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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4:1~14 2006-01-09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제 주님은 예루살렘에 들어 오시고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을 실 날 하게 비난하신 후에 이 복음서의 특징으로 꼽는 교훈 중에 마지막 5번째 교훈을 주시는데 이 24장은 예언적인 내용이며 25장은 거기에 연이은 말세적 비유를 주신 후에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수난으로 나아가시는 모습으로 전진한다.

특히 이 24장의 예언은 예루살렘과 더불어 이 역사의 마지막을 교차적으로 함께 말씀 하심으로 어떤 경우에는 혼란을 느끼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지난 주에 예루살렘을 향해 탄식하시던 주님의 안타까움을 보는 제자들은 아무리 예루살렘에 망한다 할지라도 설마 이 잘 지어진 성전이야 무너질 수 있겠는가라는 투로 성전의 웅장함을 칭찬하고 이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반응은 제자들이 기대했던 답변과는 의외의 반응이셨다.

인생에서나 어떤 일에 있어 마무리는 대단히 중요하고 신앙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최종적인 승리의 믿음 생활을 위하여 마지막을 바로 내다 보는 지혜는 대단히 중요하다.



Ⅰ.보이는 것은 아무리 아름답고 튼튼한 것도 영원하지 못한 것들뿐이다.(1~2)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예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소위 제3성전이 지어져 가고 있는 상황에 있었다. 제 일 성전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7년에 걸쳐 건축한 솔로몬 성전(왕상6:37~38)이었고 이 솔로몬 성전은 B.C. 586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제 이 성전은 바벨론에서 귀환한 스룹바벨 일행이 B.C. 520년 귀환하여 건축한 것으로 예전의 솔로몬 성전에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것이었지만(스3:12) 헤롯 대왕이 유대의 왕이 되면서 B.C. 19년에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 스룹바벨에 의한 제2 성전을 개축한다는 명목 하에 제삼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 할 때까지 있었다.

B.C. 19년에 공사가 시작된 제삼 성전 즉, 헤롯 성전은 주님 당시에도 공사가 계속 진행 중이었고 주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신 후에도 계속되어 A.D. 63에야 완성이 되었지만 이 오랜 기간의 공을 드린 헤롯 성전은 주님의 예언대로 완공 후 겨우 7년 만에 완전히 돌 하나도 돌 위에 놓이지 않은 상태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무려 82년에 걸쳐 지어진 성전이 그 공사 기간의 10% 동안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것이 의미하는 바도 크다. 인간이 꾸민 것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견고하다고 해도 그 위용은 오래가지 못한다.

[베드로 성당-1506년 8월에 쥴리우스 2세에 의해(건축가 브라만테) 기초석→ 1514년에 라파엘로→1520년에 상 갈로→1546년에 미켈란젤로→ 1603년에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대충 마무리했으나 완성하지 못하여 몇몇교황아래에서 반세기이상 계속 되; 아직 미완성의 성당-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성당)는 1877년 건축가 빌랴르에 의해 기초초 세워지고 1882년에 가우디로 교체되1906년에 건물계획은 마우리 되었고 1926년 그가 죽자 다른 건축가들이 작업을 계승하여 계속 짓고있으나 앞으로 25년 후쯤에는 완성될 것]

“…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막13:1) “…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눅21:5) 그러나 주님은 인간의 눈을 휘황찬란하게 하는 이 거대한 조형물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고 답변하셨다.[돌 사이 사이에 끼어 있는 금을 찾기 위하여 무너뜨리는 바람에] 제자들이 얼마나 무안하고 안타까웠을까 생각되지만 인간이 건설한 보이는 세계의 찬란한 영광을 허황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보암직하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가를 바로 안다면 많은 부분에서 신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이 죄악과 절망의 인류를 구하시려고 공 생애를 시작하려 할 때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8~10)

이 땅의 최초의 여인이었던 이브도 그 현란한 눈의 화려함 앞에서 이성과 믿음을 잃고 만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창3:6)

그래서 요한은 당부하기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6~17)고 권면한다.

사도 베드로는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7)

최고의 미를 추구하던 솔로몬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31:30)고 고백한다. 바울도 같은 권면을 주고 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믿습니까?

