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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아침에는 우리는 주님의 안타까움과 애정어린 눈물을 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이 말씀은 이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책망이 극에 달하고 오히려 그러한 소경 같은 지도자들에게 이끌림을 받는 주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우시는 주님을 오늘 본문에서는 뵙게 된다.
저주로 갈 수 밖에 없는 죄진 인생들 … 이들에게 영원히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새해’도 기쁨도 순간일 뿐이다. 이렇게 저주 받은 인생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지만 계속해서 그 보호 속에서 빠져나가기만 시도하는 자기 백성들이라는 사람들 … 그리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한다는 지도자들 … 주님은 연민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바로 그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씻김 받고 귀한 약속 안에 있는 우리들, 오늘 이 안타까운 모습을 경계 받음으로 주님을 눈물 흘리게 하는 것 보다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면서 …
Ⅰ.이왕에 허락된 천국을 거절한다면 남는 것은 저주뿐이다.(33~34)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1.주님은 언제나 진실하셨다.(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제 주님의 책망은 비극의 절정에 달해 있다. 그러나 이 선언도 역시 회개를 부탁하는 충격요법이지 참으로 저주를 주시고자 하시는 주님이 아니심을 볼 때 이런 책망의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미 3:7에서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는 무서운 책망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회개치 못한 이들은 같은 저주를 바로 심판 주이신 주님으로부터 듣고 만다.
창세기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는 최초의 범죄를 이 역사 속에 가지고 들어와서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에덴(사65:25)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류를 저주로 쫓아낸 장본인으로 사탄의 도구로 여자의 후손의 원수인 ‘뱀’은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혼란케 하는 악의 도구로 상징된다. 요한계시록20:2에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라는 준비된 형벌은 분명하지만, 그러한 악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특히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표현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싫어하는 욕설이었을 것이다.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신들의 먹이로 삼아 진리가 아닌 거짓과 위선의 독침, 죄악의 독침을 여지없이 꽂는 저들은 마치 자신의 먹이로 삼기 위해 다른 유순한 짐승들을 죽이기 위해 독침을 꽂는 독사에 비유하고 계시는 것이다. 400년의 암흑기 후에 나타난 요한의 회개의 요청도 거절한 그들은 결국 진리의 주님으로부터 마지막 선고를 듣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주님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유순하시고 사실 그들을 죄의 저주에서 사주시기 위해 죽어주셨다. [회개하는 세리와 창기들에 대해서는 한량없이 온유하신 주님을 뵙는다. - 막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고 항의할 정도였다.]
그러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죄악의 종자들에게는 조금도 용서가 없으셨다. 주님은 저주 받을 자에게 복 받을 자라고 결코 속이지 않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역시 만주의 주님이시고 진리의 심판자이시다.
2.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언제나 교훈 하셨다.(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비롯해서 인류에게 말로, 징조로, 이적으로, 교훈으로, 글로 끊임없이 깨우침을 주셨다. 그러나 귀를 닫아버린 백성들에게는 벽에다 부르짖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성령에 충만했던 다윗은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시58:4) 라고 묘사했고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호11:2)는 탄식의 예언을 주셨던 주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된다. 이런 사악함은 스데반을 통해서 완성된 복음이 전해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행7:57)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외치는 자들을 환영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하고 고통을 줄 것이라고 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시면서 이미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10:23)고 말씀하신바 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들리는 귀는 참으로 주님 말씀처럼 복 있는 사람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23; 눅8: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신 말씀은 안타깝게도 역사 속에 그대로 나타나서;
[행5:40 “사도들을 채찍질하며”, 행7:59 “돌로 스데반을 치니”, 행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13:50 “유대인들이 …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충동)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는 여러 교회의 확장과 성령의 행전 속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고 나중 바울 조차도 고백하기를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고후11:24~25) 라는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의로운 자들은 어려움을 당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진리를 향해 귀를 크게 벌여 들을 수 있는 복된 백성들이 되어서 저주가 아니라 복 받는 사람들로 주님 오실 때까지 믿음에 정진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
Ⅱ.하나님은 의인의 피는 보상하시고 그 악을 행한 자들에게 갚으실 것이다.(35~36)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다고 하는 것은 죄는 반드시 죄대로 형벌하시고 의는 의대로 반드시 보응 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시34:15~17) 라고 말씀 하신다.
