주님은 지속적으로 말씀과 징조를 통해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을 준비 시키시기 때문에 하늘의 음성에 늘 귀 기울이는 영적인 민감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육신적인 향락,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 있을 때 멸망은 홀연히 임하고, 죄를 탄식하며 의를 좇아 살려고 애쓰는 자들에게도 상상하지 못하는 시간에 감격적으로 주님은 오실 것이다.

베드로 사도의 권면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 라는 권면과 함께 바울 사도의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5:3~6)는 당부의 말씀으로 살아서 언제 오셔도 할렐루야로 맞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