이 땅에 우리의 눈을 휘둥그래 하게 뒤집는 것들은 다 무너질 것 사라질 것들이다. 믿음의 사람들, 영원을 향해 가는 사람들은 여기에 기준을 둬서는 안된다. 육신으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 진정한 영원에 속한 하나님의 약속과 거기에 따른 것들만이 변치 않는 견고한 것들이다.

이방인에 의해서 세워진 최고의 영광, 즉 종교와 정치가 타협한 최고의 결정체가 바로 헤롯 성전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 타협의 극치였던 성전은 같은 이방인인 로마에 의해서 무너뜨려졌다는 사실이다. 세상과 타협한 신앙은 반드시 세상에 의해서 무서운 도전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이다.

예루살렘과 성전멸망은 인간으로서는 제자들조차 도저히 불가능하리라 봤던 사건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역사의 종말도 그러할 것이다.



Ⅱ.미혹하는 일과 재난이 많을 것이다.(3~8)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전을 나오시면서 성전의 파괴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선언 하시고 이제는 늘 기도하기 위해서 가시던 감람산에 제자들과 앉으셔서 예루살렘 성이 바라보이는 가운데 제자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묻는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3b) 여기에 현실적으로도 유명한 단어가 된 [파루시아, 헬, 파루시아(parousia) - 현존, 임재, 출현, 대함, 있음, 재림] 란 말이 있다. 이 단어는 NT에 24회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NT에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말씀하신 것을 이 한 단어로만 사용되어지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입장에서 자칫 단어 하나 붙들고 시간을 소모하는 것도 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제자들은 ①“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즉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멸되는 그런 일이 어느 때인가?’를 묻고 ②“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묻는데 예수께서 이런 약속의 도성과 성전의 파괴라는 끔찍한 일을 상쇄하시기 위해서 ‘권능으로 임하실 역사의 마지막의 때는 언제인가?’ 라는 제자들의 기대 섞인 질문이지만 아무래도 이 물음자체가 예루살렘멸망과 세상역사의 마지막을 함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질문을 드리는 것으로 들린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때’와 ‘시기(時期)’ 보다는 그러한 때가 다가오면서 있어질 징조들로 답변하고 계신다.

1.종교적으로 속이는 일들이 많아질 것이다.(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진리와 진실이 없어질 것이라는 의미다. 여기 두 번씩이나 연거푸 쓰여진[미혹, 헬, 플라나오(planao) - cause to go astray, mislead; (안전, 진리, 도덕에서 부터)방황하다, 속다, 죄를 짓다, 넋을 잃다, 길을 벗어나다]이라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천사의 미혹’이 아니라 ‘사람의 미혹’이다.

벌써 이 역사의 말미에 거짓 메시야가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해 돋는 이 동방의 나라 만큼이나 가짜 그리스도가 많이 출현한 곳도 드물고 역사 속에 수없이 있어왔지만 특히 20세기를 거치면서 더욱 자주 출몰하고 있음을 본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딤후3:13) 결국 이러한 속임에서 자유할 수 있는 방법을 연이어 기록되는데 이것이 모든 것에 대한 영육(靈肉)의 방책(方策)이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5~17)

마지막 사람들과 거짓 그리스도들의 미혹의 혼란 속에서도 영적으로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진리의 말씀, 섞이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말세의 속임에서 각자의 믿음을 지키고 교회를 지켜가는 힘은 기록된 온전한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는 것 밖에 없다.

2.국가와 민족간의 전쟁이 빈번할 것이다.(6~7)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이 역시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사실들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있기 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매일 전쟁의 소식을 듣지는 않았다.

그러나 /Sep/1/1939 독일군이 폴란드를 공격함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후로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은 이 지구촌에 쉴 날이 없이 계속되어 오고 있다. 전쟁은 그 원인이 이권과 욕망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역시 물고 먹는 어두움의 산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정신과는 반대 현상임을 부정할 수 없는 마귀의 역사이다.

이 지구촌 속의 빈번한 포성과 무기를 제조하는데 쓰는 방위비의 예산이 평화를 위해서 쓰인다면 온 지구촌의 식량문제가 해결되고 남을 정도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지막 시대의 징조임이 분명하다. 이 시대의 전쟁은 그 양상이 다양화 되어서 여러 가지 형태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같은 국민끼리 흉기를 휘두르며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 하려는 욕망과 독선은 참으로 안타까운 꼴불견이다.