특히 여기 인용된 두 곳의 말씀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진 구약 성경의 첫 성경인 창세기4:8에서 마지막 성경인 역대하24:20~22에 나타나는 의롭게 순교한 두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 보내셨던 죽은 의인들 모두를 통틀어서 의미하는 말씀이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4:8)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0)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 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대하24:20~22)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그럼으로 이 말씀은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다. 지금 이들이 자신들의 조상들의 죄에 자신들은 동참치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조상들의 모든 죄가 다 함께 그들에게 진노로 부어질 것이라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진노를 쌓는다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이왕에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되었으니 끝까지 주님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의인으로 살아서 복을 쌓는 저와 여러분 …
Ⅲ.사랑의 품을 거절하는 약속의 자녀들을 안타까워 하신다.(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을 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저주는 이제 안타까운 탄식으로 바뀐다. 누가복음에서는 13:34~35에 본문과 꼭 같은 내용이 소개되고 19:41~44에 좀 더 자세한 내용을 한 곳 더 기록하고 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아마도 주님이셨기 때문에 멸망할 약속의 성에 대해 이처럼 안타까워 하셨을 것이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드리라고 했던 그곳, 솔로몬 성전이 세워졌던 그곳, 평화의 이름[예루살렘 - 평화의 터전]으로 일컬어지는 도성[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창22:2)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3:1)]이 이방의 말발굽에 허물어질 것을 내다보시는 주님의 가슴에는 안타까움과 가련함의 눈물이 강물처럼 흘렀을 것이다.
만약에 간악한 인간이었다면 “당연한 결과다!” 라고 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은 결코 한 사람의 멸망도 기뻐하지 않으시고 모두가 살기를 바라시는 긍휼과 사랑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
왜 주님께서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종의 형상을 입으셨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그러므로 한 사람의 멸망도 주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결코 아님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였으면 한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저는 어려서 어미 닭이 병아리들을 몰고 남새밭가나 마당 가에서 벌레들을 찾아서 먹이는 것을 더러 지켜 본적이 있다. 만약에 강아지라도 옆에 올라치면 병아리들을 자신의 날개 아래 품고 목에 털을 곧게 새우면서 대항하고 강아지는 기겁을 하고 꽁무니를 뺀다.
이것은 비단 강아지에게 뿐만 아니라 가끔 독수리들이 위에 날 때도 마찬가지고 소가 들어 올 때도 그렇고 염소가 들어 올 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되더라도 반드시 자신의 어린 새끼들을 지켜내려는 그러한 모습은 무서운 어미의 보호 본능을 보는데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그렇게 품으려 했다고 비유를 하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주님은 아브라함 이후 자신의 선택된 백성들에게 수없이 회개를 요청하시지만 한번 비뚤어져 버린 그들의 신뢰는 영영히 회복되지 못했고 그래서 결국 이러한 거역을 통해서 약속 밖에 있었던 이방인들인 우리를 먼저 구원하시는 지혜를 본다. 오늘도 우리 개개인을 향해서 우리 교회를 향해서 바르지 못한 신앙의 자세나 믿음 없는 모습을 보시면서 같은 탄식을 하시는 모습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결국 어머니의 보호의 품을 스스로 떠나는 병아리들은 그것을 노리는 주변의 동물들에게 희생되고 만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냉엄한 자연의 현실을 실감하게 되는데 바다 가파른 섬의 괭이 갈매기 같은 것을 보면 그런 모습을 실감하게 된다. 어미가 먹이를 구하러 나간 사이에 새끼가 자기 둥지를 빠져 나오면 다른 어미들이 쪼아대서 마침내는 가파른 절벽 밑으로 굴러 떨어져 죽고 마는 것을 모면 왠지 가슴이 쓰라림을 느낀다.
어찌 보면 새끼가 불쌍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고 주변의 다른 어미들이 아직 자신의 앞 가름도 못하는 새끼를 쪼아 대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서 쫓아주고 싶을 정도이다. 물론 주님의 보호는 여기에 비교될 수 없고 또 완벽하지만 그러나 사실 마귀 사탄이 꼭 이 다른 어미 갈매기와 같다. 우리가 조금만 유약함으로 흔들리면 그 기회를 놓지지 않으려는 간교함을 가지고 달려드는 것이 마귀 사탄이다.
주님의 약속은 철옹성 같이 견고하지만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라고 하시는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의 보호의 품을 빠져 나와 방황 한다면 우리는 마귀의 목표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5:8~9)는 경고를 주고 있다.
함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이 주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만 것을 안타깝게도 다음 이어지는 예언의 말씀에서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이것은 물론 다음 24장에서도 확인 되어지겠지만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마음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것은 엄청난 복이지만 그 헤아릴 수 없는 복은 약속 받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영원히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여 끊임없이 고치고 수리되어져야만 한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 5) “…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는 경계는 언제나 경성해야 할 이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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