바울은 우리의 투쟁은 육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일깨워 주고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3.천재지변이 있으리라 예언 하신다.(7b~8)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사람들의 욕망과 향락은 극에 달하고 그런 것들의 잔재는 자연파괴로 연결되고 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지구촌은 과거에 상상을 할 수 없었던 자연적 재앙을 늘 뉴스로 듣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의 재림의 전조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더욱 영적으로 경성해야 하는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주님은 누가를 통한 같은 말씀에서 경고하신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눅21:28)

믿는 사람들이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이 세상과 역사를 거쳐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이 [재난, 헬, 오딘(odin)] 즉, 산모가 애기를 낳기 위한 산고의 시작과 같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충고를 깊이 새겨야 한다.

“…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벧후3:11~12) 준비된 자에게는 주님께서 어떤 형태로 오시든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여기에 세 번째로 상고할 말씀을 예고하는 듯 하다.



Ⅲ.신앙의 사람들에게 핍박이 있을 것이다.(9~14)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말세의 징조에서 세 번째는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있게 되는 현상이요 안타까운 징조들이다. 이미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보내시면서 비슷한 당부를 주신바 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22) 하셨고 최후의 다락방 강화에서도 이를 확인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요15:21) 하셨고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도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벧전3:14) 라고 격려하신다.

마지막 시대의 사람들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도 주님의 백성들을 미워하고 죽음에 넘기울 것이라는 경고이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야 이런 일이 없지만 회교권에서는 지금도 빈번한 일들이다. 이런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평안의 시대에 훈련하여 신앙을 키워 둬야 하고 서로를 사랑의 끈으로 결속해서 함께 이러한 시험을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재림의 시기가 가까운 때에 신앙의 사람들의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밖으로부터 박해가 있게 될 때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10) 이것은 적어도 같은 공동체 안에서 믿음이 약한 자들의 배교행위를 예언하고 있다. 시험에 들되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는” 데까지의 시험은 참으로 안타까운 시험이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후서2:3f에서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 라는 조금은 두려운 경계를 주고 있다.

연이어지는 징조들은 더욱 절망적이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11) 사실 외부에서의 박해보다 심각한 것은 교회 안에서의 거짓 교훈을 가진 자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고 이미 산상보훈에서도 가르친바 있다.

이러한 현상의들의 이유들이 증거 되어지고 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12) 법이 아닌 불법이 교회 안에서 범람하게 되고 그 결과로 교회의 근본적인 힘인 ‘사랑’이 식어진다는 예언이다. 요한 사도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8~19)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법이야말로 사랑의 법이요 구원의 법인데도 이러한 바탕을 잃어버리는 불법이 교회를 지배하므로 율법의 완성은 고사하고 정 반대적인 현상이 판을 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10)는 일들이 너무나 쉽게 일어나리라는 경고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오래 참음’의 은사가 가장 큰 효력을 발하게 된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 이러한 견딤은 인간의지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사람으로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셔서 십자가위에서 희생 제물이 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가셔서 성령을 보내시고 그 주님을 바라는 자들을 위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이유로 삼고, 어떤 어려움에도 그것 때문에 성령과 더불어 견디고 믿음을 지키는 자들, 그들은 결국 구원을 얻으리라는 분명한 약속의 확인이다.

이제 오늘 마지막 구절은 사람과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 주고 계신 것으로 마무리 되어지고 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14) 다투고 싸우는 모든 민족들에게 먼저 믿는 사람을 통해서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그제야 주님께서 임하셔서 불법과 어두움을 영원히 정죄 하시고 빛의 자녀들을 해함도 상함도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리라는 약속을 확인해 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시험을 당하고 박해가 심할수록 증거 하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임하시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예정된 시간표는 분명히 있을 것이고 때가 차야 되겠지만 그 엄청난 역사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적극적인 증거의 삶을 통하여 성취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보이는 것들은 사라질 것들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미혹의 일이 많아질 것이고 국가와 민족간의 전쟁의 소문은 꼬리를 물게 되고 곳곳에 지진과 기근이 있게 되는 가운데, 신앙 안에서도 거짓 선생이 범람하고 진리는 점점 희귀해지고 사랑을 잃게 되며 미움이 팽배하여 서로를 잡아주는 역 십자가의 현산들 속에 믿음의 사람들은 말씀과 성령과 같은 지체들끼리 격려하며 십자가의 피 흘리신 주님의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